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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 (1788년~17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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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 (1788년~1791년)은 18세기 쇠퇴기에 접어든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의 팽창 정책으로 악화된 관계 속에서 발발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의 동맹에 따라 참전했지만, 브라반트 혁명과 프로이센의 위협 등 국내외적 문제로 인해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 초반 오스트리아군은 아군 오인 사격으로 피해를 입고 오스만 제국에 주도권을 내주었으나, 이후 반격에 성공하여 부다를 점령했다. 그러나 시스토바 조약을 통해 오르소바와 작은 마을 두 곳만을 얻는 등 실질적인 성과는 미미했다. 전쟁은 오스트리아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결국 레오폴트 2세는 프로이센의 개입 위협으로 인해 시스토바 조약을 체결하고, 오스트리아는 점령지를 오스만 제국에 반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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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 (1788년~1791년) - [전쟁]에 관한 문서
전쟁 개요
분쟁 명칭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 (1788–1791)
다른 명칭영어: Austro-Turkish War
터키어: 1787-1791 Osmanlı-Avusturya Savaşı
일본어: 墺土戦争 (오츠도센소)
일부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의 일부
시기1788년 2월 – 1791년 8월 4일
장소동유럽 및 남동유럽
결과시스토바 조약 체결
교전 세력 1합스부르크 군주국
코차의 국경 지대
러시아 제국
교전 세력 2[[File:1783_Ottoman_Flag.svg|22px]] 오스만 제국
코자 유수프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이 소피아에서 진군하는 모습
1788년 5월 코자 유수프 파샤가 이끄는 8만 명의 오스만 제국군 주력이 소피아에서 진군하는 모습
지휘관
합스부르크 군주국 지휘관요제프 2세 (사망 1790년)
레오폴트 2세
프라이헤르 폰 라우돈 #
파울 크라이
메르펠트
요제프 라데츠키
안톤 폰 엘스니츠
외젠-기욤 아르장토
프란츠 폰 라우어
안드레아스 오라일리 폰 발린로
하인리히 15세 폰 그라이츠
요한 폰 슈미트
카를 폰 푸타크
하인리히 폰 벨레가르데
페터 폰 바토르케즈
코차 안젤코비치
요제프 마리아 폰 콜로레도
카를 폰 펠레그리니
오스만 제국 지휘관[[File:1783_Ottoman_Flag.svg|22px]] 압둘 하미드 1세 (사망 1789년)
[[File:1783_Ottoman_Flag.svg|22px]] 셀림 3세
[[File:1783_Ottoman_Flag.svg|22px]] 제나제 하산 파샤
병력 규모
합스부르크 군주국알 수 없음
오스만 제국알 수 없음
피해 규모
합스부르크 군주국알 수 없음
오스만 제국알 수 없음
영토 변화
결과오스만 제국, 오르소바와 크로아티아 국경 지대를 합스부르크 군주국에 할양

2. 전쟁의 배경

이 전쟁은 1787년 8월, 오스만 제국러시아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되었다.[1][12] 당시 러시아와 동맹 관계에 있던 오스트리아요제프 2세는 이듬해 동맹 의무 이행과 영토 확장 기회를 얻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다.[1][12] 전쟁의 구체적인 배경과 각국의 상황은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2. 1.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러시아의 팽창

이 전쟁은 러시아 제국오스만 제국 간의 분쟁에서 시작되었다. 18세기 예카테리나 2세가 이끄는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여러 차례 정복 전쟁을 벌였으며, 두 제국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1787년 8월,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측의 "수많은 도발"을 이유로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1][12]

오스트리아의 황제 요제프 2세1781년 러시아와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이 동맹 조약은 오스트리아에게 러시아를 전적으로 지원할 의무를 부과했다. 또한 요제프 2세는 1783년~1784년 크림 반도 병합 때처럼 오스트리아가 아무런 이득 없이 물러나는 상황을 피하고자 했다.[1][12] 이러한 이유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의 동맹 관계에 따라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당시 오스트리아는 전쟁을 수행하기에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제국의 영토 중 멀리 떨어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현재의 벨기에 지역)에서는 브라반트 혁명으로 인해 통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발생하고 있었으며, 북쪽의 강력한 이웃인 프로이센 왕국과의 오랜 긴장 관계도 부담이었다. 역사가 호헤딩거(Hochedlinger)는 "전쟁이 이보다 더 부적절한 시기에 일어날 수는 없었다"고 평가했다.[1][12]

