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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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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하는 사수군 출신으로, 유방을 도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전한 건국에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유방의 측근으로, 초기에는 행정 실무를 담당했으며,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한 후에는 승상으로서 내정을 총괄했다. 특히, 한신을 발탁하고 관중을 안정적으로 관리하여 군수 물자를 조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소하는 법률 제정에도 힘썼으며, 미앙궁 건설을 주도했다. 사후에는 상국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삶과 관련된 고사성어들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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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삼재도회에 있는 소하의 초상화
삼재도회에 있는 소하의 초상화
한자 이름蕭何
출생기원전 257년
출생지장쑤 성펑 현
사망기원전 193년 8월 16일 (64세)
직업서예가, 정치인
종교도교
시호문종후(文終侯)
작위찬후(酇侯)
관직
상국기원전 196년 ~ 기원전 193년
군주한 고조한 혜제
후임조참
승상기원전 206년 ~ 기원전 196년
군주한 고조
가족
자녀소연
소록

2. 경력

2. 1. 초기 생애와 진나라 봉기

소하는 사수군 풍의현(馮邑縣)(오늘날 강소성 풍현) 출신으로, 젊은 시절 배현의 관리 사무소에서 공조(功曹, 현령의 서기)로 일했다. 그는 학식이 있고, 재치 있으며, 온화한 성격으로 법률에도 능통했고, 유방, 조참, 번쾌, 하후영, 주발 등 폭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유방(劉邦)이 노역을 위해 리산(罹山)으로 호송 중이던 포로들을 풀어주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 망당산(芒砀山)(현재 허난성(河南省) 용청(永城))])의 산적 아지트에 숨어 소하(蕭何)와 조참(曹參)과 비밀리에 연락을 유지했다. 기원전 209년,

2. 2. 초한전쟁 시기

기원전 206년, 진이 멸망하고 유방항우에 의해 한왕(漢王)에 봉해지자, 소하는 승상으로서 내정 일체를 맡게 되었다.[2] 얼마 지나지 않아 하후영한신을 천거해 오자, 소하는 그를 유방에게 천거하지만, 자신이 받은 한미한 직책에 불만을 품고 도망치려는 한신을 잡아두기 위해 소하는 "이번에도 제대로 중용되지 못한다면 나도 한을 떠나겠다"고까지 유방을 설득해, 끝내 한신이 유방 진영의 대장군 지위에 오르게 한다.[2] 한신이 이렇다 할 출신 배경이나 전장에서 세운 특별한 공적이 없었을 뿐더러 초나라 일개 잡병(雜兵)에 불과했고, 한에서도 하급 무사에 지나지 않았으나 유방이 그를 크게 중용한 데에는 유방이 평소 소하를 얼마나 신뢰하고 의지하였는지 잘 보여준다.[2]

유방이 군세를 거느리고 관중(關中)에 입성할 때 소하도 함께 했다. 초한전쟁이 격화되면서 유방이 전쟁터로 나가 관중을 비운 동안에 소하는 태자 유영을 보좌해 그곳을 지켰다.[2] 관중에서도 소하의 행정 수완은 유감없이 발휘되었으며, 관중에서 유방이 있는 전장으로 식량과 병사가 끊어지는 일이 없도록 후방에서 지원했으며, 관중의 백성을 괴롭히는 일도 없어 명승상으로까지 칭송받았다.[2] 기원전 202년, 마침내 유방 진영의 승리로 초한 전쟁은 끝났고, 전공을 논하는 자리에서 전장에서 활약한 여러 장수들을 제치고 소하가 제일 공신으로 천거된다.[2] 소하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군수물자 보급, 근거지인 관중 땅의 안정 없이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라는 유방의 이해와 판단에서 나온 결단이었다.[2] 이때 소하는 당시 남양군에 있는 찬(酇) 땅{혹은 양나라 내사지에 있는 차(酇) 땅}을 영토로 삼는 찬(酇侯, 또는 차후)로 봉해지고 식읍 7천 호를 하사받았으며, 그 일족 수십 명도 각각 식읍을 받았다.[2]

