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갱알후)
1. 개요
유신은 전한 고조 유방을 따라 종군하여 한왕 신을 쳐 중랑장에 임명되었으며, 유방의 형수의 행태를 비꼬아 '국그릇을 긁는'다는 뜻의 갱알열후에 봉해졌다. 고조는 젊은 시절 형수에게 겪었던 불쾌한 경험을 떠올려 유신의 작위를 통해 복수했다는 해석이 있으며, 갱힐이라는 지명이 존재했기 때문에 작위를 받았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이후 고황후 원년에 죄를 지어 관내후로 강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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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신도가
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무관 출신으로, 항우와의 싸움과 영포의 난에 참여하고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청렴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조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하여 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사마천
사마천은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 천문학자, 역법가로서 중국 최초의 통사로 평가받는 『사기』를 저술하여 기전체를 확립하고 역사 서술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릉 변호 사건으로 궁형을 받는 고난을 겪었으며 태초력 제정에도 참여하는 등 천문학과 역법에도 업적을 남겼다. -
전한의 왕자후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전한의 왕자후 -
유내시 (동양경후)
유내시는 아버지 유종의 뒤를 이어 동양경후 작위를 받았으며, 시호는 경, 아들은 유봉친이다.
2. 생애
유신은 태상황의 아들 유백의 아들로, 고제를 따라 종군하여 반란을 일으킨 한왕 신을 치고 중랑장에 임명되었다.
고제가 한량이었을 때, 때때로 빈객들을 데리고 형 유백의 집에 들렀다. 평소 고제를 미워하였던 유백의 아내, 즉 유방의 형수는 어느 날 일부러 솥을 긁는 소리를 내어 집에 음식이 없는 척하였고, 소리를 들은 빈객들은 자리를 떴다. 나중에 고제가 국이 담긴 솥을 열어 보니, 국이 들어 있었다. 전한 건국 후, 고제는 친족들에게 작위를 내려주었으나, 형수가 자신에게 했던 일을 기억하여 유신에게만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유태공이 이를 상기시키니, 고제는 유신을 갱알열후(羹頡侯)에 봉하였다. '갱알'은 국그릇을 긁는다는 뜻으로, 형수의 행태를 비꼰 것이었다. 이는 고제 7년(기원전 201년) 10월의 일이었다.
기원전 187년 (고황후 원년), 유신은 죄를 지어 관내후로 강등되었다.
2.1. 초기 생애와 갱힐후 책봉
유신은 태상황의 아들 유백의 아들로, 고제를 따라 종군하여 반란을 일으킨 한왕 신을 치고 낭중장에 임명되었다.
고제가 한량이었을 때, 때때로 빈객들을 데리고 형 유백의 집에 들렀다. 평소 고제를 미워하였던 유백의 아내 즉 유방의 형수는 어느 날 일부러 솥을 긁는 소리를 내어 집에 음식이 없는 척하였고, 소리를 들은 빈객들은 자리를 떴다. 나중에 고제가 국이 담긴 솥을 열어 보니, 국이 들어 있었다. 전한 건국 후, 고제는 친족들에게 작위를 내려주었으나, 형수가 자신에게 했던 일을 기억하여 유신에게만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유태공이 이를 상기시키니, 고제는 유신을 갱알열후(羹頡侯)에 봉하였다. '갱알'은 국그릇을 긁는다는 뜻으로, 형수의 행태를 비꼰 것이었다. 이는 고제 7년(기원전 201년) 10월의 일이었다.
기원전 187년 (고황후 원년), 유신은 죄를 지어 관내후로 강등되었다.
2.2. 갱힐후 작위 박탈과 관내후 강등
고제를 따라 종군하였고, 반란을 일으킨 한왕 신을 쳐 낭중장(郞中將)에 임명되었다.
고제가 전한을 건국하고 친족들에게 작위를 내려줄 때, 형수가 과거 고제에게 했던 일 때문에 유신에게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태상황이 이를 상기시키자, 고제는 유신을 갱알후(羹頡侯)에 봉하였다. '갱알'은 국그릇을 긁는다는 뜻으로, 형수의 행태를 비꼰 것이었다. 이는 고제 7년(기원전 201년) 10월의 일이었다.
고후 원년(기원전 187년), 유신은 죄를 지어 관내후로 강등되었다.
3. 갱힐후 작위의 의미와 논쟁
유신이 한 고조로부터 받은 갱힐(羹颉)이라는 작호에 대해서, 흔히 유신의 어머니이자 유방의 형 유백의 아내, 즉 유방의 형수에게 젊은 시절 당했던 설움에 대한 유방의 복수라고 해석되곤 한다. 갱힐이란 '국솥 바닥을 긁는다'는 뜻으로, 유방이 젊어서 자주 빈객들을 데리고 유백의 집에 모이곤 하였는데, 평소 유방을 미워했던 형수는 일부러 솥 긁는 소리를 내어 집에 빈객들에게 대접할 국이 다 떨어졌다고 대놓고 드러내 보여 빈객들이 자리를 파하곤 하였다. 물론 유방이 나중에 확인해 보면 실제로는 국이 남아 있었다. 이를 잊지 않고 있던 유방이 형수의 아들에게 '국솥 바닥 긁는 제후'라는 다분히 모욕적인 작호를 주어서 그때 느낀 수치심에 대한 복수를 하였다는 것이다. 사마정 역시 갱힐은 현읍의 이름이 아니라고 하였다.
