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가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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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일성 가짜설은 김일성이 항일 무장 투쟁 영웅 김일성의 이름을 도용한 가짜라는 주장으로, 주로 이명영의 연구에 기반한다. 이 주장은 대한민국 반공 교육을 통해 널리 퍼졌으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수립 이후 만주 지역 조사 및 관련자 증언 등을 통해 근거가 부족하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이명영은 당시 언론 보도의 한계, 주관적인 자료 해석, '진짜 김일성'의 실증적 활동 기록 부재 등의 맹점을 보이며, 김일성 가짜설은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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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가짜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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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가짜설 | |
내용 요약 | 김일성의 항일운동 경력을 사칭한 가짜가 있다는 주장이다. |
역사적 배경 | |
1945년 이전 | 1920년대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여러 명의 항일 무장 투쟁 지도자들이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주장이 있다. 특히 보천보 전투를 지휘한 김일성과 소련군 정치장교로 활동한 김일성이 동일 인물인지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
1945년 이후 | 미국 군정 시기에 이미 김일성이 가짜라는 판단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김일성 가짜설'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
가짜설 주장 | |
주요 내용 | 현재의 김일성은 항일 무장 투쟁을 했던 김일성이 아니라, 소련에서 훈련받고 귀국한 다른 인물이라는 주장이다. 원래 김일성은 오성륜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으며, 보천보 전투 이후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가짜 김일성은 북한 정권 수립 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항일 투쟁 경력을 가로챘다는 주장이다. |
근거 | 김일성의 외모, 말투, 과거 행적 등이 기존에 알려진 항일 투쟁가 김일성과 다르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만주 지역에서 활동했던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증언이 '김일성 가짜설'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했다. |
반론 | |
주요 내용 | '김일성 가짜설'은 대한민국의 반공 이데올로기 пропаганда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허구라는 주장이다. 김일성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만주 지역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인 인물과 동일 인물이며, 보천보 전투를 지휘한 영웅이라는 주장이다. |
근거 | 북한 측에서는 김일성의 항일 투쟁 관련 자료와 증언을 제시하며 '김일성 가짜설'을 반박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김일성 가짜설'이 근거가 희박하며,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주장이라고 비판한다. |
논쟁의 영향 | |
남북 관계 | '김일성 가짜설'은 남북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대한민국 내에서 북한에 대한 불신감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
역사 인식 | '김일성 가짜설'은 한국 현대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낳았으며, 역사 연구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
2. 김일성 가짜설 논란
'김일성 가짜설'은 김일성이 항일 무장 투쟁의 영웅으로 알려진 김일성의 이름을 도용한 가짜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주로 이명영의 연구에 기반하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근거가 부족한 것으로 평가된다.