한편, 호헤딩거는 오스만 제국이 먼저 선전포고를 한 것이 전략적인 실수였다고 지적한다. 오스만의 선전포고로 인해 러시아는 이 전쟁을 '침략자에 맞선 방어 전쟁'으로 유럽 사회에 포장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이러한 공세적인 행동은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팽창으로부터 오스만 술탄을 보호해왔던 프랑스가 개입하기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1][12]

2. 2. 오스트리아의 참전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은 본래 러시아 제국오스만 제국 사이의 분쟁으로 시작되었다. 18세기 동안 양국은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르며 적대 관계에 있었다. 1787년 8월, 오스만 제국은 "수많은 러시아의 도발"을 이유로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1][12]

당시 오스트리아의 황제 요제프 2세러시아 제국예카테리나 2세와 1781년에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이 동맹은 오스트리아에게 러시아를 전적으로 지원해야 할 의무를 부과했다.[1][12] 또한 요제프 2세는 1783년에서 1784년 사이 러시아의 크림 반도 병합 당시 오스트리아가 별다른 이득을 얻지 못했던 것을 반복하지 않으려 했기에, 이번 전쟁 참여를 통해 영토 확장을 꾀하고자 했다.[1][12]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참전을 결정한 시기는 매우 불안정했다. 제국의 먼 영토였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현재의 벨기에)에서는 요제프 2세의 통치에 대한 심각한 저항이 일어나고 있었고, 북쪽의 강력한 이웃인 프로이센 왕국과는 오랜 긴장 관계에 놓여 있었다. 역사가 호헤딩거(Hochedlinger)는 "전쟁이 이보다 더 부적절한 시기에 일어날 수는 없었다"고 평가했다.[1][12]

한편, 오스만 제국이 먼저 선전포고를 한 것은 결과적으로 러시아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러시아는 이 분쟁을 외부 침략자에 맞선 방어 전쟁으로 포장하여 유럽 여론에 호소할 수 있었다. 또한,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며 오스만 제국을 지원해왔던 프랑스가 이번 전쟁에서는 오스만을 돕기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1][12]

3. 전쟁의 경과

러시아 제국예카테리나 2세와 맺은 동맹에 따라 1788년 2월 전쟁에 참전한 오스트리아는[3], 초기 카란세베스 전투에서 아군 오인 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러시아의 준비 지연으로 오스트리아는 전쟁 초반 유리한 기회를 놓쳤고[14][13], 오스만 제국군은 한때 메하디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낸 뒤 바나트까지 진격하기도 했다.[2]

하지만 이후 전세는 오스트리아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노련한 야전사령관 라우돈 원수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3주간의 공방전 끝에 베오그라드를 점령했으며[4][15], 크로아티아, 바나트, 보스니아 등지에서 오스만군을 몰아냈다.[4] 또한 수보로프가 지휘하는 러시아군과 연합하여 포크샤니 전투와 림니크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15]

그러나 전쟁 기간 내내 전선에서는 말라리아를 비롯한 질병이 크게 유행하여 오스트리아군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13][17] 병사 수천 명이 사망했고, 군대의 절반이 병에 걸릴 정도였다.[17] 황제 요제프 2세 역시 전선 시찰 중 병을 얻어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1790년 2월 20일 사망했다.[16][17]

1791년 시스토바 조약으로 전쟁은 종결되었으나,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통해 얻은 영토는 오르쇼바와 크로아티아 국경 부근의 작은 두 마을에 불과할 정도로 미미했다. 오히려 이 전쟁은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러시아가 별도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오스만 제국에게는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3. 1. 초기 전황 (1788년)

러시아 제국예카테리나 2세와 동맹 관계였던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 황제는 1788년 2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했다.[3] 그러나 러시아의 군사적 준비가 예상보다 늦어지면서 오스만 제국이 베오그라드 방면에 병력을 집중할 시간을 벌어주었고,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전쟁 초반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14][13]

오스트리아는 몰다비아 전선에서 러시아군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실제 지원은 1788년 말이 되어서야 가능해졌다. 황제 요제프 2세 본인도 오스만 제국과의 적극적인 교전을 다소 주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13] 전쟁 초기, 오스트리아군은 카란세베스 전투에서 아군을 오인 사격하는 심각한 실책으로 큰 피해를 입는 등 혼란을 겪었다.

