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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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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왜도는 조선시대 십팔기 또는 이십사반 무예의 하나로, 보졸이 일본도를 사용하여 펼치는 무예를 의미한다. 명나라에서는 왜구의 일본도 사용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도를 도입하고, 척계광은 이를 활용한 다양한 전술을 개발했다. 명나라 군대는 왜도와 왜도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군사적 효과를 거두었지만, 명나라 말기에는 장도 사용법이 사라졌다. 조선에서도 왜도를 십팔기 또는 이십사반 무예에 포함시켰으며, 일본도를 무기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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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도
지도 정보
명칭
한자倭刀
한국어왜도
로마자 표기wodao
일본어わとう (와토)
기본 정보
종류
사용 시기명나라
길이약 25.5cm (칼날)
약 80cm (전체)
특징일본도에서 유래
길고 날카로운 칼날
양손으로 사용
역사
기원일본도
명나라 도입명나라 시기,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일본도를 연구하여 개량
특징적 사용척계광이 개발한 원앙진에 사용
문화
언급신정우보(新訂武備志)에 기록됨
관련 인물척계광
추근
현재추근의 왜도가 현재 저장성 샤오싱에 보존

2. 명나라의 왜도 도입과 활용

송나라 때부터 무역을 통해 중국에 일본도가 전해졌다. 명나라에서는 왜구화승총과 함께 대도(大太刀)와 장권을 사용하면서 일본도가 무기로서 인정받게 되었다.[4][5] 명나라 조정의 군기국에서도 왜도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명나라에 수입되거나 중국에서 제작된 일본도 양식의 중국도는 장도(長刀), 요도(腰刀), 단도(短刀)로 분류되었다.[6] 장도는 대도, 요도는 3척 전후 길이었으며, 단도의 길이는 명확하지 않다.[6] 나기나타(薙刀)도 일본에서 수입되어 사용되었다.[6]

명나라 말기에는 군대에서 왜도가 여전히 사용되었지만, 장도 사용법은 사라졌고, 짧고 무거운 왜도는 폐기되거나 개조되었다.[6]

2. 1. 왜구의 위협과 척계광의 등장

송대부터 일본도는 무역을 통해 중국에 전해졌으며, 대 초에는 명나라 조정의 군기국에서 왜도(倭刀)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일본도가 무기로 인정받게 된 것은 왜구화승총과 함께 대도(大太刀)와 장권을 무기로 사용했기 때문이다.[4][5] 왜구의 일본도는 명나라 군대의 장병기의 자루를 잘라버릴 정도였기에 화승총보다 더 두려워했다.[4]

왜구로 인해 명나라 군대가 궤멸당하자 이를 재건하고 격퇴한 장수 척계광(1528년~1587년)은 왜구 토벌 전투 중에 일본 음류검술의 것으로 추정되는 ‘영류목록’(影流目録) 단편을 얻었다. 척계광은 "원앙진”(鴛鴦陣)이나 “삼재진”(三才陣)과 같은 전투 대형으로 왜구를 격퇴했다.[7]

“원앙진”은 두 개의 방패를 앞세운 2열 종대이다.[7] 먼저 긴 방패인 “장패”(長牌)와 요도, 가벼운 방패인 “등패”(藤牌)와 요도, 표창(鏢槍, 투창)을 장비한 병사들이 정면 공격을 막는다.[7] 등패병은 표창을 투척하고, 적에게 틈이 생긴 순간 요도를 뽑아 베어 든다.[6] 방패 근처까지 접근한 적에게는 2층의 병사들이 대나무 잎을 엮어 만든 창인 “랑선”(狼筅)으로 일본도나 창의 공격을 막거나, 몸에 내리쳐 상대의 전투력을 떨어뜨린다. 다음으로 3, 4층의 병사들이 장창을 꺼낸다.[7] 화약을 다루는 단병(短兵)은 5층에 위치하여 접근하는 적에게 화약을 쏜다.[7] 이 공격으로 왜구의 조직적인 전진을 방해했다.