과거 대한민국에서는 반공교육을 통해 김일성과 김성주가 별개 인물이라는 설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여러 정황과 증거로 볼 때 김성주와 김일성은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냉전 시대 남북 간 체제 경쟁에서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 경력을 폄하하려는 의도로 이 가짜설이 유포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1998년 여야 정권교체 이후 이러한 주장이 더욱 활발해졌다. 하지만 해방 정국 당시 역사 기록을 보면, 남한 정부 수립 이전에도 이미 다수가 '가짜 김일성설'을 인식하고 있었다.[6]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수립 이후 만주 지역 조사와 타도제국주의동맹에서 활동했던 김일성의 동료들의 증언 등을 통해, 김일성이 가짜 독립운동가라는 주장은 사실상 근거가 없는 낭설이라는 평가가 우세해졌다.[6]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주장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대중 앞에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나타났을 때 처음 나왔다. 청중들은 김일성보다 연상이었는데, 어디서 무엇을 하던 누구인지 모르는 33세의 젊은 사람이 자신들이 어릴 때부터 익히 명성을 들어왔던 김일성 장군이라고 하니 나이가 맞지 않아 가짜라고 생각했다.[7] 청중들은 그가 무슨 항일투쟁을 했는지, 이름은 무엇을 썼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그가 청중들이 일찍부터 이름을 들어 알고 있던 그 김일성 장군이 맞느냐가 문제의 본질이었다.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1937년 보천보 사건 때부터라고 주장하며 북한 김일성이 그 사건의 당사자가 맞으므로 진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해방 당시 보천보 사건 자체나, 그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전사했다는 언론 보도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43] 물론, 이 보도 하나로 만주국군 토벌대가 실제로 김일성을 사살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당시 만주국 치안대는 항일 격전지에서 공비의 수괴가 토벌됐다고 선전하는 식의 공작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8]
동아일보는 1998년 10월 26일 김일성이 일제와 맞서 싸웠다는 '보천보 전투 금 인쇄 원판'을 김정일에게 선물로 주었다.[9] 보천보 전투는 1937년 김일성이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일본군과 싸운 것으로, 북측에서는 "조국 땅에서 울린 첫 총성"이라며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당시 동아일보는 보천보 전투를 다룬 호외를 2번이나 발행하면서 김일성이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일제 탄압이 극심하던 당시 만주에 근거지를 둔 빨치산 부대의 첫 국내 진공작전이었으니 조선민들의 마음에 크게 다가왔고 일제에 충격을 준 화제가 된 전투였던 것이다.
반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1919년 3.1운동 무렵에도 퍼져 있었다는 증언이 있고, 적어도 1920년대 초에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10] 평양의 집회에 모였던 사람들이 눈앞의 김성주가 보천보 사건의 주역 김일성이 아니라고 가짜라고 한 것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익히 이름을 들어왔던 반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았기 때문에 가짜라고 한 것이다.
북한 김일성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친 가짜라는 것은 해방 직후부터 평양에 김일성이 등장하기 전 2개월간 김일성 이름이 나오는 기록들에서 밝혀진다. 해방 이튿날인 8월 16일부터 서울과 전국 도처에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이 수립되며, 대통령 이승만, 총리대신 김구, 육군대신 김일성(金日成), 외무대신 여운형, 기타 미정" 등의 내용이 담긴 출처 불명의 벽보와 전단(삐라)이 나돌았다.[11][12][13][14] 9월 6일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 전국인민위원 55명 명단에도 이승만, 김구와 함께 김일성도 들어 있다.[15]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에 발표된 대통령과 각료 적임자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군무부장 적임자로 김일성이 최다득표(309표 32%)를 하기도 했다.[16]
그러나, 이것은 북한의 김일성이 가짜라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여기서 나오는 김일성은 당시 소련군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 대위였던 북한 김일성일 수 있고, 동시에 김일성 가짜설이 사실이라는 전제를 할 때는, 소련 육군 대위인 그 김일성과는 다른 김일성일 확률도 존재한다. 전자의 경우가 타당성을 갖는 이유는, 김일성 가짜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선 김일성이 소련 국경으로 피신하기 전에 행했던 항일 활동이 사실이고, 그의 업적이 이미 국내에 알려진 상태였다면, 북한의 김일성과 동진공화국 선전물에서 나오는 김일성이 충분히 동일 인물일 확률이 존재한다.[28]
민중일보는 1945년 10월 14일자에 해외의 독립운동 지사를 소개하는 연재기사에 이승만, 김구에 이어 5번째로 김일성을 소개하면서, 을지문덕, 이순신에 비견되는 유명한 장군이며, 일본군 장교 교육과정(일본 육사)을 이수했으나 독립운동에 나섰고, 그 부하가 압록강 일대를 순시하던 조선 총독을 저격한 일도 있다고 하였다.[17] 이 날은 공교롭게도 평양에 온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 자칭하며 대중 앞에 처음 나선 날이지만, 서울의 신문은 전혀 다른 김일성 장군에 대한 기사를 싣고 있다.
