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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중국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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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王)은 중국, 한국, 베트남, 일본 등에서 사용되는 성씨이다. 희성, 자성, 규성 등 다양한 기원을 가지며, 중국에서는 인구 순위 2위로 가장 흔한 성씨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는 고려의 국성이었으며, 개성 왕씨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베트남에서는 브엉(Vương)으로 불리며, 일본에서는 제왕의 집단으로 여겨졌다.

2. 기원 및 역사

왕(王)씨는 중국, 한국, 베트남, 일본 등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사용되는 성씨이다. 특히 중국에서 인구가 매우 많은 성씨 중 하나로, 다양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3]

중국 왕씨의 기원은 매우 다양하여 대략 10가지 정도로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근원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리, 장, 진, 유씨처럼 매우 흔하며, 기록이 없더라도 대부분의 한족선비족 왕조 계통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주요 기원으로는 주나라 왕족의 후예인 희성(姬姓) 왕씨[8], 상나라 왕족의 후예인 자성(子姓) 왕씨[11], 순 임금의 자손인 규성(嬀姓) 왕씨[12] 등이 있다. 야사에서는 귀곡자의 후손이 왕씨를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 한족에 동화된 선비족, 몽골족, 만주족중국의 소수민족이 왕씨를 사용한 경우도 많으며, 여진족의 완안씨가 왕씨로 개성한 사례도 알려져 있다.

유명 인물로는 진나라의 통일에 기여한 왕전과 왕분 부자, 신나라를 세운 왕망 등이 있다. 왕망의 계통에 대해서는 주나라 계통 혹은 규성 계통 등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한국에서는 고려국성이었으며[18], 베트남일본에서도 왕씨가 존재한다.

2. 1. 중국

'''왕'''(王, Wang) 성은 중국 국가 통계국의 2010년 제6차 전국인구조사(第六次全國人口普查)에서 8,890만 명으로 조사되어, 중국 성씨 인구 순위 2위를 기록했다. 이는 중국 전체 인구의 7.41%, 한족 인구의 7.65%에 해당한다. 주요 분포 지역은 산시(山西), 허베이(河北), 허난(河南) 등이다. 2020년 중화인민공화국 전국 인구 조사에서는 1억 1832만 2천 명으로 집계되어 여전히 가장 흔한 성씨 중 하나이다.[3][4][5] 특히 북방 지역에서 흔하며, 동북부의 지린성랴오닝성에서는 성 전체 인구의 10% 이상을 차지한다.[6] 한편, 타이완의 2018년 통계에서는 6위로, 967,622명이 있다.[7]

왕씨는 매우 흔한 성씨이므로, 기록이 없더라도 중국 대부분의 한족 및 선비족 왕조 계통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그 기원은 대략 10가지 정도로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알려진 것보다 더 다양한 근원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리, 장, 진, 유씨처럼 매우 흔한 성씨이다. 중국에서 왕씨의 시작은 허난 왕씨로 보지만 인구수는 많지 않으며, 다수는 주나라 계통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규성(嬀姓)으로 알려진 전안(田安)의 후손이 산동 왕씨의 기원이라는 설도 있다. 야사에서는 귀곡자초나라 출신이며 그의 후손들이 왕씨 성을 사용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왕씨는 중국의 소수민족 사이에서도 사용 빈도가 높은 성씨로, 5호 16국 시대의 선비족, 몽골족, 기타 만주족 중에서도 왕씨 성을 가진 경우가 있었다.

유명한 인물로는 진나라의 장군으로 중국 통일에 큰 역할을 한 왕전과 왕분 부자가 있다. 신나라를 세운 왕망(王莽) 역시 왕씨인데, 그가 주나라 제도를 부활시키려 했기 때문에 주나라 계통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산동 출신이라는 점에서 규성 왕씨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일부 중국의 규성 가문들은 왕망을 규성으로 여기며, 왕망의 일족이 탄압을 받아 요(姚), 정(丁)씨 등으로 성을 바꾸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왕씨는 인구가 많은 만큼 고대부터 가짜 성을 만들어 쓰는 경우도 있었다.

광둥어우어에서는 '(黃)'과 발음이 같아 혼동을 피하기 위해 '가로 3획의 왕' 또는 '획수 3획의 왕' 등으로 구분하여 부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 '황'이 두 번째로 흔한 성씨인 광둥어권에서는 '황'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흔하다.

