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 (안성효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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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사(劉賜)는 후한 시대의 인물로, 어려서 고아가 된 후 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객을 고용하여 보복하고 은거하다 사면되었다. 유인이 거병하자 종군하여 경시제가 황제가 되자 광록훈, 대사도 등을 역임했다. 경시제가 죽은 후에는 광무제를 추천하여 대사마로 임명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후 완왕에 봉해졌다. 경시제가 적미군에게 패배한 후 광무제에게 투항하여 신후에 봉해졌고, 안성후로 진봉된 후 건무 28년에 사망했다.
유사는 어려서 고아가 되었고, 형이 살해당하자 조카와 함께 복수하고 도망쳤다가 사면받았다. 유인이 거병하자 그를 따라 종군했다. 경시 원년(23년) 유현이 황제로 즉위하자 광록훈이 되고 광한후에 봉해졌으며, 유인이 죽은 후에는 대사도가 되었다. 여남에서 황제를 자칭한 유망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경시제가 하북을 치려 할 때 유수를 추천했고, 광무제가 대사마가 되어 황하를 건너 원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승상이 되어 장안으로 가 경시제를 맞이했다. 경시제는 장안으로 천도한 후 유사를 완왕으로 봉하고 전대사마에 임명해 관동을 맡겼다. 경시 2년(24년), 봉국 완으로 가서 6부병을 관할했다.
범엽의 《후한서》 권14 종실삼왕사후전에 실려있다.
[1]
서적
後漢書
2. 생애
같은 해, 경시제가 적미군에게 격파되자, 6부병도 유사를 배반하고 흩어져 달아나, 완을 떠나 남양군 육양현을 지켰다.
2. 1. 초기 생애와 경시제 섬김
어려서 고아가 되었고, 형 유현이 원수를 갚고자 사람을 죽이니 관리가 유현을 체포해 죽였다. 이에 유현의 아들 유신과 함께 밭과 집을 팔아서 자객을 사서 관리에게 보복하고, 함께 달아나 숨어 지내다 사면되었다.[1][2] 유인이 거병하자 종군했다.
경시 원년(23년), 유인이 가담한 녹림군에서 유현을 황제로 세우니, 광록훈이 되고 광한후에 봉해졌다. 경시제가 유인을 질시해 죽인 후 유인 대신 대사도가 되었다. 이때 여남에는 유망이 황제를 자칭하고 있어 경시제의 명령으로 공격했으나, 유망의 장수 장우와 진무에게 격파되었다. 경시제는 유신을 분위대장군(奮威大將軍)으로 삼아 유사를 대신하여 유망을 공격하게 했고, 유사는 자신과 함께 낙양으로 돌아오게 했다.
경시제가 가까운 장수로 하북을 치려 하자, 유인의 동생 유수를 추천했다. 유인 모살의 주모자인 주유 등이 반대했고 경시제도 의심을 했으나, 유사가 강력하게 권해 광무제는 대사마가 되고 절을 지녀[지절(持節)] 황하를 건너 원정했다. 그리고 유사는 승상이 돼 먼저 장안으로 가 종묘와 궁실을 수리하고 경시제를 장안으로 맞이했다.
2. 2. 광무제에게 투항
광무제가 즉위하자, 서쪽 무관으로 가서 경시제의 처자를 맞이하고, 낙양으로 가서 광무제에게 투항했다. 광무제는 그의 충성심을 기뻐하여 건무 2년(26년) 신후(愼侯)에 봉했고, 건무 13년(37년)에는 안성후로 봉했다.[3] 건무 28년(52년)에 죽어 아들 유민이 뒤를 이었다.[3]
2. 3. 사망
건무 28년(52년)에 죽어 아들 유민이 뒤를 이었다.
3. 평가
참조
[2]
서적
続漢書
[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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