다만 갱힐이라는 지명이 있었기 때문에 갱힐후라는 작호를 준 것이지 형수에 대한 원망 같은 것은 아니었다고 하는 반론도 존재한다. 당대 《사기정의》를 편찬한 장수절/张守节중국어은 《사기》 및 사마정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형수에 대한 원한 때문에 갱힐후라는 작호를 준 것이라고 하면서도 '갱힐'은 갱힐산(羹颉山)이라는 지명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였다. 장수절의 주장에 대해 왕준관(王骏观)은 갱힐은 지명이 아닌 봉호이고 한 왕조는 산천의 이름을 따서 봉호를 짓지 않았으며 장수절의 말은 그냥 가져다 붙인 것이라고 하였다. 최적(崔適)은 도리어 갱힐산이라는 지명이 갱힐후라는 봉호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보았다.
유방(劉邦)이 패현(沛縣)에서 정장(亭長)을 하던 시절, 유방이 집에 친구들을 많이 데리고 왔는데, 형수(유신의 어머니)는 손에 들고 있던 냄비 바닥을 긁는 소리(갈)를 시끄럽게 내면서 아무것도 내놓지 않았다. 나중에 유방이 이 냄비 안을 보니 갱(羹:국)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유방이 초한전쟁에서 항우를 꺾고 황제가 되자, 일족과 공신들에게 작위와 영지를 내렸지만, 유백(劉伯)의 유일한 아들인 유신(劉信)에게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유태공(劉太公)이 유방에게 그의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유방은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않아도, 저는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의 어머니(앞서 말한 형수)는 어른스럽지 않으니, 작위도 영지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고조(高祖) 유방에게 미움을 받았던 유백의 유일한 아들 유신은 유방의 군대에 종군하여, 한왕 신과의 싸움에서는 중랑장이 되었고, 이후 유태공의 거듭된 청원이 효험을 보였는지, 기원전 200년에 유신에게도 작위가 주어졌지만, 그 칭호는 "갱갈후(羹頡侯)"였다. 갱갈(羹頡)은 갱이 든 냄비를 긁는다는 의미로, 과거 유백의 아내가 유방에게 했던 행위를 노골적으로 비꼬았다.
기원전 187년 (고후(高后) 여치 원년), 유신은 죄를 물어 관내후로 강등되었다.
3.1. '갱힐'의 의미와 유방의 의도
유신이 한 고조로부터 받은 갱힐(羹颉)이라는 작호는 '국솥 바닥을 긁는다'는 뜻으로, 유방이 형수에게 당했던 설움에 대한 복수라고 해석되곤 한다. 유방은 젊은 시절 자주 빈객들을 데리고 형 유백의 집에 모였는데, 형수는 유방을 미워하여 일부러 솥 긁는 소리를 내어 국이 떨어진 척하며 빈객들을 쫓아냈다. 유방은 이를 잊지 않고 형수의 아들 유신에게 모욕적인 작호를 내린 것이다. 사마정 역시 갱힐은 현읍의 이름이 아니라고 하였다.
다만, 갱힐이라는 지명이 있었기 때문에 갱힐후라는 작호를 준 것이지 형수에 대한 원망 때문은 아니었다는 반론도 있다. 장수절은 갱힐이 갱힐산(羹颉山)이라는 지명에서 따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왕준관은 한 왕조는 산천의 이름을 따서 봉호를 짓지 않았다고 반박했고, 최적은 도리어 갱힐산이라는 지명이 갱힐후라는 봉호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주장했다.
3.2. 갱힐 지명 존재 여부 논쟁
유신이 한 고조로부터 받은 갱힐(羹颉)이라는 작호에 대해, 흔히 유신의 어머니이자 유방의 형 유백의 아내, 즉 유방의 형수에게 젊은 시절 당했던 설움에 대한 유방의 복수라고 해석되곤 한다. 갱힐이란 '국솥 바닥을 긁는다'는 뜻으로, 유방이 젊어서 자주 빈객들을 데리고 유백의 집에 모이곤 하였는데, 평소 유방을 미워했던 형수는 일부러 솥 긁는 소리를 내어 집에 빈객들에게 대접할 국이 다 떨어졌다고 대놓고 드러내 보여 빈객들이 자리를 파하곤 하였다. 물론 유방이 나중에 확인해 보면 실제로는 국이 남아 있었다. 이를 잊지 않고 있던 유방이 형수의 아들에게 '국솥 바닥 긁는 제후'라는 다분히 모욕적인 작호를 주어서 그때 느낀 수치심에 대한 복수를 하였다는 것이다. 사마정 역시 갱힐은 현읍의 이름이 아니라고 하였다.
다만 갱힐이라는 지명이 있었기 때문에 갱힐후라는 작호를 준 것이지 형수에 대한 원망 같은 것은 아니었다고 하는 반론도 존재한다. 당대 《사기정의》를 편찬한 장수절/张守节중국어은 《사기》 및 사마정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형수에 대한 원한 때문에 갱힐후라는 작호를 준 것이라고 하면서도 '갱힐'은 갱힐산(羹颉山)이라는 지명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였다. 장수절의 주장에 대해 왕준관(王骏观)은 갱힐은 지명이 아닌 봉호이고 한 왕조는 산천의 이름을 따서 봉호를 짓지 않았으며 장수절의 말은 그냥 가져다 붙인 것이라고 하였다. 최적(崔適)은 도리어 갱힐산이라는 지명이 갱힐후라는 봉호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