주요 기원은 다음과 같다.

구분본관 및 시조설명
희성(姬姓) 왕씨낭야 왕씨(琅邪王氏), 태원 왕씨(太原王氏) 등시조는 동주 영왕의 태자 희진(姫晋)으로 여겨진다.[8] 희진은 왕위를 계승하기 전에 사망했거나(춘추좌씨전) 폐적되었고(신당서)[9], 왕위는 동생인 희귀(景王)가 이었다. 희진의 자손이 살던 집을 "왕가(王家)"라고 부르면서 성씨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계통이 가장 유명하지만, 주나라 문왕의 15번째 아들 필공고나 전국 시대 신릉군의 후예도 왕가의 후예로서 왕씨를 칭했다고 한다.[10]
자성(子姓) 왕씨급군 왕씨(汲郡王氏) 등상나라 왕족의 후예이다. 급군 왕씨는 비간의 후예라고 한다.[11]
규성(嬀姓) 왕씨북해 왕씨(北海王氏), 진류 왕씨(陳留王氏) 등순 임금의 자손이다.[12]



이 외에도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 한족에 동화된 이민족이 왕씨를 칭한 경우도 많으며, 여진족의 완안씨가 왕씨로 개성한 사례 등이 알려져 있다.

2. 2. 한국

한국의 성씨 중 하나이다. 2015년 대한민국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왕씨 인구는 25,565명이다.[18] 고려 시대에는 국성이었다.

삼국 시대에도 왕씨가 존재했다. 백제에는 왕인, 왕보손, 왕류귀, 왕도량, 왕무, 왕변나, 왕효린 등이 있었고, 고구려에는 왕산악, 왕고덕, 왕중문 등이 있었다. 이들은 314년고구려낙랑군대방군을 멸망시킨 후 삼국 각지로 흩어진 낙랑군 출신의 중국계 호족 세력인 낙랑 왕씨의 후예로 추정된다.[15][16][17]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왕씨는 왕족으로서 크게 번성했다. 왕건은 공신들에게 왕씨 성을 하사하기도 하여 고려 말기에는 왕씨 인구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1394년, 옛 고려 세력의 저항을 우려하여 고려 왕족들을 처형하고 개성 왕씨들을 한 곳에 모아 몰살하는 등 왕씨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왕씨들은 옥(玉), 전(全), 전(田) 등으로 성을 바꾸고 각지로 피신했다고 전해진다. 과거 왕씨 성을 하사받았던 가문들도 본래의 성으로 되돌아갔다. 조선 왕조가 안정된 이후에도 왕씨에 대한 감시와 탄압은 형식적으로나마 지속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7세기에 중국계 제남 왕씨가 조선에 귀화할 때까지 이어졌다.

2. 3. 베트남

'''왕'''(Vương|브엉vi)은 베트남인의 성씨 목록 중 하나이다.

  • 브엉 딘 후에: 베트남의 정치인.

2. 4. 일본

일본에서 '왕씨(王氏)'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첫째는 제왕(帝王)의 집단을 가리키는 경우이다. 일본의 율령제에서는 천황의 손자(2세)부터 황현손(4세)까지를 '왕'의 범위로 정했다. 경운 3년(706년)에는 5세손까지 범위가 확대되었으나, 정관 12년(870년)에는 제왕의 수가 429명으로 제한되었다. 사가 천황 이후에는 황족이 신하의 신분으로 내려가는 신적강하가 늘어나면서 제왕의 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본래 친왕관위가 가장 높은 제1친왕이 왕씨를 대표했지만, 원정기에 들어 법친왕 제도가 확립되면서 친왕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후 가잔 천황친족자손으로 신기백 직위를 세습한 시라카와 백왕가가 왕씨의 씨장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둘째는 오키나와현 지역의 성씨이다. 류큐 왕국 시대인 1392년에 구메 36성이라 불리는 화교 집단이 당시 섬이었던 나하의 구메 마을로 이주하여 교역 활동에 종사했다. 이들은 류큐에 정착한 후에도 1650년까지 수백 년간 중국식 관습을 유지했다고 전해진다. 이 중국계 주민들 중에 푸젠성 출신의 왕씨가 포함되어 있었다. 오키나와에서는 전통적으로 중국식 성(당명, 唐名)과 일본식 성(야마토나, 大和名)을 함께 사용했는데, 왕씨의 경우 '왕씨 국바 가문'처럼 칭한다. 현재 왕씨 자손의 문중으로는 국바(国場), 오와타(大湾), 신자키(新崎), 우에운텐(上運天), 나카소네(仲宗根) 등의 가문이 있다.