1788년 7월, 오스만군은 도나우강을 넘어 오스트리아 영토인 바나트 지역으로 진격해 들어왔다.[13] 양측 모두 보급품 부족 문제에 시달렸지만, 특히 오스트리아군은 전염병 창궐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13] 1788년 오스트리아군 진영에서는 전염병이 크게 돌아 병동이 환자들로 넘쳐났고, 군 병력의 절반 가량이 병에 걸렸으며 수천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고 기록될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약 5만 명에 달하는 세르비아인 난민들이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피해 도나우강을 건너 오스트리아 영토로 몰려들면서 병참 부담은 더욱 커졌다.[13]

이에 요제프 2세는 8월 중순, 20,400명의 병력을 바나트 지역으로 급파했다.[13] 또한, 이전 오스만 제국과의 분쟁 과정에서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던 세르비아인들을 중심으로 약 5,000명 규모의 세르비아 자유군단이 창설되어 바나트 전선에 투입되었다.[14] 이들은 세르비아의 해방과 합스부르크 통치 하의 통일을 목표로 싸웠다.[14]

아주드 전투(1788년 10월 14일)

3. 2. 오스트리아의 반격과 승리 (1789년)

1789년 초, 오스만 제국군은 바나트로 진군하며 공세를 이어갔으나, 이후 전세는 오스트리아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오스트리아군은 크로아티아, 바나트, 보스니아 일부 지역에서 오스만군을 몰아냈다.[4] 특히 노련한 야전 사령관 라우돈 원수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3주간의 공방전 끝에 베오그라드를 점령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4][15] 이 점령으로 합스부르크령 세르비아가 수립되었다.[15]

포크샤니 전투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군과 터키군의 충돌


오스트리아군은 동맹국인 러시아와 협력하여 중요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수보로프 장군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은 1789년 8월 포크샤니 전투와 9월 림니크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15] 또한 요시아스 공작은 부쿠레슈티를 성공적으로 점령했다.[15]

3. 3. 전선의 참상

전선에서는 전투 자체보다 질병이 더 큰 위협이었다. 볼크마르 브라운베렌스(Volkmar Braunbehrens)에 따르면 1788년 오스트리아군 진영에서는 말라리아를 비롯한 전염병이 크게 유행했다.[13][17] 야전병원은 환자들로 가득 차 포화 상태였고, 군대의 절반 가량이 병에 걸렸으며 수천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17]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 역시 전쟁 기간 동안 많은 시간을 전선에서 보냈는데, 이때 얻은 병으로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결국 1790년 2월 20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망했다.[16][17]

양측 군대는 모두 보급품 부족 문제에 시달렸으며, 특히 오스트리아군은 심각한 병참 문제에 직면했다.[13] 오스만 제국과의 이전 분쟁을 피해 약 5만 명에 달하는 세르비아 난민이 도나우강을 건너 오스트리아 영토로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13][14] 이들 난민 중 일부는 세르비아 자유군(Serbian Free Corps)으로 조직되어 오스트리아군을 도왔다.[14]

4. 전쟁의 결과

전쟁은 오스트리아에게 큰 성과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전쟁 초기 카란세베스 전투에서의 혼란과 이후 부다, 베오그라드[15] 일부 점령에도 불구하고, 전염병 창궐로 막대한 인명 손실을 겪었다.[7] 볼크마르 브라운베렌스에 따르면 1788년 오스트리아 진영에서는 "병동은 환자들로 넘쳐났고, 군의 절반이 병에 걸렸으며, 수천 명의 병사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전쟁을 이끌던 요제프 2세 황제마저 전선에서 얻은 병으로 1790년 사망했다.[7]

후임 레오폴트 2세는 프로이센의 개입을 우려해[6][18] 1791년 시스토바 조약을 체결하며 서둘러 전쟁을 끝냈지만, 오스트리아가 얻은 영토는 미미했다.[8][20] (자세한 내용은 시스토바 조약 참조)

오히려 이 전쟁은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었던 러시아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러시아는 흑해 연안에서 영토를 확장했다(야시 조약).[21] 오스만 제국에게는 러시아에 대한 영토 상실이 더 큰 타격이었으며,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이집트에서는 맘루크 세력(무라드 베이, 이브라힘 베이)이 사실상 독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르비아는 전쟁 후에도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남았으나, 오스트리아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면서 민족 의식에 중요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9][22] (자세한 내용은 #세르비아에 미친 영향 참조)

한편, 전쟁은 오스트리아 경제에 심각한 부담을 주었다.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국채가 4억 굴덴까지 급증했고, 물가 상승과 세금 부담 증가는 에서 폭동을 유발하는 등 사회 불안을 야기했다. 이는 요제프 2세의 개혁 동력을 약화시키고 문화계 침체까지 불러왔다.

