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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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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영진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에는 아버지 오윤선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했다. 해방 후 조만식의 비서관으로 활동하며 공산주의에 호의를 가졌으나, 소련군정과 김일성 일당의 행태에 실망하여 월남했다. 6.25 전쟁 중에는 북한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련군정의 실상을 폭로하는 저서를 펴냈으며, 김일성 가짜설을 주장했다. 극작가로 활동하며 《맹진사댁 경사》, 《배뱅이굿》 등 한국적인 해학을 담은 작품을 썼고, 삼선개헌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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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영진
오영진
출생명오영진
출생일1916년 12월 9일
출생지일제강점기 조선 평안남도 평양부
사망일1974년 10월 29일 (향년 57세)
국적대한민국
직업극작가
언어한국어
학력경성제국대학 조선어학과

2. 생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다.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인 그의 아버지 오윤선(吳胤善, 1871-1950)[1][2][3] 장로는 1922년 조만식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하고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이고, 해방 직후 1945년 8월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4] 부위원장, 인민정치위원회[5] 부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그도 해방 직후 조만식의 비서관을 지내기도 했다. 처음에는 공산주의 사상에 호의를 가지고,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에도 참가했으며, 김일성 본인과도 몇 차례 만나고 약간의 친분까지 쌓았다. 하지만 소련군정과 그 앞잡이 김일성 일당들이 공산화를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주민들의 일방적 지지를 받던 조만식과 민족 진영 지도자들을 구금하고 벌이는 무지막지한 행동들에 좌절감을 느끼고 1947년 11월 7일 월남했다.

월남후인 1948년 7월 10일에는 서울에서 북한이 파견한 인물로 보이는 자의 총격을 받아 심한 부상을 당했으나 다행히 생명은 건졌다.

그의 아버지 오윤선은 6.25 전쟁 전란 중인 1950년 10월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으로 진격할 때, 김일성 세력이 후퇴 직전 조만식 등 여러 민족 진영 지도자들과 함께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6.25 전쟁 중인 1952년 북한에서 체험한 소련군정의 실상을 폭로하는 저서 "소군정하(蘇軍政下)의 북한(北韓) : 하나의 증언(證言)"을 펴냈다[6][7]. 이 책 속에 자신이 평양에서 체험했던 소련군정의 실상과 김일성에 대한 자세한 증언이 나온다. 여기에는 북한 김일성이 가짜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언이 들어 있다. 그의 처남의 장인이었던 [http://db.history.go.kr/id/im_101_03034 김인욱(金仁旭, 1892- ?)]은 일본육사 나온 사람으로 1937년 6월 4일 보천보 사건 직후 6월 30일에 벌어진 소위 간삼봉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과 전투를 벌인 바 있다. 오영진이 해방 직후 평양에 온 북한 김일성과 당시 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김일성은 김인욱이 아니라 그와 일본 육사 동기인 김석원(金錫源, 1893~1978)이 당사자인 것처럼 잘못 말하는 것을 듣고, 그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영진은 김인욱 본인의 말을 정확히 전해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에 의하면 당시 6사장 김일성은 김인욱을 직접 만나 담판을 벌인 적도 있기 때문에 김석원으로 이름을 잘못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김인욱은 평안남도 용강군(平安南道 龍岡郡) 출신으로 해방 전 예편하고, 고향에서 살다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끌려간 후 소식을 모른다고 한다.[8]

소위 간삼봉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 부대와 맞붙었던 일본군을 실제로 지휘한 사람은 서울 용산연대의 김석원이 아니라, 그와 일본 육사 동기로 함흥연대 소속이었던 [http://db.history.go.kr/id/im_101_03034 김인욱(金仁旭, 1892- ?)] 소좌였다는 것은 당시 신문 기사에서도 확인이 되며,[9] 여러 사람들의 연구에 의해서도 잘 밝혀져 있다.[10] 북한 측이 이 사안과 관련하여 김인욱 아닌 김석원을 자꾸 거론하는 것은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과 간삼봉 전투 당사자인 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 가짜라는 증거일 뿐이다.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은 같은 이름을 쓰며 자신이 6사장인양 행동하여 그 공을 가로챘다.