3. 주요 분파

왕씨는 매우 흔한 성씨로 다양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기록이 명확하지 않더라도 중국의 여러 한족선비족 왕조 계통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그 유래는 대략 10가지 정도로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알려진 것보다 더 다양한 근원을 가질 것으로 추정된다. 주요 계통은 다음과 같다.


  • 희성 왕씨 (姬姓 王氏): 주나라 왕실의 후예로 알려진 가장 대표적인 계통이다. 낭야 왕씨(琅邪王氏)와 태원 왕씨(太原王氏) 등이 여기에 속한다.[8][9][10]
  • 자성 왕씨 (子姓 王氏): 상나라 왕족의 후예이다. 급군 왕씨(汲郡王氏)가 대표적이다.[11]
  • 규성 왕씨 (妫姓 王氏): 고대 순 임금의 후손이다. 북해 왕씨(北海王氏)와 진류 왕씨(陳留王氏) 등이 있다.[12]
  • 기타: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 한족에 동화된 이민족들이 왕씨를 사용하기 시작한 경우도 많으며, 여진족의 완안씨가 왕씨로 개성한 사례 등이 있다.

3. 1. 중국

'''왕'''(王, Wang) 성은 중국 국가 통계국의 2010년 제6차 전국인구조사에서 약 8,890만 명으로 조사되어, 중국 전체 성씨 중 인구 순위 2위를 기록했다. 이는 중국 전체 인구의 7.41%, 한족 인구의 7.65%에 해당한다. 특히 산시(山西), 허베이(河北), 허난(河南) 지역에 많이 분포한다.[3] 2020년 중화인민공화국 전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왕씨 인구는 약 1억 1832만 2천 명으로 증가하여 여전히 중국에서 가장 흔한 성씨 중 하나이다.[4][5] 특히 중국 동북부의 지린성랴오닝성에서는 성 전체 인구의 1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북방 지역에서 흔하다.[6] 한편, 타이완에서는 2018년 통계 기준으로 6번째로 많은 성씨이며, 약 96만 7천 명이 있다.[7]

왕씨는 매우 흔한 성씨이므로, 기록이 명확하지 않더라도 중국의 여러 한족선비족 왕조 계통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그 유래는 대략 10가지 정도로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알려진 것보다 더 다양한 근원을 가질 것으로 추정된다. 리(李), 장(張), 진(陳), 유(劉) 등과 함께 중국에서 매우 흔한 성씨 중 하나이다. 중국 왕씨의 기원은 허난(河南) 지역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나, 초기 인구는 많지 않았고, 현재 왕씨 인구의 다수는 주나라 계통(희성, 姬姓)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규성(妫姓) 계통으로는 전안(田安)의 후손이 산둥(山東) 왕씨의 기원이라는 설도 있다. 야사에서는 귀곡자초나라 출신이며 그의 후손들이 왕씨 성을 사용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왕씨는 중국의 소수민족 사이에서도 사용 빈도가 높은 성씨로, 5호 16국 시대의 선비족, 몽골족, 만주족 등도 왕씨 성을 사용한 기록이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왕씨 인물로는 진나라의 장군으로 중국 통일에 기여한 왕전과 왕분 부자가 있다. 신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은 주나라의 제도를 부활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주나라 계통(희성)으로 보기도 하고, 산둥 출신이라는 점에서 규성 왕씨로 보기도 한다. 일부 중국 규성 가문에서는 왕망을 규성으로 여기며, 그의 일족이 탄압을 피해 요(姚), 정(丁)씨 등으로 성을 바꾸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왕씨는 인구가 많은 만큼, 고대부터 가짜 성을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광둥어우어에서는 '(黃)'과 발음이 같아 혼동을 피하기 위해 '가로 3획의 왕' 또는 '획수 3획의 왕' 등으로 구별하여 부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 '황'씨가 두 번째로 흔한 성씨인 광둥어권에서는 '황'씨로 오인되는 경우가 잦다.

