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직 (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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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직은 명나라 시대의 인물로, 초기에는 소금 상인으로 시작했으나 밀무역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그는 해금 정책 속에서 동남아시아와 일본을 오가며 무역을 했고, 일본의 다네가시마에 포르투갈인들을 데려와 조총의 보급에 기여했다. 이후 왜구와 결탁하여 해상 세력을 키웠으며, 명나라 정부와의 갈등 끝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왕직은 상인, 해적, 매국노 등 상반된 평가를 받으며, 중국과 일본에서 서로 다른 시각으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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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직 (명나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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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원어 이름_언어 | zh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1560년 1월 22일 |
사망 원인 | 참수 |
별칭 | 오봉선주(五峰船主) |
출생지 | 명나라 남직례 휘주 흡현 자림 |
사망지 | 절강승선포정사사 항주부 관항구 |
활동 시기 | 16세기 |
활동 근거지 | 동중국해, 일본 히라도 |
직책 | 무장해상집단 수령, 휘왕(徽王) |
가족 | 모친 왕씨(汪氏) 양아들 왕오(王滶, 일명 모해봉毛海峰) |
로마자 표기 | Wang Zhi |
간체자 | 王直 |
병음 | Wáng Zhí |
웨이드-자일스 | Wang Chih |
민난어 | Ông Ti̍t |
월어 | Wong Zik |
일본어 | 王直 |
일본어 로마자 | Ōchoku |
2. 생애
왕직은 안후이성 후이저우 (현재의 황산시) She 현 출신으로, 초기에는 소금 상인으로 일했다.[1] 그러나 사업에 실패한 후, 1540년에 서유학(徐惟學), 엽종만(葉宗滿)과 함께 광둥성으로 가서 해상 무역에 뛰어들었다.[3] 당시 명나라는 해금 정책으로 사적인 해상 무역을 금지했지만,[6] 왕직은 이를 어기고 초석, 비단, 면 등 금지 품목을 정크선에 싣고 동남아시아와 일본으로 밀무역을 했다.[4]
쌍서항(雙嶼港)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허동(許棟) 집단에 합류하여 밀무역을 하던 왕직은,[13] 포르투갈 상인들과도 교류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이후 허동이 명나라 군대에 의해 토벌되자, 왕직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일본 규슈(九州) 히라도섬(平戶島)을 근거지로 삼아 해상 무역을 계속했다.[14] 1552년, 왕직은 히라도에서 "송(宋)"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휘왕(徽王)'이라 칭하며 세력을 과시했다.[15]
왕직은 왜구와 결탁하여 명나라 연안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무역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상인이었다. 1540년에 일본 고토 열도에 와서 마쓰우라 다카노부의 초청을 받아 1542년에 히라도로 옮겼고, 지방 관헌이나 향신 등과 연계하여 밀무역을 확대했다.
명나라 하천과 연안 지역에 정통했던 왕직은 왜구의 대표적인 우두머리가 되어, 1553년 5월에 37척을 이끌고 태창, 강음, 차푸 등을 침략하고, 같은 해 8월에 진산위, 숭명에 침입했다.
호종헌(胡宗憲)이 장주(蔣洲)와 진가원(陳可願)을 일본에 파견하여 왕직과 교섭을 시도했고, 왕직은 통상과 호시(互市)를 승낙하고 명령에 따르고자 하는 의사를 표하였다.[16] 그러나 1558년, 왕직은 항주(杭州)에서 체포되었고,[16] 조정의 압력으로 인해 1560년 1월 22일, 항주 절강성 관청의 관항구(官巷口)에서 참수되었다.[20] 왕직이 처형된 후 수장이 없어지면서 왜구는 더욱 심해졌다.[21]
