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관 (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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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관은 전한 문제, 경제, 무제 시대를 거치며 활약한 인물로, 수레를 다루는 기술로 낭이 되어 문제의 신임을 얻어 중랑장으로 승진했다. 경제 시대에는 오초칠국의 난에서 공을 세워 중위가 되었고, 건릉후에 봉해졌다. 이후 태자태부, 어사대부, 승상을 역임했으나 무제 즉위 후 면직되었고, 건릉후로 봉해진 지 21년 만에 사망했다.
위관은 수레를 다루는 기술로 낭(郞)이 되어 문제를 섬겼으며, 공을 세워 중랑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근엄하고 신중하여 문제의 신임을 받았다.[2] 경제가 황태자 시절 문제의 측근들을 불러 연회를 열었을 때, 위관은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다. 문제는 죽으면서 경제에게 위관을 잘 대우하도록 부탁했다.[2]
(내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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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지금의 원수이현 부근. 본래 대릉은 태원군의 속현으로, 대나라의 봉토가 늘어나는 과정에서 편입되었다. 이후 대나라가 해체되면서 다시 태원으로 환원되었다. 태원군이 대나라에 속한 기간은 기원전 196년 ~ 기원전 180년, 기원전 176년 ~ 기원전 114년으로 위관의 생년은 이 중에 속할 것이다.
2. 생애
낭관 중에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면 위관은 그 죄를 가려주고, 다른 중랑장들과 공을 다투지 않고 항상 양보했다. 경제는 이를 보고 위관이 충성스럽고 다른 마음이 없다고 여겨 하간헌왕이 다스리는 하간국의 태부로 삼았다.[2][3]
경제 3년(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나자, 위관은 조서를 받아 장수가 되어 하간나라의 병력을 이끌고 오나라와 초나라를 진압하여 공을 세웠고, 중위가 되었다.[2][3] 경제 6년(기원전 151년)에는 군공으로 건릉후에 봉해졌다.[2]
경제 7년(기원전 150년), 경제가 율태자를 폐하고 외척 율경(栗卿) 일족을 주살하려 할 때, 성품이 어진 위관이 차마 보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집으로 돌려보내고, 혹리인 제남 태수 질도를 중위로 삼아 율씨들을 사로잡게 했다.[2][3] 이후 교동왕 유철을 새 태자로 세우면서 위관은 태자태부가 되었다.[2]
경제 중3년(기원전 147년) 유사를 대신해 어사대부가 되었고, 경제 후원년(기원전 143년) 유사가 면직되자 그를 대신해 승상이 되었다.[2][3] 위관은 승상이 되어서도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있던 것을 폐지하는 일 없이, 신중하고 돈후한 성품으로 어린 황제를 보좌하여 경제의 총애를 받으며 많은 상을 받았다.[2]
무제가 황제가 된 후, 경제가 병들었을 때 승상으로서 무고한 죄인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건원 원년(기원전 140년)에 면직되었다.[2][3] 건릉후에 봉해진 지 21년 만에 죽어 시호를 경(敬)[4] 또는 애(哀)[5]라 하고 아들 위신이 후작을 계승했다.[4][5]
2. 1. 초기 생애와 문제와의 인연
위관은 수레를 다루는 기술로 낭(郞)이 되어 문제를 섬겼으며, 공을 세워 중랑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근엄하고 신중하여 문제의 신임을 받았다.[2] 경제가 황태자 시절 문제의 측근들을 불러 연회를 열었을 때, 위관은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다. 문제는 죽으면서 경제에게 위관을 잘 대우하도록 부탁했다.[2]
낭관 중에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면 위관은 그 죄를 가려주고, 다른 중랑장들과 공을 다투지 않고 항상 양보했다. 경제는 이를 보고 위관이 충성스럽고 다른 마음이 없다고 여겨 하간헌왕이 다스리는 하간국의 태부로 삼았다.[2][3]
2. 2. 경제 시대의 활약
위관은 수레를 다루는 기술로 낭(郞)이 되어 문제(文帝)를 섬겼으며, 공을 세워 중랑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근엄하고 사악한 마음이 전혀 없어 문제의 신임을 받았다.[2]
황태자(후의 경제(景帝))가 문제의 측근들을 불러 연회를 열었을 때, 위관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문제는 세상을 떠나면서 경제에게 위관을 잘 대해주도록 유언했다.[2]
낭관 중에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면 그 죄를 가려주고, 다른 중랑장들과 공을 다투지 않고 항상 양보했다. 경제는 이를 보고 충성스럽고 다른 마음이 없다고 여겨 하간나라 (하간헌왕)의 태부로 삼았다.[2][3]
경제 3년(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나자 조서를 받아 장수가 돼 하간나라의 병을 거느리고 오나라·초나라와 싸워 공을 세웠고, 중위가 됐다.[2][3] 경제 6년(기원전 151년)에는 군공으로 건릉후에 봉해졌다.[2]
경제 7년(기원전 150년), 경제가 율태자를 폐하고 외척 율경(栗卿) 일족을 주살하려는데, 성품이 어진 위관이 이를 차마 보지 못할 것 같아 집으로 돌려보내고 혹리인 제남태수 질도를 중위로 삼아[3] 율씨들을 사로잡게 했다.[2] 일이 끝나고 교동왕 유철을 새 태자로 세우면서 위관은 태자태부가 됐다.[2]
2. 3. 승상 재임과 말년
경제 중3년(기원전 147년) 승상으로 승진한 도후 유사를 대신해 어사대부가 되었고, 경제 후원년(기원전 143년) 면직된 유사를 대신해 승상이 되었다.[2][3] 궁에 들어왔을 때부터 승상이 되고 나서도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있던 것을 폐하거나 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나, 문제는 위관이 돈후해 어린 황제의 재상이 될 만하다고 여기고 총애하며 많은 상을 내렸다.[2]
무제가 황제가 되자, 경제가 병들었을 때 승상으로서 무고한 죄인 맡은 일을 바로 수행하지 못했다 하여[2] 건원 원년(기원전 140년)에 면직되었다.[3] 건릉후로 봉해진 지 21년 만에 죽어 시호를 경(敬)[4] 또는 애(哀)[5]라 하고 아들 위신이 후작을 계승했다.[4][5]
3. 평가
참조
[2]
서적
한서
[3]
서적
위와 같음
[4]
서적
사기 (역사서)
[5]
서적
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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