실제로 압록강 일대를 순시하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18]을 저격한 사건이 1924년 5월 19일에 있었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이 한 일로 밝혀지지만[19], 이명영의 저서에선 이 사건이 항간에는 김일성 장군이 한 일로 소문이 나돌았다고 전한다.[20] 당시는 1921년의 갑산군 함정포(含井浦) 사건[21] 등 국경 근처에서 일어나는 어지간한 사건은 으례 김일성 장군의 소행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20] 이 기사는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1937년 보천보 사건 때부터가 아니라 1920년대 초에도 이미 유명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평양에 온 33세의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했을 때 사람들이 나이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알아보고 가짜라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임시정부 선전부 비서 안우생(1907~1991)도 1945년 12월 5일의 기자회견에서 김일성씨는 상당한 고령이며, 평양에 와 있는 33세의 청년 김일성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고 하였다.[22]
김일성 가짜설을 비판한 학자로는 서대숙이 유명하다. 그는 해방 당시 국내에서 김일성이란 이름이 유명했다는 것은 인정하나, 그런 유명한 인물은 실존하지 않고, 북한 김일성이 만주서 실제로 김일성이란 이름으로 항일 투쟁을 한 사람이 맞으므로 가짜가 될 수 없다고 했다.[96]
북한에서 김일성 우상화의 방편으로 항일 업적을 부풀린 『세기와 더불어』에서도 1920년대에 활동했던 '김일성'과 우상화의 주체인 북한의 김일성과 연관을 짓지 않는다. 더불어, 본명인 김성주라는 것을 밝히고 있으며, 실제로 다른 가명을 썼다는 내용도 나와 있다. 따라서, 그를 우상화하기 위해 저작된 선전물에도 북한 김일성은 애초에 1920년대의 김일성과 자신을 연관 짓지 않는다.[97]
2. 1. 김일성 가짜설의 등장 배경
김일성 가짜설은 해방 직후 김일성이 평양 군중대회에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대중은 33세의 젊은 김성주가 전설적인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의심했다.[17] 예를 들어 1945년 10월 14일 민중일보는 김일성 장군을 을지문덕, 이순신에 비견되는 유명한 장군이며,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다고 보도했다.[17] 이 날은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으로 처음 대중 앞에 나타난 날이지만, 서울의 신문은 전혀 다른 인물을 보도하고 있었다.1920년대 초, 국경 근처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으레 김일성 장군의 소행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20] 1924년 5월 19일에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18]을 저격한 사건이 있었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이 한 일로 밝혀졌지만, 항간에는 김일성 장군이 한 일로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20] 이러한 배경 때문에 평양에 온 33세의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했을 때 사람들이 나이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알아보고 가짜라고 의심하게 되었다.
해방 이튿날인 1945년 8월 16일부터 서울과 전국 도처에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이 수립되며, 대통령 이승만, 총리대신 김구, 육군대신 김일성(金日成), 외무대신 여운형, 기타 미정" 등의 내용이 담긴 출처 불명의 벽보와 전단(삐라)이 나돌았다.[11][12][13][14] 1945년 9월 6일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 전국인민위원 55명 명단에도 이승만, 김구와 함께 김일성도 포함되었다.[15]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임시정부 선전부 비서 안우생(1907~1991)도 1945년 12월 5일 기자회견에서 김일성 씨는 상당한 고령이며, 평양에 와 있는 33세의 청년 김일성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고 하였다.[22]
남한에서는 반공 교육의 일환으로 김일성 가짜설이 널리 퍼졌으며, 이는 남북 간 체제 경쟁 속에서 김일성의 항일 투쟁 경력을 폄하하려는 의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2. 2. 이명영의 주장과 그 맹점
이명영은 김일성 가짜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나, 그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맹점을 안고 있다.# 교차 검증이 불가능한 당시 언론 보도에만 의존하여 사태를 파악하였다. 당시 언론은 일본 제국의 통제하에 있었고, 만주 항일 운동 관련 기사에는 허위 정보가 많았다.