2. 1. 초기 생애와 소금 상인 시절
왕직은 안후이성 후이저우 (현재의 황산시) She 현 출신이다. 그의 어머니 성은 왕(汪)씨였고, 아버지 성은 왕(王)씨였다. 부모의 성이 비슷하여, 일부 자료에서는 왕직을 어머니 성을 따서 汪直(왕직)으로 표기하기도 한다.[1] 왕직은 생애 초기에 소금 상인이 되었는데, 이는 명나라 정부의 소금 독점에 힘입어 부활한 후이저우의 상업 전통을 따른 것이다.[2] 그러나 소금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음에도 사업이 실패하여, 1540년에는 사업 동료인 서유학(徐惟學)과 엽종만(葉宗滿)과 함께 광둥성으로 가서 행운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3]광둥성의 해상 무역에 대한 규제가 느슨했기 때문에, 왕직과 그의 동료들은 내구성이 강한 대형 정크선을 건조할 수 있었고, 이를 이용하여 초석, 비단, 면과 같은 금지 품목을 동남아시아와 일본 시장으로 운송했다.[4]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하는 동안 그는 1511년에 말라카를 점령한 이래 그 지역에 있었던 포르투갈인들과 친분을 맺었다.[5]
당시 왕직의 외국인과의 거래는 모든 사적 해상 무역이 명나라 초부터 금지되었기 때문에 불법이었다. 금지령에 따라 모든 해상 무역은 공식적으로 승인된 "조공 무역"을 통해 이루어져야 했는데, 이는 외국 국가가 중국 궁정에 조공을 바치고, 명나라의 신하임을 인정하며, 황제의 호의 표시로 선물을 받는 방식이었다. 이 무역은 관련된 외국인들에게 굴욕감을 주는 것 외에도, 국내외 시장의 수요를 충족시키기에 부적절했는데, 명나라가 조공을 바칠 수 있는 빈도에 대한 엄격한 규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직의 밀수 무역은 공식적으로 승인된 무역으로는 충족되지 못한 수요에 대한 공급을 제공했다.[6] 휘저우부(徽州府) 서현(歙県)에서 태어났으며,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소금 상업에 종사했으나 실패했고, 명나라가 해금 정책을 시행하자 엽종만 등과 함께 금지 품목을 거래하는 밀무역에 종사했다.
2. 2. 해상 무역과 밀무역
왕직은 젊은 시절 소금 상인으로 일했으나 사업에 실패하였다. 1540년, 서유학(徐惟學), 섭종만(葉宗滿)과 함께 광동(廣東)으로 가 해상 무역을 시작했다.[11] 당시 명나라는 해금 정책으로 사적인 해상 무역을 금지했지만,[13] 왕직은 이를 어기고 초석, 비단, 면 등 금지 품목을 정크선에 싣고 동남아시아와 일본으로 밀무역을 했다.[12]왕직은 쌍서항(雙嶼港)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허동(許棟) 집단에 합류하여 밀무역을 했고, 포르투갈 상인들과도 교류했다.[13] 이후 허동이 명나라 군대에 의해 토벌되자, 왕직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일본 규슈(九州) 히라도섬(平戶島)을 근거지로 삼아 해상 무역을 계속했다.[14]
1552년, 왕직은 히라도에서 "송(宋)"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휘왕(徽王)'이라 칭하며 세력을 과시했다.[15] 그는 왜구와 결탁하여 명나라 연안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무역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상인이었다.
2. 3. 왜구와의 관계
왕직은 소금 상업에 실패한 후, 명나라의 해금 정책에도 불구하고 엽종만(葉宗滿) 등과 밀무역에 뛰어들었다.[11][12] 쌍서(双嶼) (저장성(浙江省) 닝보부(寧波府) 앞바다)를 거점으로 허동(許棟)·이광두(李光頭)의 부하로 활동했다.[13]허동과 이광두가 명군에 토벌되자 왕직은 왜구와 결탁, 히라도섬(平戶島)을 기지로 삼아 세력을 확장했다.[14] 1552년 '송(宋)'을 세우고 '휘왕(徽王)'을 칭하며, 해상 세력을 장악했다.[15] 1553년 유대유(兪大猷)에게 패해 일본으로 도주했고, 명의 해금 강화로 왜구 활동이 활발해졌다. 왜구는 대부분 중국 연안 주민들이었다.
왕직은 명나라와 협력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해적 함대로 중국 해안을 약탈했다.[13] 고토 열도와 히라도에서 휘왕을 칭하며 세력을 키웠고,[15] 일본 세력들과 연계, 해적 함대로 중국을 약탈했다. 이는 '가정 왜구의 난'으로 불리며, 난징까지 위협했다. 명나라는 왕직을 주모자로 체포령을 내렸다.