=== 주요 계통 ===

  • 희성 왕씨 (姬姓 王氏): 가장 널리 알려진 계통으로, 낭야 왕씨(琅邪王氏)와 태원 왕씨(太原王氏)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의 시조는 동주 영왕의 태자였던 희진(姫晋)으로 알려져 있다.[8] 희진은 왕위를 계승하기 전에 사망했거나(춘추좌씨전) 폐위되었고(신당서)[9], 왕위는 동생인 희귀(景王)가 이었다. 희진의 자손들이 살던 집을 사람들이 "왕가(王家)"라고 부르면서 이것이 성씨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외에도 주나라 문왕의 15번째 아들인 필공고의 후예나, 전국 시대 위나라신릉군 후예 역시 왕가의 후손이라 하여 왕씨를 칭했다는 설도 있다.[10]
  • 자성 왕씨 (子姓 王氏): 은(상) 왕족의 후예이다. 급군 왕씨(汲郡王氏)는 비간의 후예라고 전해진다.[11]
  • 규성 왕씨 (妫姓 王氏): 순 임금의 후손이다. 북해 왕씨(北海王氏)와 진류 왕씨(陳留王氏)가 이 계통에 해당한다고 알려져 있다.[12]
  • 기타: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 한족에 동화된 이민족들이 왕씨를 사용하기 시작한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여진족의 완안씨가 왕씨로 성을 바꾼 사례가 알려져 있다.


=== 주요 가문 ===

==== 낭야 왕씨 (琅邪 王氏) ====

진나라 장군 왕리의 장남 왕원(王元)의 후손인 왕길을 시조로 하며, 낭야군 린이현을 본관으로 한다. 태원 왕씨와는 동족으로 전해진다. 왕길의 후손으로는 왕준, 왕숭, 왕준, 왕음, 왕인 등이 있다.[14] 왕인의 후손으로는 왕융과 왕예가 있으며, 왕융의 후손으로는 왕람과 왕상이 있다. 왕람의 후손으로는 왕언, 왕기, 왕회, 왕정, 왕재 등이 있다. 왕언의 후손으로는 왕돈과 왕함이 있고, 왕회의 후손으로는 왕서, 왕빈, 왕익, 왕광이 있으며, 왕정의 후손으로는 왕도가 있다. 왕도의 후손으로는 왕회, 왕소, 왕협, 왕흡, 왕념, 왕열 등이 있으며, 왕협의 후손으로 왕민과 왕순이 있다. 왕순의 후손으로는 왕유, 왕담수, 왕류, 왕홍 등이 있으며, 왕담수의 후손 왕승건과 왕홍의 후손 왕승달이 있다. 왕승건의 후손으로는 왕빈, 왕집, 왕지, 왕자 등이 있으며, 왕승달의 후손으로는 왕도염이 있다. 왕지의 후손 왕균과 왕도염의 후손 왕융이 있다.

또한 왕상의 후손으로는 왕적지와 서예가로 유명한 왕희지가 있다. 왕희지의 아들로는 왕헌지, 왕조지, 왕휘지, 왕숙지, 왕환지, 왕응지, 왕현지 등이 있으며, 왕헌지의 후손 왕정지와 왕휘지의 후손 왕진지가 있다. 왕정지의 후손 왕열지가 있으며, 그 후대로 수나라의 승려 서예가 지영이 있다.

==== 태원 왕씨 (太原 王氏) ====

왕리의 차남인 왕위(王威)를 시조로 하는 씨족으로, 낭야 왕씨와 동족이라고 전해진다.[13] 후한 말기의 충신 왕윤과 그의 조카 왕릉 등이 이 가문 출신으로 유명하다. 왕윤의 조부인 왕웅의 후손으로는 왕예와 왕혼이 있으며, 왕예의 후손으로는 왕연이, 왕혼의 후손으로는 왕융이 있다. 왕연의 후손으로는 왕현이 있으며, 왕현의 후손으로는 왕만과 왕흥이 있다.

3. 2. 한국

'''왕'''(王)은 한국의 성씨 중 하나이다. 2015년 대한민국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왕씨는 25,565명이다.[18] 고려국성(國姓)이었다.