# 자료 해석에 주관적인 해석이 많으며, 모순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무리한 추정을 시도하였다.
# 이명영이 '진짜 김일성'이라고 지목한 인물들의 실증적 활동 기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즉, 구체적인 추가 증거가 부족하다.
이명영은 '진짜 김일성'으로 일본 육사 출신의 김광서(김경천)를 유력한 후보로 지목했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증거는 부족하다.[6]
2. 3. 김일성 가짜설에 대한 반론
김일성 김성주 별개 인물설은 과거 대한민국에서 반공교육을 통해 거의 확실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여러 정황과 증거로 김성주와 김일성은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하지만 냉전 시대 남북간의 체제 경쟁에서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 경력을 부담스러워한 우익세력이 김일성의 경력을 깎아내리려고 유포시켰다는 주장이 있었고, 이는 1998년 남한 최초로 이루어진 여·야 정권교체 후부터 더욱 활발히 이루어졌다. 해방 정국 당시의 역사 기록을 보면, 남한 정부 수립 이전에도 이미 다수가 '가짜 김일성설'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쉽게 증명된다.[6]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 수립 이후 만주 지역 조사와 타도제국주의동맹에서 활동했던 김일성의 동료들의 증언 등 여러 가지 평가를 미루어 볼 때, 김일성이 가짜 독립운동가라는 주장은 사실상 근거가 없는 낭설이라고 평가하는 의견이 우세해졌다.[6]
‘김일성 가짜설’을 주장한 이명영 교수의 연구 내용에 기반하고 있는 내용은 학계 다수의 입장과 상반된 것이며, 이명영 교수의 맹점은 다음과 같다.
# 교차 검증이 불가능한 언론 보도를 중심으로만 사태를 파악하고 있다. 당시 일본 제국이 파악하고 있던 항일 유격대원은 극히 소수였으며, 정보가 부정확한 경우도 상당히 존재하였다. 또한, 당시 언론 보도는 일본 제국의 통제하에 있었으며, 특히, 만주 항일 운동에 관한 기사문에는 허위 정보가 상당했다. 따라서, 교차 검증이 힘든 당시 언론에만 당위성을 두고 서술한다는 점에서 이명영의 주장은 학계에서 인정되지 않고 있다.
# 자료 해석에서 주관적 해석이 상당 부분 존재한다. 어떠한 다수의 역사적 사실을 연결할 때, 충분히 모순 관계의 고려 없이 무리한 추정을 시도하였다.
# 이명영이 ‘진짜 김일성’이라고 지목한 수많은 인물에 대한 실증적 활동 기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명영이 김일성이라고 지목한 여러 인물이 어떠한 활동을 했으며, 실제 구체적 정보가 어떤지에 대한 추가적인 근거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보천보 사건을 일으킨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만주국군 제7단과의 전투에서 사살되었다는 것은 엄청나게 많은 당시 기록과[40][41][42] 신문 기사로[43] 확인할 수 있고, 신원도 당시 나이 36세 가량이며, 함경남도 태생으로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나왔다고 하는 등 북한 김일성과 전혀 다르다.
그러나, 당시 대다수 항일 운동가의 신원은 일본 정부에서 파악하기 매우 힘들었으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가짜 사망설이 상당히 많았다는 점에서 해당 보도가 김일성 사망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또한, 일부 인물의 증언, 특히 일본군 관계자의 증언의 신빙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학계에서 인정되지 않는다.
북한 김일성이 6사장 김일성이 전사한 후부터 같은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는 소련군 88여단 출신자들의 후일 증언도 다수 있다.