“삼재진”은 대장, 장패병, 등패병 3명을 정면에, 그 좌우에 랑선병, 장창병을 배치하여 만든 횡대로, 먼저 화약으로 적의 대열을 무너뜨리고, 이어서 접근한 왜구의 공격을 대장의 좌우 랑선병이 방해한다. 그리고 이를 방패 삼아 장창병이 공격했다. 이 진형에서는 단병은 후방에 위치하여 화약으로 지원했다.[7]

척계광은 원앙진과 삼재진을 농민이나 광부 출신 병사들에게 철저하게 훈련시킴으로써, 왜구 토벌전에서 최강의 군단을 만들었다.[7] 또한, 왜구 토벌전에서 왜구로부터 얻은 화승총을 장비한 병사에게 왜도를 장비시키고,[4] 왜도를 장비한 화승총병을 포함한 부대를 운용하는 법을 연구했다.

2. 2. 척계광의 왜도 도입과 전술 개발

명나라 군대는 왜구로 인해 궤멸되었는데, 이를 재건하고 격퇴한 장수 척계광은 왜구 토벌 전투 중에 '영류목록'(影流目録)이라는 일본 음류 검술 관련 단편을 얻었다. 이 목록은 척계광이 저술한 '신유도법'(辛酉刀法)과 모원의의 '무비지'에 수록되었다.[4][5]

척계광은 왜구의 일본도가 가볍고 빠르며 전후좌우로 움직여 접근하기 어렵고, 창으로 찌르려 해도 자루째 잘라버린다는 점을 파악했다.

척계광은 "원앙진"(鴛鴦陣)이나 "삼재진"(三才陣)과 같은 전투 대형으로 왜구를 격퇴했다.[7]

"원앙진"은 두 개의 방패를 앞세운 2열 종대이다.[7] 긴 방패인 "장패"(長牌)와 요도, 가벼운 방패인 "등패"(藤牌)와 요도, 표창(투창)을 장비한 병사들이 정면 공격을 막는다.[7] 등패병은 표창을 던지고, 적에게 틈이 보이면 요도를 뽑아 공격한다.[6] 방패에 접근한 적에게는 2층 병사들이 대나무 창인 "랑선"(狼筅)으로 공격을 막거나 몸을 쳐서 전투력을 떨어뜨린다. 3, 4층 병사들은 장창을 사용하고,[7] 5층의 단병(短兵)은 화약과 접근전용 무기인 "도하"를 사용했다.[7]

"삼재진"은 대장, 장패병, 등패병 3명을 정면에, 좌우에 랑선병, 장창병을 배치한 횡대이다. 화약으로 적 대열을 무너뜨리고, 랑선병이 적의 공격을 방해하면 장창병이 공격한다. 단병은 후방에서 화약으로 지원했다.[7]

척계광은 원앙진과 삼재진을 농민, 광부 출신 병사들에게 철저히 훈련시켜 왜구 토벌전에서 최강의 군단을 만들었다.[7] 또한, 왜구에게서 얻은 화승총(조총)을 장비한 병사에게 왜도를 장비시키고,[4] 왜도를 장비한 조총병을 포함한 부대를 어떻게 운용할지 연구했다.

왜구 토벌전에서 완성된 소대 전술은 북방 국경 경비에도 적용되었다.[7] 남방에서 보조적이었던 "총"이 "대" 단위로 배치되었고, 곤봉에 화약 발사식 화승총을 장착한 "장병쾌창"(長柄快槍)이 배치되었다. 북방에서는 오장(伍長) 2명에게 조총이 장비되었다. 장병쾌창은 탄환 발사 후 긴 곤봉으로 백병전용 무기가 되므로 장창병 2명에게 장비되었다.[7]

북방의 대 편성은 1층에 등패병과 장패병, 2층에 랑선병, 3층에 도하병, 4층에 조총병(조총 발사 후 대도형 왜도인 장도로 바꿔 공격), 5층에 장병쾌창병이 배치되었다.[7][8] 남방의 왜구와의 보병전 전술은 북방에서 기병의 장비와 편성에도 도입되었다.[7]

