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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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무주는 수나라 말기에 활동한 인물로, 하간(河間) 출신이다. 그는 용맹하고 활쏘기에 능했으며, 617년 태수 왕인공을 살해하고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태수를 칭했다. 이후 돌궐과 연합하여 세력을 확장, 정양가한으로 책봉되었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한(漢)을 건국했다.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돌궐로 도주했으나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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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무주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유무주 | 
| 칭호 | 황제 | 
| 왕조 | 정양 | 
| 재위 기간 | 617년 - 621년 | 
| 수도 | 마읍 | 
| 휘 | 유무주 | 
| 자 | 없음 | 
| 시호 | 없음 | 
| 묘호 | 없음 | 
| 출생 | 무평 4년 (573년) | 
| 사망 | 무덕 4년 7월 17일 (622년 8월 28일) | 
| 아버지 | 유광 | 
| 어머니 | 조씨 | 
| 황후 | 저황후 | 
| 능묘 | 없음 | 
| 연호 | 천흥 : 617년 - 620년 | 
2. 생애
유무주는 용맹하고 활을 잘 쏘는 호방한 성격으로, 여러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 이후 뤄양으로 가 태복 양의신에게 의탁했다. 612년에서 614년 사이, 세 번째 고구려 원정군에 지원하여 군공을 세워 건절교위가 되었다가 마읍으로 옮겨 응양부교위가 되었다.
617년(대업 13년), 태수 왕인공의 시녀와 사통하다가 죄를 받을까 두려워, 고을 호걸 장만세, 양복염, 원군장, 울지공과 함께 왕인공을 살해했다. 군사를 일으켜 고을을 장악하고 스스로 태수를 칭하며 창고를 열어 고을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눠주었다.
이후 돌궐과 손잡고 안문, 누번, 정양 등 여러 군을 공격했다. 조정에서는 호분장군 왕지변과 안문군의 군승 진효의에게 연합하여 유무주를 토벌하게 했다. 궁지에 몰린 유무주는 돌궐에 지원을 요청했고, 왕지변은 패하여 죽고 진효의는 안문으로 퇴각했다. 유무주는 누번군을 함락시키고 양제의 별궁인 분양궁(汾陽宮)을 점령, 사로잡은 여인들은 돌궐군에게 넘겼다.
세력이 강성해진 유무주는 정양을 함락시키고 안문으로 돌아왔다. 돌궐은 그를 정양가한(定楊可汗)에 책봉했고, 유무주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한(漢), 연호를 천흥(天興)이라 하였다.
송금강이 두건덕을 공격하다 패하여 남은 무리를 이끌고 의탁해오자, 유무주는 그를 송왕(宋王)으로 봉했다. 619년(무덕 2년) 3월, 남하하여 병주 황사령(黃蛇嶺)에 주둔했는데, 병주총관 이원길과 거기장군 장달이 맞섰으나 유무주의 군사는 전멸하여 패했다.
같은 해 5월, 다시 평요를 함락하고 6월에는 송금강에게 3만 군사로 태원과 개주를 공격하게 했다. 당 고조는 우복야 배적을 진주도 행군총관으로 임명하여 강보의와 양쪽에서 공격하게 했으나 크게 패하여 강보의는 전사하고 배적은 진주로 달아났다.
10월에는 하현 사람 여숭무, 포판의 왕행본 등이 유무주에게 호응하여 호주 등 산서 지역 대부분이 유무주의 세력으로 들어갔다. 관중 지방이 위태롭게 되자 당 고조는 진왕 이세민에게 출정하게 하였다.
620년(무덕 3년), 송금강의 군사들이 양식이 떨어져 물러나려 하자 이세민은 여주, 고벽령, 작서곡까지 추격하며 하루에 여덟 번 싸워 모두 이겼다.
개휴에서 울지공이 이세민에게 항복하자 유무주는 병주를 버리고 북쪽 돌궐로 달아났으나 살해당했다.[2]
2. 1. 초기 생애 및 배경
유무주는 하간 경성(景城) 출신으로, 마읍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용맹하고 활쏘기에 능했으며, 호방한 성격으로 여러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 이후 뤄양으로 가서 태복(太伏) 양의신(楊義臣)에게 의탁하였다.612년(대업 8년)부터 614년(대업 10년) 사이에 수나라가 세 번째 고구려 원정을 위해 군사를 모집할 때, 유무주는 원정군에 지원하여 군공을 세워 건절교위(建節校尉)가 되었다. 이후 마읍으로 옮겨 응양부교위(鷹揚府校尉)가 되었다.