2. 2. 1. 한신의 천거와 발탁

소하는 한신을 만났는데, 한신은 최근 유방의 군대에 합류하여 하급 병사로 복무하고 있었지만, 소하는 그의 뛰어난 군사 전략을 알아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방의 많은 부하들이 멀리 떨어진 파촉에서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탈영했고, 한신도 자신의 재능이 유방의 진영에서 낭비될 것이라는 실망감에 떠났다. 소하는 한신이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즉시 그를 찾아 데려오기 위해 달려갔으며, 유방에게 알릴 시간조차 없었다. 소하는 며칠 동안, 심지어 밤에도 한신을 추격하여 그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유방은 소하 역시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충격을 받았지만, 며칠 후 소하가 한신과 함께 돌아오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유방은 소하에게 "탈영한 자들 중 왜 유독 한신만 데려왔는가?"라고 물었다. 소하는 한신의 무한한 재능을 언급하며 그를 유방에게 강력히 추천했다. 유방은 소하의 제안을 받아들여 한신을 한나라 군대의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2. 2. 2. 관중 경영과 후방 지원

기원전 206년, 유방은 삼진(三秦)을 정복하고 관중(關中)과 파촉(巴蜀)을 소하에게 맡긴 채 동쪽으로 진격하여 항우의 서초(西楚)를 공격하였다. 소하는 이 지역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며 전선에 있는 유방의 군대에 보급품, 식량, 증원군을 제공하여 지원하였다. 관중에서 소하는 새로운 통치 체계를 시행하고 파괴된 건물들을 재건하여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였다. 새로운 체제하에서 가난한 자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세금이 조정되었고, 예전에 진(秦)의 귀족들이 소유했던 토지는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농민들에게 재분배되었다. 또한, 유능하고 존경받는 평민들을 선발하여 관리들을 보좌하여 행정을 도왔다.

2. 3. 한나라 건국 이후

유방이 황제에 즉위하고 전한(前漢)이 성립된 뒤에도 소하는 승상으로서 정무를 맡아 오랜 전란으로 황폐해진 국가 안정과 부흥에 헌신하였다. 승상으로서 소하의 업적 중 하나는 진나라의 법률을 참고하여 《구장률》(九章律)을 편찬한 것이다.

기원전 201년, 고조(高祖)는 수도를 낙양에 건설하려 했으나 장량은 천연 방어 시설인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고 농업에 적합한 비옥한 토지가 있는 함양을 대신 제안했다. 고조는 소하(蕭何)에게 함양 건설을 맡겼다. 2년 후 공사가 완료되자 소하는 고조를 함양으로 안내했다. 새로운 궁궐은 위양궁이라 불렸으며 서한과 시대 내내 중앙 황궁으로 사용되었다. 고조는 또한 함양의 이름을 "장안"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오래 지속되는 평화"를 의미한다.

기원전 196년에 여후로부터 한신(韓信)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비밀리에 회합을 거듭하여 계략을 사용해 유인하여 이를 토벌하였다. 한신은 국사무쌍이라 불릴 정도의 명장이었고, 신중하기도 했지만, 소하만은 신뢰했기에 방심한 것이다. 이 공적으로 신하로서 최고의 지위인 상국(相國)에 임명되었고, “검履상전[3]”, “입조불추[4]”, “알찬불명[5]” 등의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유방은 소하에게도 의혹의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는 초한전쟁 때부터 그러한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소하도 그것을 눈치채고, 전쟁에 참가할 수 있는 친족들을 모두 전장으로 보내 반란의 의도가 전혀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유방은 황제가 된 후에는 의심이 강해졌고, 또한 한신을 비롯한 원훈들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인해 소하에게도 의심의 눈길을 돌린 것이다. 오랫동안 관중(關中)을 지키고 백성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으며, 그럴 마음만 먹으면 아주 쉽게 관중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도 위험시되는 요인이 되었다. 소하는 부하의 조언을 받아들여 일부러 폭정을 행하여(전답을 탐욕스럽게 사들이고 추잡하게 돈을 벌어) 자신의 평판을 떨어뜨리거나 재산을 국고에 기부함으로써, 한때 투옥되기는 했지만 어떻게든 숙청을 모면하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195년, 소하(蕭何)는 장안이 점점 혼잡해지고 황궁 정원에는 경작되지 않은 땅이 많다는 것을 보고 고조(高祖)에게 정원의 일부를 떼어 농민들에게 농지로 나누어 주자고 건의하였다. 고조는 기분이 상하여 소하가 뇌물을 받고 황권을 훼손했다고 비난하였다. 소하가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고조가 소하가 백성의 이익을 생각했음을 알게 된 후 석방되었다.

