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보 하루노
1. 개요
오쿠보 하루노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육군 대장까지 진급했으며, 한국주둔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는 오다와라 번의 다이묘였던 오쿠보 씨의 후손으로, 메이지 유신 당시 보신 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장, 육군 도야마학교장을 거쳐 청일 전쟁, 러일 전쟁에 참전했으며, 1907년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10년 한국 병합 이후 조선주둔군 사령관을 지냈으며, 1915년 사망하여 종이위에 추서되었다.
-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수훈자 -
쇼와 천황
쇼와 천황은 메이지 천황의 손자로 태어나 124대 일본 천황으로 즉위하여 사망할 때까지 재위하며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 침략 전쟁에 관여했다는 논란이 있으며, 전후에는 상징적인 천황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고 그의 전쟁 책임 문제는 논쟁의 대상이다. -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수훈자 -
아키히토
아키히토는 1933년 쇼와 천황의 장남으로 태어나 1989년 일본 천황으로 즉위하여 2019년 퇴위하고 상황이 되었으며, 어류학자로 활동하며 아시아 국가에 대한 사죄와 국민과의 소통에 힘썼다. -
훈3등 욱일중수장 수훈자 -
더럼 스티븐스
더럼 스티븐스는 미국의 외교관으로, 주일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여 일본 외무성에서 일했으며, 대한제국 외부 고문으로 친일 행보를 보이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재미 한인에게 피격되어 사망, 한국 역사에서 비판받는 인물이다. -
훈3등 욱일중수장 수훈자 -
데라우치 마사타케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까지 활동한 일본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육군대신, 한국통감, 조선총독,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한국 병합을 주도하고 무단통치를 실시했으며, 시베리아 출병 등 외교 정책을 펼친 일본 제국주의 핵심 인물이다. -
일본의 러일 전쟁 참전 군인 -
고다마 겐타로
고다마 겐타로는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만주군 총참모장으로 러일 전쟁 승리에 기여하고 대만 총독으로서 식민 통치를 펼치며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관여하는 등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모두 남겼다. -
일본의 러일 전쟁 참전 군인 -
하세가와 요시미치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육군 대장, 조선 주둔군 사령관, 참모총장을 역임하고 제2대 조선 총독으로 3·1 운동 시 무단 통치를 시행했으며, 백작 작위를 받고 사망 후 아오야마 묘지에 안장되었다.
2. 생애 및 군 경력
1894년 소장으로 승진하여 제7 보병여단장이 되었고, 청일 전쟁에서 만주 하이청과 풍청 등지에서 전투를 치렀다. 1895년 대만 점령에도 참가했다. 1897년 제1 근위여단장이 되었다.
1900년 중장으로 진급하여 육군훈련감찰부 참모총장이 되었다. 1902년 5월 제6 보병사단장이 되었다. 러일 전쟁 당시 제6 보병사단은 일본 제2군에 배속되었다가 샤허 전투 이후 묵덴 전투 전에 일본 제4군으로 이동했다. 종전 후 욱일장 1등급과 금계훈장 2등급을 받았다. 1906년 7월 제3 사단장으로 전보되었고, 1907년 9월 남작 작위를 받아 화족이 되었다.
1908년 8월 7일 대장으로 승진하여 한국주둔군 사령관이 되었다. 1911년 8월 18일 예비역으로 편입되었으며, 1915년 1월 사망 후 종이위에 추증되었다.
2.1. 초기 생애
오쿠보 하루노는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오다와라 번의 전 다이묘였던 오쿠보씨의 후손으로, 도토미국(현 시즈오카현 이와타시)의 신사에서 세습 신관으로 봉직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메이지 유신기의 보신 전쟁에 참전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오쿠보는 신생 일본 제국 육군을 위해 오사카의 군사 학교에 다녔고, 1870년 10월 추가 훈련을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1875년 7월 귀국 후, 육군성 내 여러 참모직을 역임했다. 1880년 5월 구마모토 진대 보병 제14연대 대대장이 되었고, 1882년 12월 참모본부로 복귀했다. 1886년 3월 보병 제12연대장이 되었고, 1889년 대좌로 승진했다. 1890년 6월 육군 도야마학교 교장이 되었고, 1891년 6월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2.2. 메이지 유신과 군 입대
오쿠보 하루노는 오다와라 번의 번주였던 오쿠보씨의 후손으로, 도토미국(현재의 시즈오카현 이와타시)의 신사에서 세습 신관을 지내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메이지 유신의 보신 전쟁에 사무라이로 참전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오쿠보는 신생 일본 제국 육군을 위해 오사카의 군사 학교에 다녔고, 1870년 10월 추가 훈련을 위해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2.3. 군 경력 초기
오쿠보 하루노는 사무라이 가문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오다와라 번의 전 다이묘였던 오쿠보 씨의 후손으로 도토미국(현 시즈오카현 이와타시)의 신사에서 세습 신관으로 봉직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메이지 유신의 보신 전쟁에서 사무라이로 싸웠다.
