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숭 (안중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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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숭(劉崇)은 전한 시대의 인물로, 안중후 유금의 아들이다. 그는 왕망의 찬탈 시도에 반대하여 거병했으나 실패했고, 작위가 폐지되었다. 유숭은 한나라 경제의 후손으로, 왕망이 섭정을 하면서 황위를 찬탈하려 하자 안중후국에서 거병했으나 완현을 침공하다 패배했다. 그의 족부 유가와 장소의 종제 장송은 왕망에게 항복했고, 장송은 유숭의 죄를 책하는 상주문을 작성하여 왕망에게 칭찬을 받았다. 유숭의 궁실은 웅덩이로 만들어졌으며, 이후 그의 사촌 동생 유선이 안중후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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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숭 (안중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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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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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유(劉, Liu) |
휘 | 숭(崇, Chong) |
묘호 | 현조(顯祖, Xianzǔ) |
시호 | 세조(世祖, Shìzǔ) (요나라에서 올린 묘호) |
추존 황제 시호 | 고조(高祖, Gāozǔ) |
연호 | 천경(乾景, Qiánjǐng): 948년 ~ 951년 응력(應歷, Yìnglì): 951년 |
출생 및 사망 | |
출생 | 895년 |
사망 | 954년 |
가계 | |
부 | 유지원 |
모 | 이태후 |
형제 | 유승훈 |
자녀 | 유균 |
기타 | |
시대 | 오대십국시대 |
직업 | 군벌 황제 |
봉호 | 안중후(安重侯) |
재위 | 948년 ~ 954년 |
2. 생애
유숭(안중후)은 한나라 안중강후 유단(경제의 아들 장사정왕 유발의 아들)의 6세손으로, 한나라 종실의 일원이었다. 그는 안중후의 작위를 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외척 왕망이 국정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원시 5년(5년) 12월, 평제가 사망하자 후계자가 없었고, 가까운 혈통의 남자아이도 끊긴 상태였다. 이에 4대 전 황제인 선제의 현손이자 광척후 유현의 아들로 당시 불과 2세였던 유영이 다음 황제로 선택되었다. 그러나 같은 달 "우물을 청소하던 중 '고안한공망위황제(告安漢公莽為皇帝, 안한공 왕망에게 고한다. 황제가 되라)'라고 적힌 돌이 나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다른 신하들 또한 왕망에게 아첨한 결과, 왕망은 황제의 정무와 제사를 대행하게 되었으며, 제사 시에는 "가황제(仮皇帝)", 백성과 신하들에게는 "섭황제(摂皇帝)"로 칭하고, 유영은 "유자(孺子)"로 불리며 황태자에 봉해졌다.
이러한 상황에 세상에서는 왕망이 제위를 찬탈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졌다. 유숭 또한 이러한 행위에 위구심을 느껴 거병하여 왕망을 토벌할 계획을 세웠다.[2] 거섭 원년(6년) 4월, 유숭은 "안한공 왕망은 조정의 정사를 마음대로 처리하며, 천하의 사람들은 왕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감히 먼저 거병하는 자가 없다. 이는 종실의 수치이다. 내가 종족을 이끌고 먼저 나선다면 천하의 사람들이 반드시 행동을 함께 할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영지인 안중후국(남양군)에서 거병했다. 유숭은 국상(귀족의 영지에서의 재상)인 장소(한나라 선제를 섬긴 장창의 손자[3]) 등 100여 명의 수행원과 함께 남양군의 완현으로 쳐들어갔으나, 침입 전에 저지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2. 1. 가계와 작위 계승
유숭은 아버지 유금의 뒤를 이어 안중후(安衆侯)에 봉해졌다.[2]거섭 원년(6년) 4월, 안중후상 장소와 함께 왕망 축출을 모의하여 100명의 무리를 이끌고 완(宛)을 침공하였으나 패사하였다.[2] 작위는 폐지되었고, 후한 건무 2년(26년)에 사촌 동생 유선이 다시 책봉되었다.
