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 (성양공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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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지(劉祉)는 기원전 7년에 태어나 35년에 사망한 인물로, 신나라, 경시제 정권, 후한 시대를 거치며 활약했다. 그는 전한 용릉후 유창의 아들로, 왕망의 신나라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가족을 잃었으나, 이후 경시제의 태상 장군, 정도왕을 거쳐 광무제에게 귀순하여 성양왕에 봉해졌다. 건무 11년(35년)에 병으로 사망하여 공왕으로 시호되었으며, 낙양 북망에 안장되었다.
아버지 용릉후 유창은 족형 안중후 유숭과 친했는데, 전한 거섭 원년(6년) 유숭이 왕망에 대항해 거병했다가 실패하고 죽자, 두려워 자기 세력을 늘리기 위해 유지를 고릉후 적선의 딸과 결혼하게 했다.[1]
2. 생애
그러나 거섭 2년(7년)에 적선의 동생 적의가 반란을 일으켜, 유지는 아내를 잃고 연좌되어 갇혔다. 유창이 왕망에게 사죄하고 자기 종족을 앞장서 종군하게 한 덕분에 유지는 목숨을 건졌다. 왕망이 신나라를 세우면서 전한의 후작들은 자작으로 깎였고, 결국 작위를 잃었다. 유창이 죽자 유지는 아전이 되었다. 그럼에도 용릉후의 적자이고 행실이 순후하여 종실들의 존경을 받았다.[1]
족형제 유인과 후한 광무제 형제가 거병하자(용릉병) 형제들과 함께 가담했고, 남은 가족들은 전수대부 진부에게 사로잡혀 옥에 갇혔다. 유인이 소장안취에서 진부와 전수속정 양구사에게 대패했을 때 퇴각해 극양(棘陽)을 지켰다. 어머니와 동생과 처자는 모두 진부에게 살해됐다. 용릉병이 가담한 녹림군에서 족제 한 경시제를 황제로 세우면서 태상장군이 됐고 용릉후를 회복했다. 경시제가 입관하고 제후왕들을 세우면서 정도왕(定陶王)에 봉해졌다. 경시 3년(25년) 방망 등이 왕망이 폐위한 전한의 마지막 황제(형식상으로는 태자) 유자영을 임경에서 옹립하자, 별장으로서 이를 격파했다.[1]
이해 10월에 경시제 정권이 적미군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항복하자, 몰래 달아나 낙양으로 가 후한 광무제에게 속했다. 광무제의 환대를 받아 건무 2년(26년) 성양왕에 봉해졌고 왕의 용품을 하사받았으며, 아버지 유창도 용릉강후(-康侯)로 추증되었다.[1] 건무 11년(35년), 병이 들자 성양왕의 인수를 반납하고 선조의 제사를 받들고자 했다. 광무제의 문병을 받았다. 결국 이해에 43세로 병사했다. 시호를 공왕(恭王)으로 하고, 봉국이 아닌 낙양 북망에 안장되었다.[1]
2. 1. 초기 생애와 왕망과의 대립
아버지 용릉후 유창은 족형 안중후 유숭과 친했는데, 전한 거섭 원년(6년) 유숭이 왕망에 대항해 거병했다가 실패하고 죽자, 두려워 자기 세력을 늘리기 위해 유지를 고릉후 적선의 딸과 결혼하게 했다.[1]
그러나 거섭 2년(7년)에 적선의 동생 적의가 반란을 일으켜, 유지는 아내를 잃고 연좌되어 갇혔다. 유창이 왕망에게 사죄하고 자기 종족을 앞장서 종군하게 한 덕분에 유지는 목숨을 건졌다. 왕망이 신나라를 세우면서 전한의 후작들은 자작으로 깎였고, 결국 작위를 잃었다. 유창이 죽자 유지는 아전이 되었다. 그럼에도 용릉후의 적자이고 행실이 순후하여 종실들의 존경을 받았다.
2. 2. 경시 정권과 후한에서의 활약
경시 원년(23년) 2월, 한 경시제가 즉위하자 태상 장군에 임명되었고, 용릉후를 회복했다. 경시 2년(24년) 2월, 경시제를 따라 장안으로 들어가 정도왕(定陶王)에 봉해졌다.
경시 3년(25년) 1월, 방망이 왕망에게 폐위된 유자영을 임경(안정군)에서 천자로 옹립하자, 승상 이송, 토난장군 소무와 함께 유영 등을 토벌했다. 9월에 경시 정권이 적미군에게 항복하자, 몰래 낙양으로 달아나 후한 광무제에게 속했다. 광무제는 유씨 일족 중에서 유지가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을 매우 기뻐했다. 건무 2년(26년) 성양왕에 봉해졌고 왕의 용품을 하사받았으며, 아버지 유창은 용릉강후(-康侯)로 추증되었다.[1]
건무 11년(35년), 병이 들어 성양왕의 인수를 반납하고 선조의 제사를 받들고자 했다. 광무제의 문병을 받았다. 결국 이해에 43세로 병사했다. 시호는 공왕(恭王)이며, 봉국이 아닌 낙양 북망에 안장되었다.[1] 아들 유평이 뒤를 이었지만, 경릉후로 강등되었다.
2. 3. 죽음
劉祉|유지중국어는 아버지 용릉후 유창이 아들을 구하기 위해 사죄하고 자기 종족을 앞장서 종군하게 한 덕분에, 왕망이 섭정한 지 얼마 안 돼 종실을 위무할 필요가 있어서 죽음을 면했다. 왕망이 신나라를 세우면서 전한의 후작들은 자작으로 깎이고, 결국 작위를 잃었다.
광무제의 환대를 받아 건무 2년(26년) 성양왕에 봉해졌고 왕의 용품을 하사받았으며, 아버지도 용릉강후(-康侯)로 추증되었다. 건무 11년(35년), 병이 들어 성양왕의 인수를 반납하고 선조의 제사를 받들고자 했다. 광무제의 문병을 받았다. 결국 이해에 43세로 병사했으며, 시호를 공왕(恭王)으로 하고 봉국이 아닌 낙양 북망에 안장되었다.
3.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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