2. 3. 1. 포르투갈과의 협력 및 일본과의 관계
왕직은 명나라가 해외 무역을 금지하던 시기에 포르투갈 상인들을 끌어들여 쌍서항(雙嶼港)에서 밀무역을 했다.[13] 1543년 9월 23일, 왕직은 포르투갈인들을 태운 배를 타고 일본 다네가시마에 도착했는데, 이는 유럽인들이 일본에 처음 발을 들인 사건 중 하나였다.[1] 일본 기록은 왕직을 오봉(五峯)이라 칭하며, 모래에 한자를 써서 일본인들과 소통할 수 있었던 명나라 유교 학자로 묘사한다.포르투갈인들의 조총은 다네가시마 도키타카의 관심을 끌었고, 왕직은 통역을 맡아 총 작동 방식을 설명했다. 이 총은 빠르게 복제되어 일본 전역에 퍼졌고, 센고쿠 시대의 전쟁을 격화시켰다. 이 총은 일본에서 '다네가시마'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은 초석을 자체 생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직은 일본의 유황을 시암으로 운송하고, 중국과 시암의 초석을 일본으로 가져와 큰 부를 쌓았다.
일본 내전 시기에 왕직은 고토 열도의 우쿠 씨족(宇久氏)과 협상하여 후쿠에 섬에 기지를 세웠고, 히라도에 거주하며 마쓰라 다카노부의 후원을 받았다.
1544년, 왕직은 서씨 형제와 협력하여 일본 배가 닝보 관리들에게 거부당하자, 사절들을 설득하여 인근 쌍어에서 불법적으로 물품을 교환하도록 했다. 이후 쌍어는 일본 상인들의 주요 밀수 항구가 되었다.
2. 4. 호종헌과의 협상과 최후
호종헌(胡宗憲)은 장주(蔣洲)와 진가원(陳可願)을 일본에 파견하여 왕직의 양아들 왕오(王滶)(모해봉(毛海峰))와 함께 교섭하였고, 마침내 왕직을 만나 사항을 논의하였다. 친척의 무사함을 알게 된 왕직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울었고, "나는 본래 난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유총병이 나를 도모하려 하여 우리 가속을 구속하였기에 결국 귀로가 끊긴 것이다"라고 토로하였다.[16] 왕직은 통상과 호시(互市)를 승낙하고 명령에 따르고자 하는 의사를 표하였으며, 장주를 일본에 남겨둔 채 왕오에게 진가원을 데리고 귀국하여 호종헌을 만나 구체적으로 초무(招撫)와 호시에 대하여 논의하기로 하였다. 호종헌은 왕오를 후대하였고 왕직에게 의심을 거두도록 하였다.호종헌은 왕직을 초무(招撫)하여 귀국시켰고, 왕직과 함께 초무에 관하여 논의하고 수하 하정(夏正)을 인질로 삼았다. 왕직은 귀국하여 호종헌과의 접견을 기다렸다. 1558년 왕직은 항주(杭州)에서 거닐었고, 순안어사(巡按御史) 왕본고(王本固)가 음력 2월 5일 왕직을 체포하여 하옥시켰다. 조정 삼사(三司)는 회의를 열어 왕직이 왜이(倭夷)를 끌어들이고 악행을 저질러서 천인공노하였다고 결의하였다.[16] 호종헌은 조정의 압력에 못 이겨 왕직을 참수하되 섭종만 등은 이미 귀순하였으니 처형해서는 안 된다고 상주하였다. 가정제(嘉靖帝)는 왕직을 처형하고 섭종만 등은 충군(充軍)하여 유배보내도록 지시하였다.
가정제는 왕직은 중화를 배반하고 왜이와 결탁하였으니 반역죄가 심히 중하므로 효수하여 전시하도록 명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왕직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왜구와 결탁하여 침략하려 한다는 죄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전에 호종헌의 질책에 대항하여 "총독공께서 잘못 들으셨습니다! 저는 국가를 위하여 도적을 쫓아내었지 도적이 아닙니다!"라고 반박하였다. 하옥될 때에도 "내가 무슨 죄인가? 내가 무슨 죄인가?"라고 반문하였으며, '자명소(自明疏)'를 작성하여 "신 왕직은 이해를 좇아 바다에서 장사를 하고 절강과 복건에서 화물을 팔았으며, 사람들과 함께 이익을 같이하였으며 나라를 위하여 변방을 지켰으나, 도적들과 결탁하여 침공하고 소요를 일으킨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는 천지신명께서 모두 다 아실 것입니다."라고 진술하였다.[19] 스스로 적을 초멸한 공로를 나열한 후에, 왕직은 황제에게 해금을 열어 줄 것을 요청하였고, 견마지로를 다하여 도적을 쫓아내었으니 조정을 위하여 해변 강역을 평정하게끔 승낙해주길 바랐다.[19]
1560년 1월 22일, 왕직은 항주 절강성 관청의 관항구(官巷口)에서 참수되었다. 형벌 직전 왕직은 아들을 보고 끌어안아 울면서 상투용 금비녀를 쥐어주며 "이 땅에서 죽을 줄은 몰랐다!"라고 외쳤다고 한다.[20] 처자들은 공신 가문의 노예로 주어졌다. 왕오는 왕직이 하옥된 후 인질 하정을 죽이고 사지를 잘랐다. 부고가 전해지자 호종헌은 친히 해변에 가서 멀리서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고 통곡을 그치지 않았으며, 군장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차마 그 광경을 볼 수 없었다고 전한다.