그의 희곡, 맹진사댁 경사대한민국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상)에 실려 있다.

주요작품으로는 《배뱅이굿》, 《맹진사댁 경사》, 《시집 가는 날》이 있다. 한국적인 해학을 담은 향토적인 소재의 작품을 썼다.

1969년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2. 1. 초기 생애 및 배경

오영진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다.

그의 아버지 오윤선(吳胤善, 1871-1950)[1][2][3] 장로는 민족지도자 중 한사람으로, 1922년 조만식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하고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였다. 1945년 해방 직후에는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4] 부위원장, 인민정치위원회[5] 부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오영진은 해방 직후 조만식의 비서관을 지냈다. 처음에는 공산주의 사상에 호의를 가져,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에 참가하고 김일성 본인과도 몇 차례 만나 친분을 쌓았다. 그러나 소련군정과 김일성 일당이 공산화를 위해 조만식과 민족 진영 지도자들을 구금하는 등의 행동을 보이자, 이에 좌절감을 느껴 1947년 11월 7일 월남했다.

1948년 7월 10일, 서울에서 북한이 파견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총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생명은 건졌다.

그의 아버지 오윤선은 6.25 전란 중이던 1950년 10월,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으로 진격할 때 김일성 세력이 후퇴 직전 조만식 등 여러 민족 진영 지도자들과 함께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1952년, 6.25 전쟁 중에 북한에서 체험한 소련군정의 실상을 폭로하는 저서 "소군정하(蘇軍政下)의 북한(北韓) : 하나의 증언(證言)"을 펴냈다.[6][7] 이 책에는 자신이 평양에서 체험한 소련군정의 실상과 북한 김일성이 가짜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언이 담겨있다. 그의 처남의 장인이었던 [http://db.history.go.kr/id/im_101_03034 김인욱(金仁旭, 1892- ?)]은 1937년 6월 4일 보천보 사건 직후 6월 30일에 벌어진 간삼봉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과 전투를 벌였다. 오영진이 해방 직후 평양에 온 북한 김일성과 당시 일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김일성은 김인욱이 아닌 김석원이 당사자인 것처럼 잘못 말하여 그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6사장 김일성은 김인욱을 직접 만나 담판을 벌인 적도 있어 김석원으로 이름을 잘못 알 수가 없다는 것이 오영진과 김인욱의 주장이었다. 김인욱은 평안남도 용강군 출신으로 해방 전 예편하고 고향에서 살다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끌려간 후 소식이 끊겼다.[8]

간삼봉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 부대와 맞붙었던 일본군 지휘관은 김석원이 아니라 김인욱 소좌였다는 것은 당시 신문 기사[9]와 여러 연구[10]에서도 밝혀진 사실이다. 북한 측이 김인욱 아닌 김석원을 계속 언급하는 것은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과 간삼봉 전투 당사자인 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 가짜라는 증거일 뿐이다. 오영진에 따르면,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은 같은 이름을 쓰며 자신이 6사장인양 행세하여 그 공을 가로챘다.

그의 희곡 맹진사댁 경사대한민국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상)에 실려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배뱅이굿》, 《맹 진사 댁 경사》, 《시집 가는 날》이 있으며, 한국적인 해학을 담은 향토적인 소재의 작품을 썼다.

1969년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2. 2. 해방 직후 활동 및 월남

오영진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다.

그의 아버지 오윤선(吳胤善, 1871-1950)[1][2][3] 장로는 1922년 조만식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하고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였다. 해방 직후 1945년 8월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4] 부위원장, 인민정치위원회[5] 부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오영진은 해방 직후 조만식의 비서관을 지냈다. 처음에는 공산주의 사상에 호의를 가지고,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에도 참가했으며, 김일성 본인과도 몇 차례 만나 친분을 쌓았다. 하지만 소련군정과 그 앞잡이 김일성 일당들이 공산화를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주민들의 일방적 지지를 받던 조만식과 민족 진영 지도자들을 구금하고 벌이는 무지막지한 행동들에 좌절감을 느끼고 1947년 11월 7일 월남했다.