유방의 죽음 2년 후, 소하도 뒤따라 죽고 문종후(文終侯)로 시호를 받았으며, 아들 애후(哀侯) 소록(蕭祿)이 뒤를 이었다.

죽을 때 후계자로 조참(曹參)을 지명했다. 후에 조참은 정무를 태만히 한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 “고조(高祖)와 소하가 정한 법령은 명료하고 세상을 다스리고 있으며,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사소한 변경을 하지 않고 그것을 그저 지키면 됩니다.”라고 당시 황제에게 말했고, 황제도 그 말에 납득했다.

2. 3. 1. 미앙궁 건설과 법률 제정

유방이 황제에 즉위하고 전한이 성립된 뒤에도 소하는 승상으로서 정무를 맡아 오랜 전란으로 황폐해진 국가 안정과 부흥에 헌신하였다. 승상으로서 소하의 업적 중 하나는 진의 법률을 취사(取捨)하여 《구장률》(九章律)을 편찬한 것이다.

기원전 199년, 한고조가 동쪽으로 출병하여 동원(東垣) 일대의 한왕 신의 잔병들을 토벌했는데, 승상 소하는 웅장한 궁궐인 미앙궁(未央宮)과 여러 궁궐들을 축조한다.[9]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궁실을 지을 수가 있었고, 궁궐이 장엄하지 않으면 위엄을 세울 수 없다는 논지를 편다.[9]

기원전 201년, 고조(高祖)는 수도를 낙양에 건설하려 했으나 장량은 천연 방어 시설인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고 농업에 적합한 비옥한 토지가 있는 함양을 대신 제안했다. 고조는 소하(蕭何)에게 함양 건설을 맡겼다. 2년 후 공사가 완료되자 소하는 고조를 함양으로 안내했다. 새로운 궁궐은 위양궁이라 불렸으며 서한과 시대 내내 중앙 황궁으로 사용되었다. 고조는 또한 함양의 이름을 "장안"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오래 지속되는 평화"를 의미한다.

2. 3. 2. 한신 제거와 상국 임명

기원전 196년, 고조(高祖)가 진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원정을 떠나 있는 동안, 한신의 신하 한 명이 여태후에게 한신이 진희와 공모하여 장안에서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여태후는 소하에게 도움을 청했고, 함께 한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소하는 한신에게 고조가 진희를 물리쳤다는 소식을 알리고 황제를 만나 축하 인사를 전하라는 황제의 칙령을 보냈다. 한신이 장락궁에 도착하자마자 반역죄로 체포되어 고문 끝에 처형되었다.

2. 3. 3. 모반 의혹과 처신

유방이 황제가 되면서부터 소하에 대한 시기와 의심이 더욱 강해졌다. 한신을 비롯한 원훈들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보며 소하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에 이른다. 오랜 세월 동안 관중을 지키며 민중의 신망이 두터웠기에, 마음만 먹으면 쉽게 관중을 장악할 수 있다는 점도 소하를 위험시한 요인이었다. 소하는 여러 차례 부하의 조언을 받아들여 일부러 논밭을 사 모으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거나 하는 등으로 자신에 대한 평판을 떨어뜨리거나 자신의 재산을 아예 국고에 기부해버림으로써, 간신히 숙청을 피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처신은 소하를 보신주의자로 해석하게도 하지만, 신생 국가인 전한 왕조를 지키기 위해 쓸데없는 풍파를 일으키지 않으려 고심한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3. 자손

소하의 가계는 여러 차례 단절되었으나, 황제의 명으로 후손들이 봉호를 이어받았다. 남조(南朝)의 남제를 건국한 소도성과 양을 건국한 소연은 소하의 후손이라고 자칭했다.

소하의 증손자인 소표(蕭彪)는 란릉(현재 산둥성 자오좡 부근)으로 이주하여 은둔 생활을 했다. 그의 후손 중 두 명은 후대 북조남조 시대에 황실 왕조를 건국했는데, 소도성남제를, 그의 먼 사촌인 소연은 그 뒤를 이어 양을 건국했다.