삼국 시대에도 왕씨 성을 가진 인물들이 있었다. 백제에는 왕인, 왕보손, 왕류귀, 왕도량, 왕무, 왕변나, 왕효린 등이 있었고, 고구려에는 왕산악, 왕고덕, 왕중문 등이 있었다. 이들은 314년경 고구려가 낙랑군대방군을 점령한 후 삼국 각지로 흩어진 낙랑 왕씨의 후예로 추정된다.[15][16][17] 낙랑 왕씨는 본래 한나라 계통의 호족으로 낙랑군 지역에서 세력을 떨쳤다.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왕씨는 왕족으로서 크게 번성했다. 왕건은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왕씨 성을 하사하기도 하여 고려 말기에는 왕씨 인구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392년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구 고려 세력의 반란을 염려하여 1394년 대대적인 왕씨 숙청을 단행했다. 주요 고려 왕족들을 살해하고, 개성 왕씨들을 한 곳에 모아 몰살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왕씨들은 옥(玉), 전(全), 전(田) 등으로 성을 바꾸고 숨어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한 왕씨 성을 하사받았던 가문들도 서둘러 본래의 성으로 되돌아갔다. 조선 왕조가 안정된 이후에도 왕씨에 대한 색출과 탄압은 형식적으로나마 계속되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17세기에 중국계 제남 왕씨가 귀화할 때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기준으로 대한민국 왕씨 인구는 25,565명에 불과하다. 이 중 왕건을 시조로 하는 개성 왕씨가 22,452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하며, 17세기 이후 귀화한 중국계 왕씨 등 다른 계통도 존재한다.

본관 (씨족)시조인원수 (2015년)
강릉 왕씨24
개성 왕씨왕건22,452
경주 왕씨8
고성 왕씨17
곡성 왕씨36
광주 왕씨15
구례 왕씨33
구로 왕씨5
남원 왕씨6
남태 왕씨10
달성 왕씨8
담양 왕씨9
대구 왕씨31
대전 왕씨12
문등 왕씨8
문성 왕씨17
밀양 왕씨7
부산 왕씨16
산동 왕씨113
성남 왕씨12
송도 왕씨634
송악 왕씨18
수원 왕씨14
순흥 왕씨9
아산 왕씨8
안동 왕씨7
안산 왕씨26
양천 왕씨5
여수 왕씨6
영성 왕씨6
용인 왕씨5
운남 왕씨16
울산 왕씨11
윤성 왕씨7
의령 왕씨6
인천 왕씨41
장성 왕씨7
전주 왕씨34
제남 왕씨595
제주 왕씨55
제천 왕씨5
중남 왕씨5
진주 왕씨8
창원 왕씨11
천안 왕씨5
청녕 왕씨10
청주 왕씨17
토성 왕씨5
파평 왕씨12
평택 왕씨5
한양 왕씨254
해주 왕씨38
화성 왕씨6


4. 주요 인물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본문 내용을 작성하지 않음)

4. 1. 중국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왕(王)은 가장 흔한 성씨이며[3], 2020년 중화인민공화국 전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1억 1832만 2천 명이 있다[4][5]。 이는 중국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특히 북방 각 성에서는 가장 흔한 성씨이다. 동북부의 지린성랴오닝성에서는 성 전체 인구의 1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흔하다[6]。 이전 2010년 제6차 전국인구조사(第六次全國人口普查)에서는 약 8,890만 명으로 조사되어 중국 성씨 인구 순위 2위였으며, 당시 중국 전체 인구의 7.41%, 한족 인구의 7.65%를 차지했다. 주요 분포 지역으로는 산시성, 허베이성, 허난성 등이 꼽힌다. 한편, 타이완의 2018년 통계에서는 6번째로 많은 성씨이며, 967,622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7]