왕직이 처형된 후 수장이 없어지면서 왜구는 더욱 심해졌다. 명말청초 역사학자 담천(談遷)은 호종헌이 당초 왕직을 죽이지 않기로 승낙하였지만, 이후 조정 논의가 흉흉하여 자신의 의견을 유지하지 못하였던 것이며, 만약 왕직이 살았다면 오히려 해적을 단속할 수 있었으니, 왕직 사후에는 전화가 끊이질 않았다고 전한다.[21]
3. 명나라 정부와의 관계 및 갈등
왕직은 안후이성 후이저우 출신으로, 초기에는 소금 상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사업 실패 후, 1540년에 동료들과 함께 광둥성으로 가서 해상 무역에 참여했다. 당시 명나라는 해금 정책으로 사적인 해상 무역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왕직은 정크선을 건조하여 초석, 비단, 면과 같은 금지 품목을 동남아시아와 일본으로 밀수출하며 부를 축적했다.[1]
1543년, 왕직은 포르투갈인들과 함께 일본 다네가시마에 도착하여 조총 전래에 기여했다. 그는 일본에서 초석 수요가 높다는 것을 파악하고, 일본에 초석을 공급하며 막대한 부를 얻었다. 또한, 고토 열도와 히라도에 거점을 마련하고, 현지 다이묘들과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1544년, 왕직은 쌍어를 거점으로 하는 해적 신디케이트와 협력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일본인 전사들을 고용하고, 다른 해적들을 흡수하며 강력한 해적 연합체를 구축했다. 명나라 정부는 쌍어를 공격하여 파괴했지만, 왕직은 리강으로 거점을 옮겨 활동을 이어갔다.
왕직은 명나라 정부에 해금 정책 해제를 요구하며 협력하려 했지만, 명나라는 오히려 규제를 강화했다. 이에 분노한 왕직은 해적 함대를 보내 중국 해안을 약탈했고, 명나라는 위다유를 보내 왕직을 진압하려 했다. 왕직은 일본으로 도피하여 왜구 활동을 지속했다.
명나라는 왕직을 왜구의 주모자로 지목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1555년, 호종헌은 왕직에게 항복을 권유하며 협상을 시도했다. 왕직은 무역 허가와 사면을 요구했지만, 명나라 조정은 이를 거부했다.
3. 1. 명나라의 해금 정책과 왕직
당시 왕직의 외국인과의 거래는 명나라 초부터 모든 사적 해상 무역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불법이었다. 금지령에 따라 모든 해상 무역은 공식적으로 승인된 "조공 무역"을 통해 이루어져야 했는데, 이는 외국 국가가 중국 궁정에 조공을 바치고, 명나라의 신하임을 인정하며, 황제의 호의의 표시로 선물을 받는 방식이었다. 이 무역은 관련된 외국인들에게 굴욕감을 주는 것 외에도, 국내외 시장의 수요를 충족시키기에 부적절했는데, 명나라가 조공을 바칠 수 있는 빈도에 대한 엄격한 규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1] 왕직의 밀수 무역은 공식적으로 승인된 무역으로는 충족되지 못한 수요에 대한 공급을 제공했다.명나라는 해금 정책을 자주 시행하였는데, 왕직은 이를 피해 가경 19년(1540년)에 일본 고토로 건너갔다. 이후 마쓰우라 다카노부(松浦隆信)의 초청을 받아 가경 21년(1542년)에 히라도로 옮겨갔다. 그는 지방 관헌이나 향신(郷紳) 등과 교류하며 양자나 조카인 왕여현(王汝賢) 등을 간부로 삼아 밀무역을 확대했다.
왕직은 명나라의 하천과 연안 지역에 정통했기 때문에 왜구의 대표적인 우두머리가 되었다. 가경 32년(1553년) 5월에는 37척의 배를 이끌고 태창, 강음, 차푸 등을 침략했고, 같은 해 8월에는 진산위, 숭명을 침입했다.
