네델코 차브리노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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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델코 차브리노비치는 1895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에서 태어났으며, 아나키즘에 심취하여 정치적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세르비아의 비밀 결사 조직인 흑수단에 가담하여,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계획에 참여했다. 사라예보 사건 당시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었으며,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1916년 테레진 감옥에서 결핵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사라예보로 옮겨져 다른 공모자들과 함께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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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델코 차브리노비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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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네델코 차브리노비치 |
원어 이름 | Недељко Чабриновић / Nedeljko Čabrinović |
![]() | |
출생일 | 1895년 2월 1일 |
출생지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라예보 (현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 |
사망일 | 1916년 1월 23일 |
사망지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테레진 요새, 보헤미아 왕국 (현재의 체코 테레진) |
사망 원인 | (정보 없음) |
개인 정보 | |
국적 | 세르비아 |
경력 | |
직업 | 활동가 |
2. 어린 시절
사라예보에서 다섯 자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사라예보 교외에서 음식 공급업자로 일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무례함, 신체적인 학대에 시달리던 네델코 차브리노비치는 학업을 그만두고 가출하게 된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 위치한 인쇄소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아나키즘 출판물을 접했다.
차브리노비치는 사라예보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학대로 인해 학업을 그만두고 가출했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의 인쇄소에서 일하면서 아나키즘 출판물을 접하게 된다.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사회주의 인쇄소와 아나키즘 문헌을 발행하는 인쇄소에서 일했다. 크르스타 치치바리치의 영향을 받아 아나키스트 강연에 참석하고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로 정의하기 시작했다.
네델코 차브리노비치는 1895년 1월 20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지배하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에서 태어났다. 차브리노비치의 아버지는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사라예보에서 카페를 운영했다. 차브리노비치는 아버지의 출신지 근처인 헤르체고비나 트레비네에 있는 상업학교의 학생이었다. 1908년 그는 트레비네를 떠나 사라예보 상업학교에 입학했지만, 최종 시험에 낙제했다. 차브리노비치는 다양한 견습 과정을 시작했고, 결국 사라예보의 세르비아 인쇄소에 들어가 2년 동안 조판 기술을 배웠다. 견습생들을 조직하려 했던 그는 열네 살의 나이에 인쇄공 견습생 길드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동료 노동자와 싸움을 벌인 후 차브리노비치는 직장을 그만두었고, 그 결과 아버지에게 집에서 쫓겨났다.
3. 정치적 활동 및 급진화
1912년 사라예보로 돌아와 파업에 참여했다가 추방당하기도 했지만, 곧 돌아와 정규직 노조원이 되었고 가브릴로 프린치프를 만났다. 1913년에는 트리에스테와 베오그라드에서 일했다.
1914년 초, 베오그라드에서 프린치프를 다시 만나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보스니아 방문 소식을 듣게 된다. 프린치프는 차브리노비치와 트리프코 그라베즈를 설득하여 대공 암살 계획에 참여시킨다. 이들은 밀란 치가노비치를 통해 흑수단과 연결되었고, 흑수단은 1903년 5월 쿠데타 (세르비아)의 배후에 있던 비밀스러운 초민족주의 세르비아 단체였다. 흑수단의 도움으로 무기를 구하고 훈련을 받았다.
차브리노비치 일행은 1914년 5월 말 베오그라드를 떠나 보스니아로 밀입국하여 6월 초 사라예보에 도착했다. 이후 프린치프의 지시에 따라 메흐메드 메흐메드바시치, 츠베트코 포포비치, 바소 추브릴로비치가 암살 계획에 추가로 합류했다.