617년(대업 13년), 유무주는 태수 왕인공(王仁恭)의 시녀와 사통하였다가 죄를 받을까 두려워, 고을 호걸 장만세(張万歲), 양복염(楊伏念), 원군장(苑君璋), 울지공(尉迟恭)과 함께 왕인공을 살해하였다. 군사를 일으켜 고을을 장악한 뒤 스스로 태수를 칭하고 창고를 열어 고을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유무주의 가문은 원래 하간군(대략 현대의 바오딩, 허베이성)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유광(劉匡)은 오마이(현대의 수저우, 산시성)로 이주했다. 유무주는 강인함과 궁술 실력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의 형 유산백(劉山伯)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자주 그를 꾸짖으며 "너는 친구를 조심하지 않으니, 언젠가 우리 가문을 망칠 것이다."라고 말했다.[2]
무주는 기사에 능했고, 호걸들과 교류했다. 형 유산백은 "너는 어울리는 상대를 가리지 않으면 우리 일족을 멸망시킬 것이다."라고 무주를 비난했다. 무주는 뤄양에 머물렀고, 수나라 태복 양의신 휘하에 들어갔다. 고구려 원정에 참전하여 공을 세워 건절교위에 임명되었다. 마읍으로 돌아오자 응양부교위가 되었다. 마읍군 태수 왕인공에게 중용되었지만, 왕인공의 시녀와의 밀통이 발각될까 두려워한 무주는 "아버지와 어른들, 처자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고통받고, 시신이 흩어져 있는데, 왕부군은 관창을 닫고 백성을 구하려 하지 않으니, 이것이 무슨 이치인가?"라고 마읍군 전체에 선언하고, 민중의 분노를 선동하여 617년에 장만세 등과 함께 왕인공을 베고, 관창을 열어 식량을 나누어 주었으며, 마읍군의 속현에 격문을 보내 병사 1만 명 이상을 얻어 마읍군 태수를 자칭하고 돌궐에 사신을 보내 종속되었다.
2. 2. 수나라 관직 생활
612년부터 614년 사이에 수나라가 세 번째 고구려 원정을 위해 군사를 모집할 때, 유무주는 원정군에 지원하여 군공을 세워 건절교위가 되었다. 이후 마읍으로 옮겨 응양부교위가 되었다.[1]617년, 유무주는 태수 왕인공의 시녀와 사통한 죄로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장만세, 양복념, 원군장, 울지공 등과 함께 왕인공을 살해하였다. 이후 군사를 일으켜 고을을 장악하고 스스로 태수를 칭하며,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1]
2. 3. 반란과 세력 확장
유무주는 용맹하고 활을 잘 쏘는 호방한 성격으로, 여러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 이후 낙양으로 가 태복 양의신에게 의탁했다. 612년에서 614년 사이, 세 번째 고구려 원정군에 지원하여 군공을 세워 건절교위가 되었다가 마읍으로 옮겨 응양부교위가 되었다.617년(대업 13년), 태수 왕인공의 시녀와 사통하다가 죄를 받을까 두려워, 고을 호걸 장만세, 양복염, 원군장, 울지공과 함께 왕인공을 살해했다. 군사를 일으켜 고을을 장악하고 스스로 태수를 칭하며 창고를 열어 고을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눠주었다.
이후 돌궐과 손잡고 안문, 누번, 정양 등 여러 군을 공격했다. 조정에서는 호분장군 왕지변과 안문군의 군승 진효의에게 연합하여 유무주를 토벌하게 했다. 궁지에 몰린 유무주는 돌궐에 지원을 요청했고, 왕지변은 패하여 죽고 진효의는 안문으로 퇴각했다. 유무주는 누번군을 함락시키고 양제의 별궁인 분양궁을 점령, 사로잡은 여인들은 돌궐군에게 넘겼다.
세력이 강성해진 유무주는 정양을 함락시키고 안문으로 돌아왔다. 돌궐은 그를 정양가한에 책봉했고, 유무주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한(漢), 연호를 천흥(天興)이라 하였다.
송금강이 두건덕을 공격하다 패하여 남은 무리를 이끌고 의탁해오자, 유무주는 그를 송왕(宋王)으로 봉했다. 619년(무덕 2년) 3월, 남하하여 병주 황사령에 주둔했는데, 병주총관 이원길과 거기장군 장달이 맞섰으나 유무주의 군사는 전멸하여 패했다.
같은 해 5월, 다시 평요를 함락하고 6월에는 송금강에게 3만 군사로 태원과 개주를 공격하게 했다. 당 고조는 우복야 배적을 진주도 행군총관으로 임명하여 강보의와 양쪽에서 공격하게 했으나 크게 패하여 강보의는 전사하고 배적은 진주로 달아났다.
10월에는 하현 사람 여숭무, 포판의 왕행본 등이 유무주에게 호응하여 호주 등 산서 지역 대부분이 유무주의 세력으로 들어갔다. 관중 지방이 위태롭게 되자 당 고조는 진왕 이세민에게 출정하게 하였다.