4. 1. 시스토바 조약 (1791년)

요제프 2세가 전쟁 중 사망하고 뒤를 이은 레오폴트 2세는 프로이센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며 개입할 것을 우려하여 전쟁을 서둘러 끝내려 했다.[6][18] 그 결과 1791년 8월 4일, 불가리아의 시스토바(현 스비슈토프)에서 최종적으로 평화 조약인 시스토바 조약이 체결되었다.[19]

이 조약으로 오스트리아가 얻은 것은 매우 미미했다.[8] 오스트리아는 전쟁 중 점령했던 베오그라드를 포함한 대부분의 영토를 오스만 제국에 반환해야 했다. 오스트리아가 확보한 영토는 오르쇼바(Orşova) 마을과 보스니아-크로아티아 국경 근처의 작은 크로아티아 지역(예: 드레즈니크 그라드, 체틴 성, 돈지 라파크, 스르브) 정도에 불과했다.[20] 밀러(Miller)는 이를 "오르쇼바와 크로아티아 국경 부근에 위치한 작은 두 마을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평가했다.

오스트리아와 달리, 동맹국이었던 러시아는 별도의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러시아는 흑해 연안에서 새로운 영토를 획득했으며, 1792년 1월 9일 야시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기존의 정복지를 포함하여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21]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자체보다 러시아에게 영토를 상실한 것이 더 큰 타격이었으며, 이는 제국의 오랜 쇠퇴기(오스만 제국의 정체와 개혁)를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였다. 또한, 유럽 전선에서의 군대 철수는 이집트에서 무라드 베이와 이브라힘 베이가 사실상 독립적인 정권을 수립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한편, 전쟁 전부터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세르비아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세르비아의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세르비아인들은 오스만 제국에 맞서 오스트리아를 도와 싸웠고 많은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황제가 결국 세르비아를 외면하고 오스만 술탄과 평화 조약을 맺는 것을 보며 큰 배신감을 느꼈다. 이전까지 세르비아인들은 오스트리아만이 자신들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다고 믿었으나, 코치나 크라이나와 이 전쟁을 겪으며 그 믿음은 크게 흔들렸다. 역사가 Rajić|라이치sh는 이때부터 세르비아인들이 민족 해방과 국가 재건의 희망을 오스트리아 대신 러시아에 두게 되었다고 지적했다.[9][22]

4. 2.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종결과 야시 조약 (1792년)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었던 러시아 제국은 오스트리아가 전쟁에서 이탈한 후에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러시아-튀르크 전쟁 (1787년-1792년))을 계속했다. 요제프 2세의 뒤를 이은 레오폴트 2세는 프로이센 왕국이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며 개입할 것을 우려하여 1791년 8월 4일 시스토바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에서 발을 뺐다.[6][18]

1789년 베오그라드 포위전. 시스토바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베오그라드를 포함한 점령지 대부분을 오스만 제국에 반환했다.


이 조약으로 오스트리아가 얻은 것은 오르쇼바와 보스니아-크로아티아 국경 부근의 일부 지역(예: 드레즈니크 그라드, 체틴 성, 돈지 라파크, 스르브)[20]에 불과했으며, 전쟁 중 점령했던 다른 영토는 대부분 오스만 제국에 반환해야 했다.[8]

반면, 러시아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흑해 북부 연안에서 크림 반도와 오차키프를 포함한 새로운 영토를 확보했다. 러시아는 1792년 1월 9일 야시 조약을 체결하여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이러한 영토 획득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21]

오스만 제국에게 이 전쟁은 오랜 기간 지속된 국력 쇠퇴(오스만 제국의 정체와 개혁)를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유럽 전선에서의 군대 철수는 이집트맘루크 세력인 무라드 베이와 이브라힘 베이가 이스탄불로부터 사실상 독립된 정권을 수립하는 배경이 되었다.