3. 1. 아나키즘과 민족주의
차브리노비치는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 있는 인쇄소에서 일하면서 아나키즘 출판물을 접했다. 노비사드에서 카를로브치와 시드를 거쳐 베오그라드의 '다치치의 인쇄소' 등에서 일하며 아나키즘 문헌을 발행했다. 그는 크르스타 치치바리치의 영향을 받아 야간 아나키스트 강연에 참석했고, 스스로를 아나키스트 또는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자"로 정의했다. 1912년 사라예보로 돌아와 파업에 참여했다가 아나키즘 활동으로 인해 5년간 추방당했다. 베오그라드로 돌아갔지만, 친구와 친척의 도움으로 추방령이 해제된 후 사라예보로 돌아와 1912년에 정규직 노조원이 되었으며, 같은 해에 가브릴로 프린치프와 알게 되었다.
3. 2. 청년 보스니아와 흑수단
1911년부터 보스니아의 범슬라브주의 혁명 조직인 청년 보스니아 대원으로 활동했다. 1912년부터는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활동하고 있던 세르비아의 비밀 결사 조직인 흑수단 회원으로 활동했다. 1914년 네델코 차브리노비치는 가브릴로 프린치프를 비롯한 5명의 동료들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 조피 초테크 폰 호엔베르크 여공작 부부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흑수단은 1903년 5월 쿠데타 (세르비아)의 배후에 있는 비밀스러운 초민족주의 세르비아 단체였다. 차브리노비치, 프린치프, 그라베즈는 브라우닝 권총 5정, 수류탄 6개, 청산가리 알약을 갖추고 1914년 5월 말 베오그라드를 떠났다. 그들은 나로드나 오드브라나에 있는 치가노비치의 연락책의 도움으로 보스니아로 밀입국했다.
4.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에서 네델코 차브리노비치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 부부가 탄 차량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차량 밑에서 폭발하여 16명이 중상을 입는 데 그쳤다. 이후 사이안화물 캡슐을 삼키고 밀랴츠카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경찰에 체포되었다.
알프레트 폰 후겐베르크 오스트리아 대공과 그의 부인 호엔베르크 공작부인 조피는 1914년 6월 28일 오전 10시 직전에 사라예보에 기차로 도착했다. 사라예보 시청으로 향하는 6대의 차량 행렬 중 세 번째 차량에 탑승했으며, 군중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차량 지붕을 뒤로 젖혔다.
차브리노비치가 체포된 후, 대공은 그의 폭탄에 부상당한 장교들을 방문하기 위해 계획을 변경했다. 대공이 탑승한 차량이 잘못된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가브릴로 프린치프 바로 앞에서 속도를 늦추자, 프린치프는 권총 두 발을 발사하여 대공은 목정맥에, 부인 조피는 복부에 총을 맞았고, 두 사람 모두 몇 분 후에 사망했다.
4. 1. 암살 계획
1911년부터 보스니아의 범슬라브주의 혁명 조직인 청년 보스니아의 대원으로 활동했다. 1912년부터는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활동하고 있던 세르비아의 비밀 결사 조직인 흑수단 회원으로 활동했다.1914년, 네델코 차브리노비치는 가브릴로 프린치프를 비롯한 5명의 동료들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과 조피 초테크 폰 호엔베르크 여공작 부부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암살자 6명은 모두 경로를 따라 배치되었다. 이들은 각자 왕실 차량이 자신의 위치에 도착하면 대공을 암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왕실 차량을 처음 발견한 공모자는 무하메드 메흐메드바시치였지만, 겁을 먹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차량을 지나치게 했다. 다음은 폭탄을 소지한 바소 추브릴로비치였으나, 그 역시 차량이 자신을 지나갈 때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차브리노비치는 세 번째 암살자였다. 1914년 6월 28일 오전 10시 30분 직전, 차량 행렬이 중앙 경찰서를 지나갈 때, 차브리노비치는 강가에 서서 M.12 바시치 수류탄을 대공의 차량으로 던졌다. 그러나 10초의 지연 시간을 가진 폭탄은 접힌 보닛에서 튕겨 뒤쪽 차량 아래에서 폭발했다. 이로 인해 차량에 탑승한 에릭 폰 메리치와 알렉산더 폰 보스-발덱 백작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근처의 군중들도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차브리노비치는 수류탄을 던진 후, 청산가리 알약을 삼키고 밀랴츠카강으로 뛰어들었지만, 알약은 치명적이지 않아 입에서 거품이 나고 구토를 하게 만들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사람들이나 경찰이 당시 건조한 여름 때문에 깊이가 약 10.16cm밖에 안 되는 강에서 그를 끌어냈다.
