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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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대유는 명나라 시대의 무장으로, 1503년에 태어나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1535년 무과에 급제하여 금문도를 지켰으며, 1555년에는 좡족 출신 와씨부인과 함께 왜구를 물리쳤다. 이후 절강총병으로 승진하여 주산의 왜구 기지를 공격하고, 척계광과 함께 왜구를 토벌하는 등 활약했다. 그러나 동창의 뇌물 요구를 거절하여 투옥되는 등 정치적 좌절을 겪었으며, 부패에 실망하여 사망했다. 사후 좌도독으로 추증되었으며, 무양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유대유는 무예에도 능하여 소림권을 발전시켰으며, 저서 《검경》을 통해 검술을 소개하기도 했다.

유대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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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유 흉상
이름유대유
본명유대유
지보(志輔)
허강(虛江)
시호무양(武襄)
출생1503년
출생지복건(福建) 천주부(泉州府) 진강현(晉江縣) 호시하격두촌(濠市河格頭村)
사망1579년
직업무예가, 장군, 문인
자녀유자고(兪咨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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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유대유는 1503년 복건성에서 태어났지만, 본적은 안휘성이다. 1535년 무과에 급제하여 금문도를 지키는 관직을 맡았다.

1555년, 좡족 출신 와씨부인과 함께 절강성 가흥시 일대를 약탈하던 왜구를 무찔렀다. 1556년 절강총병으로 승진하여 주산군도의 왜구 기지를 공격했다. 1563년에는 척계광과 함께 복건의 왜구를 소탕하고 1566년까지 중국 동남 연안 대부분의 왜구를 몰아냈다.

1561년 음력 7월 15일, 호광진간참장서지휘첨사에서 남감참장이 되어 강서 남감 등처를 분수했다. 1562년 음력 11월 29일, 강서 흥녕 등 네 현에 신위진이 건설되자, 남감참장에서 다섯 지역을 협수하는 부총병이 되어 신위진에 주둔했다. 같은 날, 신위영부총병에서 복건총병으로 전직되었다.

그는 청렴결백한 성격으로 동창의 뇌물 요구를 거절하여 모함을 받아 투옥되기도 했다. 척계광호종헌의 도움으로 풀려났지만, 부패에 환멸을 느껴 실의에 빠져 사망했다. 사후 좌도독에 추증되고 무양(武襄)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아들 유자고는 복건총병을 지내며 1624년 팽호제도의 네덜란드인을 대만으로 몰아냈으나, 1627년~1628년 정지룡의 공격을 받아 하문 기지를 약탈당했다.

2.1. 초기 생애 및 관직 진출

1503년, 유대유는 복건 천주부(泉州府) 진강현(晉江縣) 호시하격두촌(濠市河格頭村)(오늘날 복건성 천주시 낙강구洛江區 하시진河市鎭 하시촌河市村)에서 태어났지만, 조적(祖籍)은 남직례(南直隸) 봉양부(鳳陽府) 확구현(霍邱縣, 오늘날 안휘성 육안시 확구현)이다. 가정 14년(1535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무진사(武進士)가 되었고, 천호금문수어(千戶金門守禦)에 제수되어 복건 앞바다의 금문도(金門島)를 지켰다.

2.2. 왜구 토벌

가정 34년(1555), 유대유는 장족 출신 와씨부인(瓦氏夫人)과 함께 명군을 이끌고 절강 가흥 일대를 약탈하던 왜구 2천 명을 공격하여 승리했다.

가정 35년(1556), 절강총병(浙江總兵)으로 승진하여 왜구 섬멸 지시를 받았다. 유대유는 절강 동북부에 위치한 주산의 왜구 기지를 공격하였다.

가정 42년(1563), 척계광 등과 함께 복건 흥화부 보전현의 왜구를 공격하여 보전을 되찾았다.

가정 44년(1566), 중국 동남 연안의 왜구 대부분이 축출되었다.

2.3. 정치적 좌절과 죽음

유대유는 정직하고 강직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황궁에서 첩보 업무를 담당하던 동창의 대표를 만났을 때에도 뇌물 증여를 거절하였고, 이로 인해 무고를 당해 투옥되기도 하였다. 척계광호종헌이 그를 구해주었지만, 유대유는 부패에 실망하여 정치적 좌절을 겪고 실의 속에 사망하였다. 사후에는 좌도독(左都督)이 추증되었고, 무양(武襄)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2.4. 가족 관계

유자고(兪咨臯)는 유대유의 아들로, 복건총병을 지냈다. 1624년, 유자고는 팽호에 주둔하던 네덜란드인들을 대만으로 몰아냈지만, 1627~1628년에 정지룡의 대규모 습격을 여러 번 받았으며, 1628년 하문의 기지가 약탈당했다.