메이지 유신 이후, 오쿠보는 신생 일본 제국 육군을 위해 오사카의 군사 학교에 다녔고, 1870년 10월 추가 훈련을 위해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1875년 7월 귀국 후, 육군성 내 여러 참모직을 역임했다. 1880년 5월 구마모토 진대 보병 제14연대 대대장이 되었고, 1882년 12월 제국 육군 참모본부로 복귀했다. 1886년 3월 보병 제12연대장이 되었고, 1889년 대령으로 승진했다. 1890년 6월 육군 도야마학교 교장이 되었고, 1891년 6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1894년 소장으로 승진하여 제7 보병여단장이 되었고, 이 여단은 청일 전쟁에서, 특히 만주 하이청과 풍청에서 광범위한 전투를 치렀다. 1895년 대만 점령에도 참가했다. 1897년 12월 오쿠보는 제1 근위여단장이 되었다.
2.4. 청일 전쟁 참전
1894년 육군 소장으로 승진하여 보병 제7여단장을 겸임하며 청일 전쟁에 참전하였다. 해성 및 봉황성 방면 수비대 사령관을 역임하였고, 1895년 대만 점령에도 참가했다.
2.5. 러일 전쟁과 승진
1900년, 오쿠보는 중장으로 승진하여 육군훈련감찰부 참모총장이 되었다. 1902년 5월 제6 보병사단장이 되었다. 러일 전쟁 중, 제6 보병사단은 일본 제2군에 배속되었지만, 샤허 전투 이후 묵덴 전투 전에 일본 제4군으로 이동했다. 전쟁 후 그는 욱일장 1등급과 금계훈장 2등급을 수여받았다. 1906년 7월 제3 사단장으로 전보되었고, 1907년 9월 남작 작위를 받아 화족이 되었다.
2.6. 조선군 사령관 역임
1908년 8월 7일, 오쿠보 하루노는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고 같은 해 12월부터 한국주둔군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10년 한국 병합에 따라 한국주둔군이 조선주둔군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오쿠보 하루노는 조선주둔군 사령관이 되었다.
2.7. 사망
1915년 1월 26일에 사망했으며, 사후 특지에 의해 종이위에 추서되었다. 묘소는 아오야마 묘원(1이 1-22)이다.
3.1. 일본
| 연도 | 내용 |
|---|---|
| 1887년(메이지 20년) 5월 27일 | 훈사등 욱일장(旭日章) 소수장(勲四等旭日小綬章) |
| 1895년(메이지 28년) | 5월 23일 - 훈삼등 수보장(瑞宝章)(勲三等瑞宝章) |
| 1905년(메이지 38년) 11월 30일 | 훈일등 수보장(瑞宝章)(勲一等瑞宝章) |
| 1906년(메이지 39년) 4월 1일 | 금궤훈장(金鵄勲章) 공이급(功二級金鵄勲章), 훈일등 욱일장(旭日章) 대수장(勲一等旭日大綬章), 메이지 37, 38년 종군기장(明治三十七八年従軍記章) |
| 1907년(메이지 40년) 9월 21일 | 남작(男爵) |
| 1912년(다이쇼 원년) 8월 1일 | 한국병합기념장(韓国併合記念章) |
| 1915년(다이쇼 4년) | 1월 26일 - 훈일등 욱일동화대수장(勲一等旭日桐花大綬章) |
| 연도 | 외국 훈장 등 수여 허가 |
|---|---|
| 1910년(메이지 43년) | 4월 26일 - 대한제국: 한국황제폐하 남서순행기념장(韓国皇帝陛下南西巡幸記念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