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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준 (18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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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영준은 189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일제강점기, 광복 이후의 여성 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정신여학교 졸업 후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며 여성 잡지 발간과 2·8 독립 선언에 참여했다. 귀국 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의로 재직하며 근우회 활동, 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에 기여했다. 광복 후 조선부녀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 민주주의민족전선 활동을 했으며, 월북 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국전선 의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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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준 (1892년)
기본 정보
대한제국 국기
대한제국 국기
본관강릉(江陵)
인물 정보
출생1892년 11월 22일
사망1974년 6월 6일 (81세)
직업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배우자김정애
자녀4남 3녀
학력일본대학 법학부 졸업
경력
주요 경력제헌 국회의원
제3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민주당 최고위원
신민당 고문
기타 경력대한민국 헌법기초위원
국회 재정경제위원장
국회 외무위원장
훈장
훈장 내역건국훈장 독립장

2. 생애

유영준은 189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과 일본에서 유학하며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였다. 1923년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귀국하여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에 헌신하였다.

국내에서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의, 산부인과 병원 개업, 근우회 활동,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설립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조선부녀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의장,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 등을 역임하며 좌익 진영에서 활동하다 1947년 월북하였다.

북한에서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국전선의장단 의장, 적십자사 부위원장, 경공업성 부상 등을 역임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독립운동 (1892년 ~ 1925년)

189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여학교(北京女學校)에서 수학하며 안창호의 지도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귀국하였다가 3·1 운동에 참여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東京女子醫學專門學校, 현 도쿄 여자 의과대학)와 일본적십자병원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재동경 조선 여자 유학생 친목회"에서 나혜석, 김마리아, 황애덕 등과 교류하였고, 한국 최초의 여성 잡지 『여자계』 발행 유지를 위해 조직된 학흥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에는 2·8 독립 선언 발표에 김마리아, 황애덕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21년에는 동경유학생여자강연단으로 고국을 순회하며 여성의 의식과 위생 관념을 강조하는 강연을 하였다.

1923년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에 머물다가 1925년 귀국하여, 김약수, 이여성 등이 동경에서 조직한 사회주의단체 일월회(북성회의 개칭) 발회기념강연에서 ‘무산계급과 교육문제’라는 강연을 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2. 2. 국내 활동과 여성운동 (1925년 ~ 1945년)

1923년 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에 머물다가 1925년 귀국하여 김약수, 이여성 등이 동경에서 조직한 사회주의단체인 일월회(북성회의 개칭) 발회기념강연에서 ‘무산계급과 교육문제’라는 강연을 하는 등 사회주의운동에도 간여하였다.

국내에서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의로 일하면서 산부인과병원을 개업하였지만, 주로 여성운동에 주력하였다.

1927년 5월에는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에 창립부터 참여하여 최은희, 황신덕과 함께 주역이 되어 1929년까지 창립준비위원, 서기, 중앙집행위원, 중앙집행위원회 정치연구부 상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경성여자소비조합 감사장도 담당하였다. 그는 호남의 부호 김종필과 혼인하여 첫딸도 낳고 다복한 가정생활에도 충실하였다.

계속하여 순회강연 등을 통하여 사회운동에 참여하다가 1934년 말에는 안재홍, 이종린, 여균 등과 함께 국내에 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교섭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8년 여자와 어린이 전문 여의사 양성기관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35년경에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2. 3. 광복 이후와 월북 (1945년 ~ 1962년)

1945년 12월 22일 좌익 진영의 여성단체인 조선부녀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좌익 단체의 총집결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 부의장 및 상임위원·사회정책연구위원을 역임하고,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과 3당 합당되어 남조선노동당으로 발족하자 중앙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1947년 좌익진영에 대한 경찰의 탄압이 강화되자 월북하여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49년 조국전선의장단 의장, 1956년 적십자사 부위원장, 1958년 경공업성 부상 등을 역임하다가 1962년 노령으로 인하여 요양소 생활을 하였다. 해방 후, 1945년 12월 22일 조선 부녀 총동맹의 중앙 집행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여성의 정치·경제·사회적 평등권 획득", "노동 여성의 조건 개선" 등 기본 내용을 제시했고, 1946년 민주주의 민족 전선의 부의장으로 선출되어, 남조선노동당이 발족하자 중앙 위원을 맡았다. 1947년 미군정에 체포되어 석방 후 월북했다. 1948년 8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 인민 회의 대의원, 1949년 조국 전선 의장단 의장, 1956년 조선 적십자사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북한에서는 제2회 "조국 통일을 지지하는 남북 조선 제 정당·사회 단체 지도자 연석 회의"에서 봉건제의 타파와 남녀 평등의 실현을 연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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