월남 후인 1948년 7월 10일에는 서울에서 북한이 파견한 인물로 보이는 자의 총격을 받아 심한 부상을 당했으나 다행히 생명은 건졌다.

6.25 전란 중인 1950년 10월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으로 진격할 때, 그의 아버지 오윤선은 김일성 세력이 후퇴 직전 조만식 등 여러 민족 진영 지도자들과 함께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6.25 전쟁 중인 1952년 북한에서 체험한 소련군정의 실상을 폭로하는 저서 "소군정하(蘇軍政下)의 북한(北韓) : 하나의 증언(證言)"을 펴냈다[6][7]. 이 책에는 자신이 평양에서 체험했던 소련군정의 실상과 김일성에 대한 자세한 증언, 북한 김일성이 가짜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언이 들어 있다. 그의 처남의 장인이었던 [http://db.history.go.kr/id/im_101_03034 김인욱(金仁旭, 1892- ?)]은 일본육사 출신으로 1937년 6월 4일 보천보 사건 직후 6월 30일에 벌어진 소위 간삼봉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과 전투를 벌인 바 있다. 오영진이 해방 직후 평양에 온 북한 김일성과 당시 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김일성은 김인욱이 아니라 그와 일본 육사 동기인 김석원(金錫源, 1893~1978)이 당사자인 것처럼 잘못 말하는 것을 듣고, 그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영진은 김인욱 본인의 말을 정확히 전해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에 의하면 당시 6사장 김일성은 김인욱을 직접 만나 담판을 벌인 적도 있기 때문에 김석원으로 이름을 잘못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김인욱은 평안남도 용강군(平安南道 龍岡郡) 출신으로 해방 전 예편하고, 고향에서 살다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끌려간 후 소식을 모른다고 한다.[8]

소위 간삼봉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 부대와 맞붙었던 일본군을 실제로 지휘한 사람은 서울 용산연대의 김석원이 아니라, 그와 일본 육사 동기로 함흥연대 소속이었던 [http://db.history.go.kr/id/im_101_03034 김인욱(金仁旭, 1892- ?)] 소좌였다는 것은 당시 신문 기사에서도 확인이 되며,[9] 여러 사람들의 연구에 의해서도 잘 밝혀져 있다.[10] 북한 측이 이 사안과 관련하여 김인욱 아닌 김석원을 자꾸 거론하는 것은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과 간삼봉 전투 당사자인 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 가짜라는 증거일 뿐이다.

2. 3. 6.25 전쟁과 반공 활동

오영진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다.[1][2][3] 그의 아버지 오윤선은 조만식과 함께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였고, 해방 직후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4] 부위원장, 인민정치위원회[5] 부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오영진 또한 해방 직후 조만식의 비서관을 지냈다.

처음에는 공산주의 사상에 호의를 가졌으나, 소련군정과 김일성 일당의 행태에 좌절하여 1947년 11월 7일 월남했다. 1948년 7월 10일에는 서울에서 북한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총격을 당해 중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생명을 건졌다. 그의 아버지 오윤선은 6.25 전쟁 중인 1950년 10월,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으로 진격할 때 김일성 세력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1952년, 오영진은 6.25 전쟁 중에 북한에서 겪은 소련군정의 실상을 폭로하는 저서 "소군정하(蘇軍政下)의 북한(北韓) : 하나의 증언(證言)"을 펴냈다.[6][7] 이 책에는 북한 김일성이 가짜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언이 담겨 있다. 그의 처남의 장인이었던 [http://db.history.go.kr/id/im_101_03034 김인욱(金仁旭, 1892- ?)]은 보천보 사건 직후 간삼봉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과 전투를 벌인 바 있다. 오영진은 해방 직후 평양에서 만난 북한 김일성이 김인욱이 아닌 김석원을 언급하는 것을 듣고 진실성을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인욱은 당시 6사장 김일성과 직접 담판을 벌인 적도 있어 이름을 잘못 알 수 없다고 했다. 김인욱은 해방 전 예편하고 고향에서 살다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끌려간 후 소식이 끊겼다.[8]