- 88여단 시절 김일성 대대의 통역관이었던 소련의 고려인 출신 유성철(兪成哲, 1917-1995)은 6.25 때 인민군 작전국장을 지냈는데,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은 전사하고, 그후부터 김성주가 김일성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50][51]
- 소련의 고려인으로 88여단 1대대장 김일성 아래 부대대장이었던 박성훈은 북한으로 오지 않고 소련군에 남았는데, 진지첸(북한 김일성)은 1939년 가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만주 빨치산 영웅 김일성의 이름을 자기 것으로 했다고 증언하였다. (1937년 가을에 전사한 보천보 김일성을 말하는 것이다.) 소련의 고려인으로 해방 후 북한에서 내무성 부상까지 지내다 1959년 소련으로 망명한 강상호(姜尙昊, 1910~2000)도 같은 증언을 하였다.[52]
- 평양 소련군정 당시 중좌로 김일성의 정치 상담역을 했던 그리고리 메클레르(Grigory Mekler, 1909~2006)는 1944년 88여단을 방문하여 여러 조선인들을 만났는데. 김일성의 이름은 전사한 존경받던 전임 게릴라 지도자의 이름에서 빌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53]
- 만선일보 1940년 4월 18일자는 북한 김일성이 만주사변(1931년) 때 죽은 유명한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이름을 습명(襲名)하였다고 하였다.[26] 1931년에는 빨치산의 활동도 없었고, 유명한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도 보이지 않으므로 1937년에 전사한 보천보 김일성의 이름을 습명한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김성주를 죽은 유명한 비수 김일성으로 잘못 아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였다.
또한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거나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관련자들의 증언도 다수 있다.
- 박갑동(朴甲東, 1919~ )은 박달(朴達, 1910~1960)과 박금철(朴金喆, 1912~1967 ?)에게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의 사진을 찍어다 보여 주었더니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이 아니라 했다고 증언하였다.[54]
- 해방 직후 여운형의 비서였던 이기건(李奇建, 1919년 ~ ?)은 김일성에게 여운형의 밀서를 전하러 평양으로 가던 길에 우연히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으로 가던 박금철과 동행하게 되어 박금철이 김일성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목도하는데, 서로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아서 둘 중 한 사람은 가짜로 보였다고 하였다.[55]
- 이진구(李鎭九, 1898~?) 목사(牧師)는 1941년 7월 함흥형무소에서 박달(朴達, 1910~1960)과 같은 감방에 있었는데, 그때 박달이 자기 나이는 31세, 김일성의 나이는 10년 위인 41세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김일성은 1901년생 쯤으로 전사 당시 신문에 보도된 나이와 거의 같다.[56]
- 해방 직후 만주 통화성(通化省) 일대의 한인(韓人) 사이에서 전사한 김일성(金日成)의 추도비(追悼碑)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고 당시 모금에 참여했던 이창훈(李昌勳)이 증언하였다. 보천보 김일성이 통화성 무송현(撫松縣) 양목정자(楊木頂子)에서 전사했다.[57]
매일신보를 비롯해서, 한반도 내의 여러 언론에선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 보도가 확실한 사실인지는 아직 확인을 하기 어렵다. 또한, 이러한 보도가 여러 차례 확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6사장 김일성과 북한 김일성이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1939년 9월 1일자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의 함경남도 국경지대 사상정화공작 개황(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에는 6사장 김일성의 신원에 대해 나오는데,[60] 이는 북한 김일성의 신원과 동일하다.
- 1944년 11월 18일 일본제국의회(귀족원)에서의 질의응답을 기록한 문건 "朝鮮人ノ現在ノ動向ニ就テ"에 김일성(金日成)의 본명은 金成桂(주:金成柱의 誤記인듯), 나이 33세,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출생이며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6사장으로 1937년 혜산사건 당시 조선으로 침입했다고 하였다.[61]
- 1941년 8월 28일자 함흥지법의 혜산사건 판결서 (惠山事件 判決書)에 6사장의 이름이 김성주(金成柱)로 나오는데,[62], 이는 북한 김일성의 본명이다.
전사한 6사장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金成柱)라는 것이 이치하라 간이치(市原感一, 1896~?)의 증언에도 나온다.[46] 이명영은 『김일성 열전(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에서 북한 김일성의 본명은 원래 김성주(金聖柱)였으나 본명도 보천보 김일성을 따라 김성주(金成柱)로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북한 김일성의 본명이 金成柱/金聖柱 어느 쪽인지도 논란이 되나[63] 일제시대 기록들에는 두 가지가 다 나오므로 판별하기가 쉽지 않다.