11월, 이세민이 용문관과 백벽에 진을 치고 유무주를 살폈다. 620년(무덕 3년), 송금강의 군사들이 양식이 떨어져 물러나려 하자 이세민은 여주, 고벽령, 작서곡까지 추격하며 하루에 여덟 번 싸워 모두 이겼다.
개휴에서 울지공이 이세민에게 항복하자 유무주는 병주를 버리고 북쪽 돌궐로 달아났으나 살해당했다.[2] 유무주가 남하할 때 원군장이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고, 유무주가 패하자 원군장은 "공이 나의 말을 듣지 않아 여기에 이르렀구나" 하며 울었다.
2. 4. 황제 즉위와 돌궐과의 관계
유무주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한(漢), 연호를 천흥(天興)이라 하였다.[2] 돌궐은 그를 정양가한(定楊可汗)에 책봉하였다. 아내 주씨 부인을 황후로 삼았다.619년 봄, 돌궐의 아시나 도지시는 중국 영토를 침략할 계획을 세웠으나, 아시나 도지시가 곧 사망했고, 돌궐은 군사 작전을 포기했다. 송금강이 두건덕에게 패하여 의탁해오자 유무주는 그를 송왕(宋王)으로 봉했다.
619년(무덕 2년) 3월 유무주는 남하하여 병주 황사령(黃蛇嶺)에 주둔하였는데, 병주총관 이원길과 거기장군(車騎將軍) 장달(張達)이 이에 맞섰으나 유무주의 군사는 전멸하여 패했다. 같은 해 5월에 다시 평요(平遙)를 함락하고 6월에는 송금강에게 3만의 군사로 태원(太原)과 개주(介州)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당 고조는 우복야(右僕射) 배적(裴寂)을 진주도 행군총관(晉州道 行軍總管)으로 임명하여 강보의(姜寶誼)와 양쪽에서 공격하게 하였으나 크게 패하여 강보의는 전사하고 배적은 진주로 달아났다.
10월에는 하현(夏縣)사람 여숭무(吕崇茂), 포판(蒲坂)의 왕행본(王行本) 등이 유무주에게 호응하여 호주(浩州) 등 산서(山西) 지역 대부분이 유무주의 세력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관중 지방이 위태롭게 되었다. 이에 당 고조는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에게 출정하게 하였다.
620년(무덕 3년) 송금강의 군사들이 양식이 떨어져 물러나려 하자 이세민은 군사를 이끌고 여주(呂州), 고벽령(高壁嶺), 작서곡(雀鼠谷)에 이르기까지 추격하며 하루에 여덟 번 싸워 모두 이겼다. 개휴(介休)에서 위지공이 이세민에게 항복하자 유무주는 병주를 버리고 북쪽의 돌궐로 달아났으나 살해당했다.
2. 5. 당나라와의 전쟁
619년 늦봄, 유무주는 동돌궐의 지원을 받아 당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 당 고조의 아들 이원길이 지키고 있던 태원(太原)으로 진격했다. 이원길은 장군 장달을 보냈으나, 소규모 병력만 주어져 패배했다. 분노한 장달은 유무주에게 항복하여 유차(榆次, 현재의 진중시, 산시성)를 점령하도록 이끌었다. 유무주는 곧 석주(石州, 대략 현재의 여량시, 산시성)와 개주(介州, 현대 진중의 일부)를 점령하고 태원을 포위했다.같은 시기, 두건덕에게 패배하고 도망쳐 온 농민 반란 지도자 송금강이 유무주에게 의탁했다. 유무주는 송금강을 송왕(宋王)으로 봉하고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시켰다. 송금강은 유무주에게 먼저 병주(并州, 즉 태원)를 점령한 후 남쪽으로 공격하여 더 많은 영토를 점령해야 한다고 제안했다.[1]
연이은 패배에 당 고조는 배기에게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주어 유무주와 맞서 싸우게 했다. 배기는 가을에 개주에 도착하여 수도 개휴(介休)를 포위했으나, 송금강이 물 공급을 차단하여 당나라 군대는 패배했다.[2] 유무주는 다시 태원으로 진격했고, 이원길은 태원을 버리고 도망쳤다. 유무주는 곧 수도를 마읍에서 태원으로 옮겼고, 송금강은 진(晉州)과 회(澮州, 함께 대략 현대의 린펀시, 산시성)까지 점령했다.[3]
이에 당 고조는 이세민(후일의 태종)에게 군대를 맡겨 유무주를 공격하게 했다. 이세민은 황하를 건너 송금강을 지치게 만들려고 했다. 한편, 당나라 군대는 유무주의 동맹인 여숭무(呂崇茂)를 공격했고, 여숭무의 요청으로 송금강은 울지공과 순상(尋相)을 보내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장수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울지공과 순상은 이세민에게 패배했고, 왕행본(王行本)은 항복해야 했다. 620년 봄, 유무주는 당나라의 루주(潞州, 대략 현대의 창즈시, 산시성)를 공격했으나, 수도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620년 여름, 이세민은 송금강의 군대가 지쳤다고 판단하고 반격을 시작하여 순상을 격파하고 퀘수 협곡(雀鼠谷, 현대 진중)에서 송금강과 교전하여 8번이나 격파했다. 울지공과 순상은 항복했다. 유무주는 송금강의 패배 소식을 듣고 태원을 버리고 동돌궐로 도주했다. 송금강은 다시 당나라와 싸우려 했으나 군대를 모을 수 없어 동돌궐로 도주했다.