주완이 사망한 후 왜구 단속이 일시적으로 약화되었지만, 유대유(兪大猷) 등이 새롭게 부임하고 가경 35년(1556년)에는 호종헌(胡宗憲)이 저장 순무에 취임한다. 호종헌이 총독에 취임하자, 왕직은 상소(上疏)하여 자신은 더 이상 왜구가 아니니 은사를 내려줄 것을 호소하며, 해금 해제를 주장하고 자신의 관리 하에 무역을 허가해 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의 왜구 진압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가경 38년(1557년)에 왕직은 관직을 제시하는 명나라의 유혹에 넘어가 주산 열도의 항구로 입항했다. 명나라에서는 왕직의 처우에 대해 의견이 대립했지만, 가경 36년 12월 (1560년 1월)에 왕직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3. 2. 호종헌의 초무와 왕직의 체포
호종헌은 절강순안감찰어사(浙江巡按監察御史)로 임명된 후,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장주(蔣洲)와 진가원(陳可願)을 일본에 파견하여 왕직의 양아들 왕오(王滶)와 교섭했고, 왕직과 만나 통상과 호시(互市)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왕직은 호종헌의 초무(招撫)에 응하여 왕오를 통해 호종헌과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하도록 하였다.호종헌은 가정제의 명에 따라 왕직을 체포해야 했다.[1] 1557년, 왕직은 오토모 소린이 보낸 무역 함대와 함께 저우산섬의 쩡강(岑港)에 도착했다.[2] 호종헌은 왕직에게 항복 조건을 제시하도록 하였고, 왕직은 황제의 사면, 해군 위임, 무역을 위한 항구 개방을 요구했다.[3] 그러나 호종헌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자오원화가 몰락하면서 정치적 상황이 변하였고, 호종헌은 왕직을 사면할 수 없게 되었다.[4]
결국 왕직은 항저우에 상륙하여 당국에 체포되었고,[5] 1560년에 처형되었다.[6]
4. 평가
왕직은 복잡한 역사적 인물로, 그에 대한 평가는 시각에 따라 크게 엇갈린다. 그는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동아시아 교역 발전에 기여한 상인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해적 행위와 왜구에 연루되어 명나라와 조선에 피해를 입힌 인물로 비판받기도 한다.
왕직은 해상 무역을 육성한 상인이자 폭력적인 사업의 정점에 있는 "해적왕"이라는 어려운 유산을 남겼다. 왕직이 죽은 지 수년이 지난 후에도 그의 이름은 정치적 반대자를 비방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1562년, 호종헌은 왕직과 너무 관대하고 친밀하다는 혐의(같은 지역 출신이기 때문)를 포함한 다른 잘못으로 인해 물러나야 했다.[2] 1565년, 서계는 그의 경쟁자 엄숭의 아들 엄세번(嚴世蕃|엄세번중국어)이 왕직의 해적 잔당과 함께 왕조를 전복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했고, 엄세번은 처형되었으며 이 사건에 연루된 호종헌은 감옥에서 사망했다. 심지어 임진왜란도 ''명사''에서 왕직과 연관되어 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중국인들이 일본인을 "호랑이처럼" 두려워한다고 말한 왕직의 잔당으로부터 한국과 중국을 침략할 자신감을 얻었다고 주장했다.[2]
이처럼 해적과 반역자로서의 왕직의 평판은 오늘날까지 중국에서 이어지고 있으며, 일부는 그를 일본 해적과 협력한 민족 반역자(한간)라고 부른다.[2]
반면, 오늘날 일본에서 왕직은 해적이 아닌 중일 무역의 인물로 기념되며, 그와 관련된 장소는 후쿠에와 히라도에서 강조된다. 왕직 시대의 중국식 육각형 우물은 후쿠에와 히라도에 보존되었고, 왕직이 자주 찾았다고 전해지는 후쿠에의 중국 사찰이 재건되었다.[3] 히라도에서 왕직은 포르투갈인들을 도시에 데려와 일본의 남만 무역을 시작하고 히라도의 번영기를 열었다는 이유로 칭송받는다. 왕직의 동상과 히라도에 온 초기 유럽인들의 동상이 현지 역사 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길에 설치되었으며,[3] 왕직의 저택이 있던 자리에는 석비가 서 있다.[3]
왕직에 대한 상반된 견해는 2005년 난징 사범 대학 교수와 교사가 황산시에 있는 왕직의 묘비 기념비를 부수는 극적인 방식으로 절정에 달했다. 그 묘는 후쿠에에 본부를 둔 일본 단체의 기부금을 사용하여 2000년에 건립되었으며, 후쿠에와 황산 간의 우호 증진을 위한 의도로 보였다. 묘를 훼손한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민족 반역자의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중국을 모욕했기 때문에 묘를 훼손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3] 이 기념비는 결국 묘지에 관한 규정을 위반하여 지방 당국에 의해 철거되었다.[2] 이 사건은 중국에서 전국 뉴스 보도로 널리 보도되었으며, 왕직을 둘러싼 논쟁을 대중의 관심으로 끌어내고 가정 ''왜구'' 약탈에 대한 새로운 연구 물결을 촉발했다.[2]
4. 1. 엇갈리는 평가: 상인인가, 해적인가
왕직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국제 무역의 선구자: 왕직은 명나라의 해금 정책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시아와 일본을 잇는 활발한 해상 무역을 주도했다. 이러한 활동은 당시 경직된 조공 무역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간 무역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쌍어와 리강, 일본의 히라도 등지에 거점을 마련하고 국제적인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한 점은 그의 상업적 수완을 보여준다.