소하의 가계는 단절과 재건을 반복했다. 애후(哀侯) 소록(蕭禄) 사후 동생 소동(蕭同)이 이었으나 작위를 빼앗겼고, 소하의 막내아들 소연(蕭延)이 이었다. 정후(定侯) 소연 사후 아들 양후(煬侯) 소유(蕭遺)가 계승했으나, 자식이 없어 동생 소칙(蕭則)이 계승했다. 애후(酇侯) 소칙은 죄를 지어 소유지를 몰수당했다.

경제(景帝)는 소하의 가계를 잇기 위해 소칙의 동생 소가(蕭嘉)를 무양후(武陽侯)로 봉했다. 소가 사후 아들 소승(蕭勝)이 계승했으나, 무제(武帝) 시대에 죄를 지어 소유지를 몰수당했다. 무제는 소칙의 아들 공후(共侯) 소경(蕭慶)을 애후로 봉했다. 소경 사후 아들 소수성(蕭壽成)이 계승했으나, 죄를 지어 소유지를 몰수당했다.

선제(宣帝) 시대에 소하의 자손을 찾아 리후(釐侯) 소희(蕭喜)를 애후로 봉했다. 소희 사후 아들 질후(質侯) 소존(蕭尊)이 계승했고, 소존 사후 아들 소장(蕭章)이 계승했으나 자식이 없어 동생 소우(蕭禹)가 계승했다. 왕망(漢)을 찬탈하여 (新)을 세우자, 소우를 애향후(酇郷侯)로 다시 봉했으나, 후한 광무제에 의해 멸망하면서 애향후도 단절되었다.

명제(明帝)와 장제(章帝)는 소하를 제사 지냈고, 화제(和帝) 시대에 소하의 자손을 찾아 토지를 주었다. 이처럼 소하의 자손은 전한후한에 걸쳐 번영했다. 남제를 건국한 소도성은 소하의 24대손이며, 소도성의 종손으로 양을 건국한 소연 또한 소하의 25대손이라고 자칭했다.

4. 평가

유방은 천하통일 시 소하를 전공 제일로 삼아 전한 건국 최대의 공신으로 대우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전장에서 싸우지 않은 소하를 전공 제일로 하는 것에 불만을 토로하자 유방은 “ 여러분의 공적은 사냥개와 같다. 소하의 공적은 그 사냥개의 주인과 같다.”라고 말했다.

악군은 “조참은 야전 공방의 공적이 있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공적에 불과하다. 초나라와의 싸움에서는 5년 동안 군대를 잃고 병사를 잃고, 도망치는 경우도 많았는데, 소하는 항상 관중을 지키고 군대를 보충하며, 수만 명의 병사들이 달려들었고, 병사 부족과 식량 위기를 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일시적인 공적이 아니고 만세의 공적이다.”라고 말했다.

사마천사기의 소상국세가에서 “소하는 진나라 시대에 서기의 작은 관리가 되어, 평범하고 남들과 다른 절행은 없었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고조(유방)의 눈에 띄어, 성실하고 신중하게 나라를 지켰고, 백성들이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미워했기 때문에, 시세에 순응하여 백성들과 더불어 갱신일신의 대업에 종사하였다. 한신, 영포가 숙청되었으나, 소하의 공훈은 빛나고, 지위는 군신 위에 두어지고, 명성은 후세까지 전해져, 홍요, 산의생과 같은 주나라의 공신들과 공업을 다툴 만하다고 할 것이다.”라고 평하고 있다.[7]

4. 1. 현대적 평가

소하는 전란 속에서도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 법치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다.[7] 그의 행정 능력과 신중한 처신은 현대 정치인들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다.

사마천은 사기의 소상국세가에서 "소하는 진나라 시대에 서기의 작은 관리가 되어, 평범하고 남들과 다른 절행은 없었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고조(유방)의 눈에 띄어, 성실하고 신중하게 나라를 지켰고, 백성들이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미워했기 때문에, 시세에 순응하여 백성들과 더불어 갱신일신의 대업에 종사하였다. 한신, 영포가 숙청되었으나, 소하의 공훈은 빛나고, 지위는 군신 위에 두어지고, 명성은 후세까지 전해져, 홍요, 산의생과 같은 주나라의 공신들과 공업을 다툴 만하다고 할 것이다.”라고 평하고 있다.[7]

몇몇 고사성어와 속담은 소하의 삶에서 비롯되었다.