김일성 가짜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1939년 9월 사상휘보의 기록은 6사장 김일성에 대한 수사나 재판 기록도 아니고, 필자도 미상인 단순한 보고서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단순 보고서로 치부한다면, 애초에 단순 보고서의 수준도 되지 못 하는 여러 언론의 보도 또한 신뢰하기가 힘들어진다. 따라서 김일성 가짜설은 일관된 근거와 논리를 갖고 주장하기엔 터무니가 없기에 학계에서 지배적인 설로 자리잡기 어려웠다.[67]
이 외에 아래와 같은 사유들도 북한 김일성이 6사장이 맞다는 증거라고 한다.
- 1로군 부사령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이 1940년 4월에 쓴 보고서에 전사한 간부들 명단이 나오지만 6사장 김일성이 전사했다는 말은 없으므로 그는 죽지 않았다.
- 북한 김일성이 1942년에 지은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抗聯 第一路軍 略史)"에 그가 6사장이었다고 나온다.
- 이상조 (李相朝, 1916~1996) 전 소련주재 북한대사는 1989년 내한 당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을 지휘한 당사자가 맞다고 증언하였다.[68]
- 허진(許眞, 1928~1997)도 저서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에서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을 주도한 것이 맞다고 말한다.[69]
위 두사람은 88여단 출신자들과는 달리 해방 후에 김일성이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된 이후에 처음 알게 된 사람들이다. 유성철의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은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항할 때 빨치산 동료들에게 자신의 전력에 대한 함구령을 내렸다고 하였다.[50] 이들은 아무도 공개적으로 김일성의 전력을 함부로 거론할 수 없게 된 후 정확한 정보를 접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金英柱, 1920~ )의 친구인 이용상은 김영주가 자기 형이 보천보 사건의 주역이 맞다고 했으므로 자신은 그 말을 믿는다고 했다.[70]
그러나 김영주도 형이 자신이 보천보 사건을 주도했다고 했다면 그대로 믿었을 것이므로 이런 증언이 중요한 사안에 대한 판단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 김영주가 했다는 이와 상반되는 증언도 있다.[71]
이명영은 제2방면 군장 김일성도 북한 김일성이 아닌 제3의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는데[87], 이점은 상당한 문제가 있다. 하지만 새로 발굴된 많은 문서들에 나오는 1939~1940년간 활동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명영이 최초에 제시한 의문점들이 해명되어야 할 필요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제2방면군장은 북한 김일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 4. 김성주의 개명(改名)
1930년 초 김성주가 활동하던 지역에서 김혁이라는 사람이 “조선의 별”이라는 노래를 지어 보급하곤 했다. 김일성은 이 노래에서 조선의 별이 자신들을 지칭하는 것이기에 엄하게 꾸짖었다고 회고한다. 그럼에도 동지들은 김성주를 “한별이”라고 불렀고, 나중에 “一星”으로, 다시 “日成”으로 고쳐 부르자고 주변 공산주의자들이 결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일성이 공식적으로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첫 기록은 1931년 봄 고유수에서 군벌에게 체포되어 20일가량 옥살이를 하면서부터라고 한다.[6]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불리게 된 것은 김성주의 결정이 아니라, 주위에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2. 5. 김일성 장군 설화 이용설
일제강점기 한반도 북부 지역에는 "김일성 장군이 나타나 일본군을 물리치고 해방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민간 설화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설화는 당시 어려운 현실 속에서 희망을 찾고자 했던 민중들의 바람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이러한 배경 속에서, 김성주가 이 설화를 이용하여 자신을 '김일성'이라고 칭하고 추종자들을 모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즉, 김성주가 민간에 퍼져 있던 '김일성 장군'에 대한 기대를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현재 학계에서 큰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학자들은 만주 지역 조사와 타도제국주의동맹에서 활동했던 김일성의 동료들의 증언 등을 근거로, 김성주가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그가 가짜 독립운동가라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다고 평가하고 있다.[6]