- 해적 두목: 왕직은 밀무역 과정에서 해적 집단과 연계되었고, 이들이 일으킨 ''가정 왜구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명나라 정부는 왕직을 해적 행위의 주모자로 지목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그의 활동이 결과적으로 해안 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초래했다는 점은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왕직은 국제 무역을 개척한 선구자인 동시에 해적 행위에 연루된 인물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4. 2. 중국과 일본에서의 평가
왕직은 해상 무역을 육성한 상인이자 폭력적인 사업의 정점에 있는 "해적왕"이라는 어려운 유산을 남겼다. 왕직이 죽은 지 수년이 지난 후에도 그의 이름은 정치적 반대자를 비방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1562년, 호종헌은 왕직과 너무 관대하고 친밀하다는 혐의(같은 지역 출신이기 때문)를 포함한 다른 잘못으로 인해 물러나야 했다.[2] 1565년 또 다른 숙청에서 서계는 그의 경쟁자 엄숭의 아들 엄세번(嚴世蕃|엄세번중국어)이 왕직의 해적 잔당과 함께 왕조를 전복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했다. 엄세번은 처형되었고 이 사건에 연루된 호종헌은 감옥에서 사망했다. 심지어 임진왜란도 ''명사''에서 왕직과 연관되어 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중국인들이 일본인을 "호랑이처럼" 두려워한다고 말한 왕직의 잔당으로부터 한국과 중국을 침략할 자신감을 얻었다고 주장했다.[2] 해적과 반역자로서의 왕직의 평판은 오늘날 중국에서 이어지고 있으며, 일부는 그를 일본 해적과 협력한 민족 반역자(한간)라고 부른다.[2]오늘날 일본에서 왕직은 해적이 아닌 중일 무역의 인물로 기념되며, 그와 관련된 장소는 후쿠에와 히라도에서 강조된다. 왕직 시대의 중국식 육각형 우물은 후쿠에와 히라도에 보존되었고, 왕직이 자주 찾았다고 전해지는 후쿠에의 중국 사찰이 재건되었다.[3] 히라도에서 왕직은 포르투갈인들을 도시에 데려와 일본의 남만 무역을 시작하고 히라도의 번영기를 열었다는 이유로 칭송받는다. 왕직의 동상과 히라도에 온 초기 유럽인들의 동상이 현지 역사 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길에 설치되었으며,[3] 왕직의 저택이 있던 자리에는 석비가 서 있다.[3]
왕직에 대한 상반된 견해는 2005년 난징 사범 대학 교수와 교사가 황산시에 있는 왕직의 묘비 기념비를 부수는 극적인 방식으로 절정에 달했다. 그 묘는 후쿠에에 본부를 둔 일본 단체의 기부금을 사용하여 2000년에 건립되었으며, 후쿠에와 황산 간의 우호 증진을 위한 의도로 보였다. 묘를 훼손한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민족 반역자의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중국을 모욕했기 때문에 묘를 훼손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3] 이 기념비는 결국 묘지에 관한 규정을 위반하여 지방 당국에 의해 철거되었다.[2] 이 사건은 중국에서 전국 뉴스 보도로 널리 보도되었으며, 왕직을 둘러싼 논쟁을 대중의 관심으로 끌어내고 가정 ''왜구'' 약탈에 대한 새로운 연구 물결을 촉발했다.[2]
5. 유산
왕직은 해상 무역을 육성한 상인이자 폭력적인 사업의 정점에 있는 "해적왕"이라는 복합적인 유산을 남겼다. 왕직이 죽은 지 수년이 지난 후에도 그의 이름은 정치적 반대자를 비방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1562년, 호종헌은 왕직과 너무 가깝다는 혐의(같은 지역 출신이기 때문) 등으로 인해 물러나야 했다.[2] 1565년, 서계는 엄숭의 아들 엄세번(嚴世蕃|엄세번중국어)이 왕직의 해적 잔당과 함께 왕조를 전복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하여 엄세번은 처형되고, 호종헌은 감옥에서 사망했다. 임진왜란도 ''명사''에서 왕직과 연관되어 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중국인들이 일본인을 "호랑이처럼" 두려워한다고 말한 왕직의 잔당으로부터 한국과 중국을 침략할 자신감을 얻었다고 주장한다.[2] 해적과 반역자로서의 왕직의 평판은 오늘날까지 중국에서 이어지고 있으며, 일부는 그를 일본 해적과 협력한 한간(민족 반역자)이라고 부른다.[3]