왕씨는 매우 흔한 성씨이므로 그 유래가 다양하게 전해진다.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경우를 포함하면 중국 대부분의 한족 및 선비족 왕조 계통을 포괄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약 10가지 정도의 연원이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이보다 더 다양한 근원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리, 장, 진, 유씨처럼 매우 흔한 성씨 중 하나이다. 중국에서 왕씨는 허난성 지역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현재 허난성 왕씨의 인구 비중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 대다수의 왕씨는 주나라 계통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규성(媯姓)을 가졌던 전제의 후예 전안(田安)의 후손이 산둥성 지역 왕씨의 유래라는 설도 있다. 야사에서는 귀곡자초나라 출신이며 그의 후손들이 왕씨 성을 사용했다는 주장도 전해진다. 왕씨는 중국의 소수민족 사이에서도 사용 빈도가 높은 성씨로, 오호 십육국 시대선비족, 몽골족, 만주족 등도 왕씨 성을 사용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로는 진나라의 장군인 왕전과 그의 아들 왕분이 있다. 이들은 진시황의 중국 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 신나라를 세운 왕망(王莽) 역시 왕씨이다. 그는 주나라의 제도를 부활시키려 했기 때문에 주나라 계통으로 보기도 하고, 출신지가 산둥성이었기 때문에 규성 왕씨라는 설도 있다. 일부 중국의 규성 가문에서는 왕망을 규성으로 여기며, 왕망 몰락 후 그의 일족이 탄압을 피해 요(姚)씨나 정(丁)씨로 성을 바꾸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왕씨는 인구가 많은 만큼, 고대부터 가짜 성을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중국 역사에서 유명한 왕씨 가문으로는 동진 시대에 명문가로 번성했던 낭야 왕씨와 태원 왕씨가 있다. 특히 낭야 왕씨에서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서예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왕희지를 배출했다.

광둥어우어에서는 왕(王)씨와 (黃)씨의 발음이 같기 때문에, 구별을 위해 '가로 3획의 왕'(三劃王) 또는 '획수 3획의 왕' 등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 황씨가 두 번째로 흔한 성씨인 광둥어 사용 지역에서는 황씨로 오인되는 경우가 흔하다.

4. 2. 한국

'''왕'''(王)은 한국의 성씨 중 하나이다. 2015년 대한민국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왕씨 인구는 25,565명이다.[18] 고려 시대에는 국성(國姓)으로 사용되었다.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시대이름주요 활동/직업
고구려왕산악음악가
백제왕인도래인
고려왕건고려의 태조
고려왕자지문신
현대왕상은실업가, 국회의원
현대왕종근아나운서
현대왕기춘유도 선수
현대전지현배우 (본명: 왕지현)
현대왕빛나배우


4. 3. 베트남

'''왕'''(Vương|브엉vie)은 베트남의 성씨 중 하나이다.

  • 브엉 딘 후에 - 베트남의 정치인.

참조

[1] 문서 東晋まで続く。
[2] 문서 唐まで続く。
[3] 웹사이트 名字・名前と漢字 第2回 漢字圏の名字事情(1) http://www.taishukan[...] 大修館書店 2020-12-04
[4] 웹사이트 中国信息报 2022年11月11日 2版 - “百家姓”规模及其占全国总人数比重 http://www.zgxxb.com[...] 中国信息报 2023-02-11
[5] 웹사이트 “百家姓”人口占全国人口比重达84.55% http://www.zgxxb.com[...] 2023-02-11
[6] 웹사이트 大姓区域分布研究 http://www.nciic.com[...] 全国公民身分証号碼査詢服務中心 2023-01-18
[7] 웹사이트 全國姓名統計分析 https://www.ris.gov.[...] 中華民国内政部 2023-01-18
[8] 문서 琅邪・太原の王氏の如きは則ち周霊王の太子晋という。 中華書局 1995
[9] 문서 鄭樵は直諫して廃されたとしている。
[10] 문서 鄭 1995
[11] 문서 汲郡の王氏は則ち王子比干の後という
[12] 문서 鄭樵『通志』氏族略第四
[13] 문서 新唐書
[14] 문서 晉書/卷033 http://zh.wikisource[...]
[15] 뉴스 古代中国文化の日本における伝播と変容 https://www.mofa.go.[...] 日中歴史共同研究 2010
[16] 서적 백제의 주민과 이주 여성 한국여성사학회 2017
[17] 뉴스 한국 고대사회 外來人의 존재양태와 사회적 역할 https://cms.dankook.[...] 檀国大学校|檀國大學東洋學硏究院 2017-07
[18] 웹사이트 KOSIS https://kosis.kr/sta[...] 2022-11-24
[19] 문서 韓国時代劇にとことんハマる!歴史と人物の真実 学研パブリッシング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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