한편, 전쟁 전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세르비아는 전쟁 이후에도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세르비아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세르비아인들은 오스트리아를 자신들의 해방을 도와줄 유일한 세력으로 여겨왔으나,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인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오스만 제국과 단독으로 강화하자 큰 실망감을 느꼈다. 역사가 라이치(Rajić)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세르비아인들이 해방의 희망을 오스트리아 대신 러시아에 두게 되었다고 평가했다.[9][22] 전쟁 중 세르비아의 상황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합스부르크 점령 하의 세르비아 (1788년-1792년)에서 확인할 수 있다.

4. 3. 세르비아에 미친 영향

전쟁 전 세르비아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이전 분쟁에서 오스트리아로 피신했던 세르비아 난민들로 구성된 약 5,000명의 Serbian Free Corps|세르비아 자유군영어(세르비아 의용군)이 바나트 지역에 모였다.[14] 이들은 세르비아의 해방과 합스부르크 통치를 목표로 싸웠다.[14] 전쟁 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코차의 크라이나(Kočina Krajina)로 알려진 세르비아 지역은 일시적으로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또한, 약 5만 명의 세르비아 난민이 도나우강을 건너 오스트리아 측으로 넘어오면서 오스트리아군에 심각한 병참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13]

오스트리아군은 전쟁 중 베오그라드를 점령하는 등[15]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프로이센의 개입 위협 등으로 인해[18] 1791년 시스토바 조약을 맺고 전쟁을 종결했다. 이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오르쇼바(Orșova)와 보스니아-크로아티아 국경 근처의 크로아티아 지역(예: 드레즈니크 그라드, 체틴 성, 돈지 라파크, 스르브)을 제외하고[20] 전쟁 중 점령했던 세르비아 영토 대부분을 오스만 제국에 반환해야 했다.[8] 세르비아인들은 오스트리아를 도와 필사적으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고 다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전쟁은 세르비아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세르비아 역사학자 요반 라이치(Jovan Rajić|요반 라이치sh)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9][22]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친 전쟁들을 통해 세르비아인들은 오직 오스트리아만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다는 깊은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코차의 크라이나 시기와 이 마지막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1788–1791)을 거치면서 이러한 믿음은 크게 흔들렸다. 세르비아인들이 오스만 제국에 맞서 큰 공을 세우고 많은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 황제가 결국 그들을 버리고 술탄과 평화 조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세르비아인들은 국가 재건의 희망을 오스트리아 대신 러시아에 걸게 되었다.


전쟁 중 세르비아의 상황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합스부르크 점령 세르비아 (1788–1791)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5. 오스트리아 국내 상황

메이너드 솔로몬(Maynard Solomon)에 따르면, 이 전쟁은 오스트리아 내에서 인기가 없었으며, 특히 수도 주민들의 사기는 매우 저하된 상태였다. 많은 귀족이 징병을 피하고자 빈을 떠났고, 요제프 2세가 추진하던 계몽 개혁에 대한 환멸감이 도시 전체에 퍼져 있었다. 전쟁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커졌는데, 이는 주민들에게 부과된 과도한 경제적 부담 때문이었다. 식료품 가격은 급격히 상승하여 일부 품목은 두 배로 뛰기도 했다.

전쟁은 오스트리아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근대 시민 사회를 건설하려던 노력을 후퇴시켰다. 역사가 캘린저(Kallinger)는 요제프 2세가 국내 개혁을 위한 시간과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외교적 안정을 추구했지만, 그의 적극적인 외교 정책이 예카테리나 2세의 정책과 맞물려 1787년부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이 전쟁은 오스트리아 경제를 황폐화시켰다. 국가 부채는 전쟁 발발 다음 해에 2,200만 굴덴으로 치솟았고, 1790년에는 4억 굴덴까지 급증했다. 식량 가격과 세금이 오르고 새로운 징병제가 시행되면서 빈의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설상가상으로 1788년과 1789년의 흉작 이후 빵 폭동까지 발생하면서 황제의 인기는 크게 떨어졌다.

솔로몬은 문화 엘리트들의 사기 저하 문제도 지적했다. 징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많은 귀족 가문이 빈을 떠났으며, 황제가 계몽 개혁의 약속을 저버렸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그에 대한 환멸감이 널리 퍼졌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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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문서 Calinger (2003), p. 71.
[24] 문서 Solomon (1995), p. 433. ヨーゼフ2世のオーストリア社会改造の試みについてはCalinger (2003)を参照のこ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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