오늘날 일본에서 왕직은 해적이 아닌 중일 무역의 인물로 기념되며, 그와 관련된 장소는 후쿠에와 히라도에서 강조된다. 왕직 시대의 중국식 육각형 우물은 후쿠에와 히라도에 보존되었고, 왕직이 자주 찾았다고 전해지는 후쿠에의 중국 사찰이 재건되었다.[2] 히라도에서 왕직은 포르투갈인들을 도시에 데려와 일본의 남만 무역을 시작하고 히라도의 번영기를 열었다는 이유로 칭송받는다. 왕직의 동상과 히라도에 온 초기 유럽인들의 동상이 현지 역사 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길에 설치되었으며,[2] 왕직의 저택이 있던 자리에는 석비가 서 있다.[2]
왕직에 대한 상반된 견해는 2005년 난징 사범 대학 교수와 교사가 황산시에 있는 왕직의 묘비 기념비를 부수는 사건으로 극에 달했다. 그 묘는 후쿠에에 본부를 둔 일본 단체의 기부금을 사용하여 2000년에 건립되었으며, 후쿠에와 황산 간의 우호 증진을 위한 의도로 보였다. 훼손자들은 일본인들이 민족 반역자의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중국을 모욕했기 때문에 묘를 훼손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4] 이 기념비는 결국 묘지에 관한 규정을 위반하여 지방 당국에 의해 철거되었다.[3][4] 이 사건은 중국에서 전국 뉴스 보도로 널리 보도되었으며, 왕직을 둘러싼 논쟁을 대중의 관심으로 끌어내고 가정 ''왜구'' 약탈에 대한 새로운 연구 물결을 촉발했다.[4]
2000년에 나가사키현 고토시의 일본인이 왕직의 고향인 안후이성 황산시 섭현 웅촌진 퇵린촌의 묘지에 왕직의 묘를 세웠다.
그러나 2005년 1월 31일, 왕직은 왜구와 결탁한 한간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인 대학교원 2명에 의해 묘에 새겨진 이름의 일부가 훼손되는 사건이 일어났다.[7] 교원들은 "왕직은 사형당한 중국의 죄인이다. 일본인이 묘를 세우는 것은 중국인을 멸시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7] 그 중 한 명인 난징 대학 부교수 궈취안은 중국 공산당 정부의 일당 독재를 비판하거나, 다른 사건으로 정보 공개 등을 요구하는 내용을 인터넷에 발표해오다 체포되어 2009년에 국가 전복죄로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8]
참조
[1]
서적
António Galvão writes that the discovery of Japan was in 1542, when three Portuguese men stowed away on a Chinese junk in Ayutthaya bound for Shuangyu, but the junk got caught in a storm and drifted to Japan. The mainstream interpretation considers this voyage the same as the one that carried Wang Zhi in 1543 as attested in Japanese sources Teppo-ki (鉄砲記) and the Tanegashima Kafu (種子島家譜). On the other hand, there is an alternative interpretation that sees the two voyages as different and Wang Zhi might have deliberately brought the Portuguese to Japan in pursuit of trade in the second voyage. See
[2]
뉴스
汉奸王直墓再次挨砸 民政厅称此墓不合法
https://news.qq.com/[...]
The Beijing News
2018-10-10
[3]
웹사이트
蘇浙兩教師夜砸"漢奸"墓
http://www.people.co[...]