간삼봉 전투에서 일본군을 지휘한 사람은 김석원이 아니라 김인욱 소좌였다는 사실은 당시 신문 기사[9]와 여러 연구[10]를 통해 밝혀졌다. 북한 측이 김인욱 대신 김석원을 언급하는 것은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과 간삼봉 전투의 당사자인 6사장 김일성이 아니라 가짜라는 증거일 뿐이다.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은 같은 이름을 쓰며 자신이 6사장인양 행동하여 그 공을 가로챘다.

2. 4. 극작가 및 사회 활동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다. 그의 아버지 오윤선(吳胤善, 1871-1950) 장로는 조만식과 함께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였고, 해방 직후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4]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민족지도자였다.[1][2][3] 오영진 또한 해방 직후 조만식의 비서관을 지냈다. 초기에는 공산주의 사상에 호의를 느껴 1945년 10월 평양의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소련군정과 김일성 일당의 행태에 좌절하여 1947년 월남하였다.[6][7]

월남 후 1948년에는 북한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총격을 당해 중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6.25 전쟁 중이던 1952년에는 "소군정하(蘇軍政下)의 북한(北韓) : 하나의 증언(證言)"을 펴내 자신이 평양에서 겪은 소련군정의 실상과 김일성이 가짜임을 주장하는 증언을 담았다.[6][7] 그는 이 책에서 보천보 사건 직후 간삼봉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과 교전한 김인욱(金仁旭, 1892- ?)이 아닌, 김석원을 언급하는 김일성을 보고 진실성을 의심하게 되었다고 밝혔다.[8] 당시 신문 기사와[9] 여러 연구에서도[10] 간삼봉 전투에서 일본군을 지휘한 인물은 김석원이 아닌 김인욱 소좌였음이 확인된다.

그의 아버지 오윤선은 6.25 전쟁 중 조만식 등과 함께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작품으로는 《배뱅이굿》, 《맹진사댁 경사》, 《시집 가는 날》 등이 있으며, 한국적인 해학을 담은 향토적인 소재의 작품을 주로 썼다. 《맹진사댁 경사》는 대한민국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상)에 실려 있다.

1969년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3. 작품 목록

4. 같이 보기

참조

[1] 뉴스 조선인본위 금융기관요구 상업계 오윤선씨담, 언론기관과 중심단체필요 사회측 조만식씨 담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6-06-03
[2] 간행물 믿음의 선진, 삼형제이야기 오윤선•오형선•오원선 장로 (1) - 오윤선 장로<1871-1950(?)> http://www.jangro.kr[...] 한국장로신문 2018-08-11
[3] 블로그 산정현 교회 오윤선 장로 https://blog.naver.c[...]
[4] 논문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와 조만식 http://www.dbpia.co.[...] 한국기독교와 역사 2014-09
[5] 웹사이트 북한연표 해설 http://db.history.go[...]
[6] 서적 蘇軍政下의 北韓 : 하나의 證言 https://www.nl.go.kr[...] 국민사상지도원 1952
[7] 서적 하나의 證言: 作家의 手記 https://www.nl.go.kr[...] 中央文化社 1952
[8] 서적 蘇軍政下의 北韓 - 하나의 證言 - 중앙문화사 1952-06-10
[9] 뉴스 王公族附武官 李王垠 附屬步兵 少佐 金仁旭 補 步兵第七十四聯隊附 (咸興), 金仁旭少佐 驍勇은 聯隊의 誇이다 : 新乫坡對岸의 討匪壯烈戰과 咸興聯隊當局者談, 今日 卒業한 日本士官學校 第27期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매일신보 1935-08-02, 1937-07-03, 1915-06-18
[10] 서적 金日成列傳 신문화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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