결론적으로,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 설화를 이용했다는 주장은 당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설득력을 얻었을 수 있지만, 현재는 여러 증거와 연구를 통해 그 근거가 희박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2. 6. 소비에트 연방 군정의 증언
소련군정 정치 사령관이었던 레베데프(Nikolai Lebedev, 1901~1992) 소장은 1991년에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의 항일 투쟁 경력을 부각시키고,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의 이미지를 활용했다고 증언했다.[23] 그는 당시 무명의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우기 위해 이러한 전략을 사용했다고 밝혔다.[23]박길용의 《김일성 외교비사》에 따르면, 당시 소련군정은 조선인들이 유명한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의 귀국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사실상 무명인사였던 김성주를 북한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를 항일영웅으로 부각시키는 방편으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사칭하는 방안을 생각해 내었고,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던 스티코프도 이 아이디어를 칭찬했다고 한다.[23][7]
레베데프 소장의 증언에 따르면, 소련군정은 김일성의 출생, 가족, 학력, 중국공산당 입당 및 활동, 빨치산 운동 등 신상 조사를 했지만, 그가 만주에서 항일 빨치산 운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나 대규모로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또한, 진짜 항일 빨치산 운동에 공을 세운 또 다른 '김일성 장군'이 있다는 소문이 조선 인민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고, 조선 인민들은 해방된 조국에 그 장군이 개선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23]
소련군정은 김일성을 '전설의 영웅'으로 불리던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북조선의 '위대한 수령'의 계단에 오르게 했다.[23] 그러나 레베데프 소장은 김일성이 평양으로 오기 전에 풍문으로 떠돌던 그 김일성이 아니라고 확신하지는 않았다.
당시 KGB 장교로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공작에 간여했던 레오니트 바신(Leonid Vassin, 1915~?)도 김일성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증언했다.[24][25]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곧 북한 김일성이 항일게릴라를 사칭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소련군정은 대중에게 보인 북한 김일성이 실제로 항일게릴라 활동을 한 김일성이라는 것을 각인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3. 서대숙의 평가
서대숙은 김일성 가짜설을 비판한 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해방 당시 국내에서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유명했던 것은 사실이나, 이는 전설적인 인물에 대한 기대였을 뿐, 실제로는 북한의 김일성이 만주에서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항일 투쟁을 한 사람이 맞다고 주장했다.[96] 그는 "김일성이란 이름은 유명했다. 김일성이 공식 석상에 나타난 모습을 보고 모두 “가짜다” 라고 했다. 가짜가 될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유명한 그 김일성. 전설에 나오는 그런 김일성은 없다. 우리가 독립운동에 대해서 많이 연구를 했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란 전설적인 사람은 없다."라고 하였다.[96]
4. 결론
김일성 김성주 별개 인물설은 과거 대한민국에서 반공교육을 통해 거의 확실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여러 정황과 증거를 볼 때 김성주와 김일성은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하지만 냉전 시대 남북 간의 체제 경쟁에서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 경력을 부담스러워한 우익 세력이 김일성의 경력을 깎아내리려고 유포시켰다는 주장이 있었고, 이는 1998년 대한민국 최초로 이루어진 여·야 정권교체 후부터 더욱 활발히 이루어졌다. 해방 정국 당시의 역사 기록을 보면, 남한 정부 수립 이전에도 이미 다수가 '''가짜 김일성설'''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쉽게 증명된다.
그러나 북조선의 김성주가 김일성이란 이름으로 활동하였다는 점에 대해서 남북 학자들은,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 수립 이후 만주 지역 조사와 타도제국주의동맹에서 활동했던 김일성의 동료들의 증언 등, 여러 가지 평가를 미루어 볼 때, 김일성이 가짜 독립운동가라는 주장은 사실상 근거가 없는 낭설이라고 평가하는 의견이 우세해졌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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