2018-10-11
[4]
문서
母方の姓は汪氏で、そのために汪氏も名乗っ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説がある。
[5]
문서
同時代に倭寇を調査した鄭舜功の『日本一鑑』の記述による。
[6]
뉴스
日本人が建てた倭寇の墓壊す=「中国人蔑視」と反発−安徽省
http://news.hkheadli[...]
新華社
[7]
웹사이트
http://news.hkheadli[...]
[8]
문서
『명사』(明史)는 '''汪直'''으로,명대 정약증(鄭若曾)의 『주해도편』(籌海圖編)과 가정(嘉靖)『절강통지(浙江通志)』에 수록된 전여성(田汝成)의 『왕직전(王直傳)』은 '''王直'''으로 표기하였다.
[9]
문서
흡현의 지방지 『흡지(歙志)』 기록에 의하면, 왕직이 출생할 때에 이모친 왕씨(汪氏)가 꿈에 큰 별이 하늘에서 뱃속으로 떨어졌고, 별 옆에는 한 아관(峨冠)이 있었는데, 왕씨는 놀라면서 "이는 호성(弧星, húxīng)이니 오랑캐(胡, hú)에서 빛나 오랑캐에서 질 것이다(此弧星也, 當耀于胡而亦沒于胡.)"라고 했다. 얼마 후 대설이 날리고 초목이 모두 얼었다. 왕직이 조금 자라서 모친이 탄생 시의 기이한 현상을 이야기하는 걸 듣자 홀로 좋아하면서 "하늘의 별이 뱃속으로 들어왔으니 비범한 태아였다. 초목이 얼었으니 전쟁의 징조이다. 하늘이 장차 나에게 무로써 이름을 드날리라고 명한 것인가?(天星入懷, 非凡胎也. 草木氷者, 兵象也. 天將命我以武顯乎?)"라고 했다.
[10]
문서
萬曆『歙志』 「王直傳」, 采九德, 『倭變事略』, "少落魄, 有任俠氣, 及壯多智略, 善施與, 以故人宗信之."
[11]
문서
王直曾對徐惟學•葉宗滿同伙說, "中國法度森嚴,動輒觸禁。科第只收酸腐兒無壯,吾儕孰與海外徜徉乎, 何沾沾一撮土也!"(萬曆『歙志』 「王直傳」)
[12]
문서
"置硝黃絲棉等違禁貨物, 抵日本·暹羅·西洋諸國往來貿易."
[13]
문서
采九德, 『倭變事略』 「附錄」, "誘佛郞機夷, 往來浙海, 泊雙嶼港, 私通貿易."
[14]
문서
『籌海圖編』 卷8 "遂起邪謀, 招聚亡命, 勾引倭奴多郞·次郞·四助四郞等, 造巨艦, 聯舫一百二十步, 可容二千人, 上可馳馬."
[15]
문서
王直“据薩摩洲之松津浦, 僭號曰宋, 自稱曰徽王, 部署官屬, 咸有名號. 控制要害, 而三十六島之夷皆其指使."(田汝成, 『王直傳』)
[16]
문서
『倭變事略』三司:“王直始以射利之心, 違明禁而下海, 繼忘中華之義, 入番國以爲奸. 勾引倭夷, 比年攻劫, 海宇震动, 東南繹騷. … 上有干乎國策,下遺毒于生靈. 惡貫滔天, 神人共怒."
[17]
문서
『明世宗實錄』卷478 가정38년(1559) 11월 29일 丙申條, "總督浙直都御史胡宗憲, 讞上王直·葉宗滿·王汝賢等獄, 謂 直等勾引倭夷, 肆行攻劫, 東南繹騷, 海宇震动. 臣等用間遣諜, 始能誘獲. 乞將直明正典刑, 以懲于後. 宗滿·汝賢, 雖罪在不赦, 然往復歸順, 曾立戰功, 姑貸一死, 以開來者自新之路."
[18]
문서
"直背華勾夷, 罪逆深重, 命就彼梟示, 宗滿·汝賢旣稱歸順報功, 姑待以不死, 發變衛永遠充軍."
[19]
간행물
倭寇,一个王朝的谎言?
《中国国家地理》杂志浙江专辑
2012-02
[20]
서적
『倭變事略』
[21]
문서
談遷,『國榷』卷62, "胡宗憲許王直以不死, 其後議論汹汹, 遂不敢堅請. 假宥王直, 便宜制海上, 則岑港·柯梅之師可無經歲, 而閩·廣·江北亦不至頓甲苦戰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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