대장 1명, 오장 2명이 조총과 양손 장도(대도형 왜도)를 장비했다.[7] 쾌창병 2명은 화기와 곤봉을 혼합한 "쾌창", 도하병 2명은 도하와 화약, 도곤병(刀棍兵) 2명은 활, 석궁, 도검, 곤봉, 대봉병(大棒兵) 2명은 활과 긴 곤봉인 "대봉"을 사용했다.[7] 화기 도입으로 "일격이탈전법"과 추격전이 가능한 기병 부대의 효과가 두드러졌고,[7] 알탄 칸, 토곤 칸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명나라 군대에서는 왜도 및 왜도술이 적극 도입되어 군사적 효과를 거두었다.[6]

2. 3. 북방 국경 경비에의 활용

왜구 토벌전에서 효과를 발휘한 왜도와 관련 전술은 북방의 국경 경비, 특히 기병과의 전투에 적용되어 효과를 보았다.[7] 남방에서 보조적인 역할이었던 화승총은 대(隊) 단위로 배치되었고, 곤봉에 화약 발사식 화승총을 결합한 "장병쾌창"이 활용되었다. 오장(伍長) 2명에게는 조총이 지급되었고, 장창병 2명은 탄환 발사 후 곤봉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장병쾌창을 사용했다.[7]

북방 대(隊) 편성은 1층에 등패병과 장패병, 2층에 랑선병을 배치했다.[7] 3층 도하병은 접근한 적병, 특히 기병을 타격하고 찔렀다.[7] 4층 조총병은 조총 발사 후 장도(대도형 왜도)로 적 기병의 다리를 쳤고,[7] 5층 장병쾌창병은 탄환 발사 후 적병을 타격했다.[7][8]

남방 왜구와의 보병전에서 발전된 소대 편성은 북방 기병의 장비와 편성에도 도입되었다.[7] 대장 1명, 오장 2명은 조총과 장도(대도형 왜도)를, 쾌창병 2명은 화기와 곤봉을 결합한 "쾌창"을 사용했다.[7] 도하병 2명은 도하로 접근전을, 화약으로 원거리 전투를 했다.[7] 도곤병(刀棍兵) 2명은 활이나 쇠뇌로 원거리 전투, 도검과 곤봉으로 접근전을 하는 전통적인 기병이었다.[7] 대봉병(大棒兵) 2명 역시 전통적인 기병으로, 활로 원거리 전투를, 긴 곤봉인 "대봉"으로 접근전을 수행했다.[7]

화기 도입은 "일격이탈전법"과 추격전이 가능한 기병 부대에 큰 효과를 가져왔다.[7] 그 결과, 알탄 칸, 토곤 칸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3. 조선의 왜도 수용과 영향

왜도는 십팔기 또는 이십사반 무예 가운데 하나로, 보졸(步卒)이 일본도를 사용하는 무예이다. 일본 고유의 방식으로 만들어져 단단하고 잘 드는 특성이 있으며, 예로부터 무기로 사용된 일본칼을 의미하기도 한다.

3. 1. 십팔기와 이십사반 무예

왜도는 십팔기 또는 이십사반 무예 가운데 하나로, 보졸(步卒)이 일본도를 사용하는 무예를 가리킨다. 왜도는 일본 고유의 방식으로 만들어져 단단하고 잘 드는 특성이 있으며, 예로부터 무기로 사용된 일본칼(일본도)을 의미하기도 한다.

3. 2. 한국 무예에 미친 영향

왜도는 십팔기(十八技) 또는 이십사반 무예(二十四般武藝) 중 하나로, 보졸(步卒)이 일본도(日本刀)를 사용하여 펼치는 무예이다.[1] 왜도는 일본 고유의 방식으로 제작된 칼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한데, 단단하고 예리하여 무기로 널리 사용된 일본칼(일본도)을 의미한다.[1]

참조

[1] 서적 Chinese Kung Fu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03-09
[2] 서적 Chinese Weapons and Armor Shinkigensha 1992-05-01
[3] 서적 The Complete Work on Strategic and Tactical Weapons. From Ancient China to Modern China Gakken 2011-07-02
[4] 서적 武器と防具 中国編 新紀元社
[5] 서적 対談 秘伝剣術 極意刀術 BABジャパン
[6] 서적 中国武術史 ― 先史時代から十九世紀中期まで 技藝社
[7] 서적 戦略戦術兵器大全 中国古代~近代編 学研
[8] 서적 戦闘技術の歴史5 東洋編 創元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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