4. 2. 암살 실행과 실패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 당시 프란츠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 부부가 탑승한 차량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차량 밑에서 폭발하여 16명이 중상을 입었다. 네델코 차브리노비치는 사이안화물 캡슐을 삼키고 밀랴츠카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현장에 있던 경찰에 체포되었다.암살자 6명은 모두 경로를 따라 배치되었으며, 각자 왕실 차량이 자신의 위치에 도착하면 대공을 암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왕실 차량을 처음 발견한 공모자 무하메드 메흐메드바시치는 겁을 먹고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폭탄을 소지한 바소 추브릴로비치 역시 차량이 지나갈 때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차브리노비치는 오전 10시 30분 직전, 차량 행렬이 중앙 경찰서를 지나갈 때 강가에서 M.12 바시치 수류탄을 대공의 차량으로 던졌다. 그러나 10초 지연 폭탄은 접힌 보닛에서 튕겨 뒤쪽 차량 아래에서 폭발했다. 이로 인해 차량 탑승자 에릭 폰 메리치와 알렉산더 폰 보스-발덱 백작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근처 군중들도 여러 명 부상당했다.
수류탄을 던진 후, 차브리노비치는 청산가리 알약을 삼켰으나 치명적이지 않아 구토를 했다. 그는 건조한 여름 탓에 깊이가 약 10.16cm밖에 안 되는 밀랴츠카 강으로 뛰어들었지만, 곧 사람들과 경찰에게 붙잡혀 사라예보 중앙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4. 3. 재판과 처벌
1914년 6월 28일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사라예보 사건을 일으키기 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타고 있던 차량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차량 밑에서 터져 16명이 중상을 입었다. 네델코 차브리노비치는 사이안화물 캡슐을 삼키고 밀랴츠카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경찰에 체포되었다.
수사 결과 6명의 암살자들이 대공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드러나 25명이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차브리노비치와 프린치프는 1914년 10월 28일 사라예보 법원에서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차브리노비치는 범행을 자백하고 대공의 세 자녀에게 사과 편지를 써서 후회하는 마음을 표현했고, 세 자녀는 모두 그를 용서했다.
총 16건의 형이 선고되었다. 차브리노비치, 프린치프, 그라베즈는 21세 미만으로 사형 대신 20년 가혹 노동형을 선고받았고, 매달 하루는 음식과 물 없이, 매년 6월 28일에는 어둠 속에 갇히는 형벌이 추가되었다. 추브릴로비치는 16년, 포포비치는 13년형을 선고받았다. 메흐메드바시치는 몬테네그로로 도주했고, 일리치, 벨코 추브릴로비치, 미슈코 요바노비치는 1915년 2월 3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5. 수감 생활과 죽음
네델코 차브리노비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당국으로부터 반역,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범행 당시에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고 법원으로부터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6년 1월 20일에 테레진 감옥에서 결핵으로 인해 사망했다.
추위, 배고픔, 그리고 독방 감금으로 고통받던 차브리노비치의 건강은 빠르게 악화되었다. 1915년 말, 그는 오스트리아 작가 프란츠 베르펠의 방문을 받았다. 차브리노비치는 1916년 1월 23일에 사망했다. 차브리노비치는 수감된 13명 중 8명 중 한 명으로, 비인도적인 수감 환경으로 인해 형을 선고받는 동안 사망했다. 전쟁 후 차브리노비치의 시신은 발굴되어 사라예보로 옮겨져 다른 공모자들과 함께 한 개의 공동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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