  • ''소하가 달빛 아래 한신을 추격하다'' (소하월하추한신/蕭何月下追韓信zh-Hant): 소하가 한신을 따라잡아 유방에게 데려오기 위해 며칠 동안, 심지어 밤에도 한신을 뒤쫓았던 사건에서 유래했다. 즉시 조치를 취해야 하는 긴급한 상황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 ''성공도 소하 덕이고, 몰락도 소하 덕이다'' (成也蕭何 敗也蕭何 Hangul: 성야소하 폐야소하): 소하는 한신이 장군이 되도록 도왔고, 이는 한신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소하는 한신의 죽음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공과 실패가 모두 동일한 요인 때문인 상황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 ''조참이 소하의 규칙을 따르다'' (萧规曹随중국어): 소하의 뒤를 이어 재상이 된 조참은 소하가 남긴 통치 시스템을 계승하여 잘 유지했지만 새로운 변화는 도입하지 않았다. 전임자의 업무를 계승하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달빛 아래 소하가 한신을 추격하는 그림


유방은 천하통일 시 전공 제일로 삼아 전한 건국 최대의 공신으로 대우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전장에서 싸우지 않은 소하를 전공 제일로 하는 것에 불만을 토로하자 유방은 “ 여러분의 공적은 사냥개와 같다. 소하의 공적은 그 사냥개의 주인과 같다.”라고 말했다.

악군은 “조참은 야전 공방의 공적이 있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공적에 불과하다. 초나라와의 싸움에서는 5년 동안 군대를 잃고 병사를 잃고, 도망치는 경우도 많았는데, 소하는 항상 관중을 지키고 군대를 보충하며, 수만 명의 병사들이 달려들었고, 병사 부족과 식량 위기를 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일시적인 공적이 아니고 만세의 공적이다.”라고 말했다.

5. 대중문화

소하는 여러 역사 소설, 드라마, 게임 등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그의 삶과 관련된 일화는 다음과 같은 고사성어로 남아있다.


  • '''소하가 달빛 아래 한신을 쫓다(蕭何月下追韓信):''' 소하가 한신을 유방에게 데려오기 위해 밤낮으로 며칠 동안 쫓아간 사건에서 유래했다. 긴급한 상황에서 즉시 조치를 취해야 할 때 사용된다.
  • '''성공도 소하, 실패도 소하(成也蕭何 敗也蕭何):''' 소하는 한신이 장군이 되도록 도왔지만, 동시에 그의 죽음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공과 실패가 모두 동일한 요인 때문에 발생한 상황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 '''조참이 소하의 규칙을 따르다(蕭規曹隨):''' 소하의 뒤를 이어 재상이 된 조참은 소하가 남긴 통치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고 새로운 변화를 주지 않았다. 전임자의 업무를 계승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하는 코에이(Koei)의 비디오 게임 ''삼국지11''에 특수 캐릭터로 등장하며, 액션 RPG ''진(秦) 왕조''에서는 플레이 불가능한 캐릭터로 나온다. 미야기타니 마사미츠의 소설 《초한명신열전》(문예춘추)에도 등장한다.

참조

[1] 문서 Zizhi Tongjian vol. 12 reference
[2] 문서 蕭何の韓信評
[3] 문서 宮殿内における武器所持
[4] 문서 宮殿内における移動方法
[5] 문서 皇帝との会話における名乗り
[6] 문서 史記と漢書における蕭同の記述
[7] 웹사이트 ctext.org - Shiji https://ctext.org/sh[...]
[8] 웹인용 네이버 https://www.naver.co[...] 2024-11-29
[9] 뉴스 사마천 사기 – 본기 8. 고조본기(高祖本紀) http://chedulife.com[...] 크리스천라이프 2021-07-06
[10] 문서 사기와 한서의 순위 차이
[11] 문서 상제 피휘
[12] 문서 사기의 순위 기록 부재
[13] 문서 사기와 한서의 기록 차이
[14] 문서 사기와 사기색은의 기록 차이
[15] 문서 사기와 한서의 순위 차이 및 중복
[16] 문서 항양의 원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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