622년 8월, 유무주는 동돌궐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 매이에 돌아와 재건하려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2. 6. 최후
620년 (무덕 3년) 송금강의 군사들이 양식이 떨어져 물러나려 하자 이세민은 군사를 이끌고 여주(呂州), 고벽령(高壁嶺), 작서곡(雀鼠谷)에 이르기까지 추격하며 하루에 여덟 번 싸워 모두 이겼다.개휴(介休)에서 위지공이 이세민에게 항복하자 유무주는 병주를 버리고 북쪽의 돌궐로 달아났으나 살해당했다. 유무주는 이연을 '당주(唐主)'라 칭하며, "한개의 고을을 기반삼아 무리를 이끌고 장안으로 향하는 동안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아 장안을 취했으니 이것은 그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늘이 내려주신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진양(晉陽) 이남은 요새이니 군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한다면 공께서 세력을 보존하며 싸우시는데엔 어려움이 없을것"이며, "북쪽의 돌궐과 힘을 합치고 남쪽의 당나라를 평정하는 것이 제위에 오르실수있는 좋은 계책"이라고 진언한 원군장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 이후 유무주가 패하게 되자 원군장은 "공이 나의 말을 듣지 않아 여기에 이르렀구나"하며 울었다.
622년 8월, 유무주는 동돌궐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 매이에 돌아와 재건하려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3. 주요 인물
유무주는 유광과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는 유광, 어머니는 조부인이다.[1] 부인은 쥐 황후(617년 책봉)이다.[1]
4. 주요 사건
유무주는 619년 늦봄, 동돌궐의 지원을 받아 당나라를 공격했다. 그해 여름, 이원길이 지키던 태원(太原)을 공격했으나, 장달이 이끄는 소규모 당나라 군대에 패했다. 장달은 유무주에게 항복하고 위차를 점령하도록 도왔다. 유무주는 태원을 포위하고, 석주와 개주를 점령했으며, 그의 장군 황자영은 당나라 장군 강보의와 이중문을 사로잡았다.
이때, 농민 반란 지도자 송금강이 유무주를 지원했다. 송금강은 태원을 점령한 후 남쪽으로 진격할 것을 제안했다.
당 고조는 배기를 보내 유무주에 맞섰으나, 배기는 송금강에게 물 공급을 차단당해 패했다. 유무주는 태원으로 돌아왔고, 이원길은 도주했다. 유무주는 수도를 마읍에서 태원으로 옮겼고, 송금강은 진(晉州)과 회(澮州)를 점령했다.
당 고조는 이세민에게 군대를 맡겨 유무주를 막게 했다. 이세민은 황하를 건너 송금강을 지치게 하는 전략을 썼다. 한편, 당나라 군대는 유무주의 동맹인 여숭모를 공격했고, 송금강은 울지공과 순상을 보내 이들을 지원했으나, 이세민에게 패했다. 620년 봄, 유무주는 루주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황자영이 보급로를 지키다 당나라 장군 장덕정에게 전사하자, 이세민은 반격하여 송금강을 격파했다. 울지공과 순상은 항복했다. 유무주는 태원을 버리고 동돌궐로 도주했고, 송금강도 뒤따랐다. 622년, 유무주는 동돌궐의 명령을 어기고 재기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2]
4. 1. [[백벽전투]](柏壁之戰)
백벽전투는 당나라 건국 과정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 중 하나이다.5. 관련 기록
참조
[1] 
서적
 
Emperor Gaozu's biography in ''Old Book of Tang''
 
[2] 
문서
 
Other than this instance, however, there was not another historical reference to Liu referring to himself or being referred to as "emperor"; all further instances referred to him as using either the title of khan or ''[[Emperor of China|tianzi]]'', an alternative form of the title of emperor.
 
[3] 
서적
 
《新唐書‧卷一‧本紀第一‧高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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