3. 유산

유대유는 소림사에서 무술을 수련했고, 훗날 『정기당집(正氣堂集)』을 저술 및 편찬했다. 그의 책에는 「검경(劍經)」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나중에 독립적인 무술 교본이 되었다. 1560년경, 유대유는 소림사를 방문하여 승려들의 무술 기술을 관찰하고, 종칭(宗磬)과 푸충(普從) 두 승려와 함께 남쪽으로 돌아왔다. 그는 3년 동안 "경초장검"과 "양가창(楊家槍)"을 기반으로 창안한 봉술인 "유가곤(俞家棍)"을 그들에게 가르쳤다. 종칭과 푸충은 나중에 소림사로 돌아가 다른 승려들에게 배운 것을 가르쳤다. 20세기 무술 전문가인 탕호는 소림 봉술인 "오호란(五虎攔)"의 기원을 유대유의 가르침으로 보았다.

3.1. 유적

1559년에 유대유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 현재 저장성 진해시(鎭海市) 진해중학(鎭海中學)에 있다.
1559년에 유대유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 현재 저장성 진해시(鎭海市) 진해중학(鎭海中學)에 있다.


저장성 리수이시 롄두구(蓮都區) 대유가(大猷街)는 유대유의 왜구 토벌을 기념하여 그의 이름에서 따와 명명되었다. 유대유의 무덤은 현재 푸젠성 천주시 뤄장구(洛江區)에 있으며, 푸젠성 성급유물보호단위(省級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되어 있다.

3.2. 무예

유대유는 어려서부터 조본학(趙本學)을 스승으로 하여 병법과 무예를 익혔다.

중국 무술 역사에서 유대유는 척계광과 더불어 복건에 남아 전해져 내려온 소림권을 발전시켰다. 이는 현재 남권으로 불리는데, 소림권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남소림은 현재 복건 천주(泉州)에 남아 있다.

유대유는 형초장검(荊楚長劍)이라는 무기를 잘 다뤘다. 이후 『정기당집(正氣堂集)』이라는 문집을 출간했는데, 그중에는 「검경(劍經)」이라는 장이 있으며, 후에는 이것만으로도 독자적인 무예서가 되었다.

『검경(劍經)』은 가정 36년(1557)에 완성되었다. 유대유는 『검경』과 『병법발미(兵法發微)』를 스승 조본학이 지은 『도검내외편(韜鈐內外編)』과 함께 집대성하여 『속무경총요(續武經總要)』를 지었다. 『검경』은 곤봉(棍棒)과 장병기(長兵器) 사용법에 관한 책으로, 검법(劍法) 혹은 곤법(棍法), 사법(射法), 진법(陣法) 세 체계로 구성되었으며, 유대유는 '곤봉이 무예 가운데 으뜸이다(棍爲藝中魁首)'라고 칭했다. '기정상생(奇正相生)'의 변화와 '이정제동(以靜制動, 정으로 동을 제압하다)'으로 나중에 발하지만 먼저 이르러야(後發而先至) 하고, 적이 '옛 힘이 조금 과하면 새 힘은 발하지 않는다(舊力略過, 新力未發)'는 상태에 있으면 돌격을 가하여 '적에게 제2타를 가한다(打他第二下)'는 것을 강조했다. '상대가 힘을 쓰기 전에는 강건해야 하고, 상대가 힘을 쓴 후에는 부드러운 상태가 되어야 하며, 내가 조용히 기다리는 것에 상대가 집중하게 하여, 적이 타격하는 방식을 알면 그때 그대가 싸우는 방식대로 하라(剛在他力前, 柔乘他力後, 彼忙我靜待, 知拍任君鬪)'라고 하였다.

가정 39년(1560) 즈음, 유대유는 소림사에 들어가, 소림사 승려들의 전투 전략을 얻고자 했다. 그 결과, 유대유는 종경(宗擎)과 보종(普從) 두 승려를 데리고 남쪽으로 돌아왔다. 이후 3년 동안 그는 이들에게 유가곤(兪家棍)을 가르쳤다. 유가곤은 형초장검과 양가창(楊家槍)의 움직임을 기반으로 하여 그가 만든 곤봉술이다. 종경과 보종은 훗날 소림사로 돌아가 다른 승려들에게 유가곤을 전수했다. 20세기 무예 전문가 당호는 소림 곤봉술인 오호란(五虎攔)의 기원은 유가곤이라고 지목하였다.

4. 등장 작품

* 충렬도(1975년, 홍콩, 로이 차오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