2. 2. 왕망에 대한 반대와 봉기
아버지 유금의 뒤를 이어 안중후(安衆侯)에 봉해졌다.거섭 원년(6년) 4월, 안중후상 장소와 함께 왕망 축출을 모의하여, 100명의 무리를 이끌고 완(宛)을 침공하였으나 패사하였다.[2] 작위는 폐지되었고, 후한 건무 2년(26년)에 사촌 동생 유선이 다시 책봉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외척 왕망이 국정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원시 5년(5년) 12월, 평제가 사망하자 후계자가 없었다. 선제의 현손이자 광척후 유현의 아들로 당시 불과 2세였던 유영이 다음 황제로 선택되었다. 그러나 왕망은 황제의 정무와 제사를 대행하게 되었으며, "가황제(仮皇帝)", 백성과 신하들에게는 "섭황제(摂皇帝)"로 칭하고, 유영은 "유자(孺子)"로 불리며 황태자에 봉해졌다.
이러한 사태에 세상에서는 왕망이 제위를 찬탈할 것이라는 우려가 점차 생겨났다. 한나라 종실의 일원이었던 유숭 또한 이러한 행위에 위구심을 느껴, 거병하여 왕망을 토벌할 계획을 세웠다.[2] 같은 해 4월, 유숭은 "안한공 왕망은 조정의 정사를 마음대로 처리하며, 천하의 사람들은 왕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감히 먼저 거병하는 자가 없다. 이는 종실의 수치이다. 내가 종족을 이끌고 먼저 나선다면 천하의 사람들이 반드시 행동을 함께 할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영지인 안중후국(남양군)에서 거병했다. 유숭은 국상(귀족의 영지에서의 재상)인 장소(한나라 선제를 섬긴 장창의 손자[3]) 등 100여 명의 수행원과 함께 남양군의 완현으로 쳐들어갔으나, 침입 전에 저지당해 패배하고 말았다.
2. 3. 봉기 실패와 그 여파
거섭 원년(6년) 4월, 안중후상 장소와 함께 왕망 축출을 모의하여, 100명의 무리를 이끌고 완을 침공하였으나 패사하였다.[3] 작위는 폐지되었고, 후한 건무 2년(26년)에 사촌 동생 유선이 다시 책봉되었다.[3]유숭의 족부에 해당하는 유가와 장소의 종제인 장송은 장안으로 와서 스스로 항복했고, 왕망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았다.[3] 장송은 유가를 위해 상주문을 대필했는데, 그 내용은 왕망이 한실을 위해 헌신한 것을 칭찬하고 왕망에게 반역한 유숭의 죄를 책하며 유숭의 궁실을 옛날의 반역자와 마찬가지로 웅덩이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3]
왕망은 장송이 쓴 유가의 상주문을 읽고 매우 기뻐했다.[3] 공경들은 "모두 유가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상주했다.[3] 왕망은 태황태후 왕정군을 통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유가의 부자 형제는 유숭과 동족임에도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유숭의 모반의 싹을 보자마자 잇따라 유숭을 고발했다. 재앙이 일어나자 함께 이를 원수로 여긴 것은 옛 법제와 합치하며 충효가 잘 드러났다. 유가에게 천 호를 봉하고 (열후인) 수례후로 삼고, 그 아들 7명 모두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내리도록 하라"[3] 장송 또한 열후인 숙덕후에 봉해졌다.[3]
장안 사람들은 "열후에 봉해지기를 원한다면 장백송(장송을 지칭. 백송은 장송의 자)에게. 힘껏 싸워도 상주를 잘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이야기했다.[3] 왕망은 또한 남양군의 관리와 백성 중 공적이 있는 인물 100여 명을 봉했다.[3]
유숭의 궁실은 웅덩이로 만들어졌고, 이후 왕망에게 모반을 일으킨 자들의 저택은 모두 웅덩이가 되었다.[3]
군신들은 "유숭이 모반을 일으킨 것은 왕망의 권위가 가벼워졌기 때문입니다. 더욱 존중하고 숭상하여 해내(천하)를 진정시켜 주십시오"라고 상주했다.[3]
같은 해 5월, 태황태후 왕정군은 조서를 내려 왕망이 조정에서 왕정군을 만날 때 지금까지처럼 "섭황제"가 아닌 "가황제"라고 칭하게 되었다.[3]
3. 역사적 평가
유숭은 아버지 유금의 작위를 이어받아 전한의 안중후(安衆侯)에 봉해졌다. 그러나 왕망이 전한을 찬탈하면서 작위를 잃었다.[4]
4. 가계
劉崇|유숭중국어은 전한의 황족이자 제후왕으로, 장사정왕의 아들 안중희후 유포(劉褒)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안중후 작위를 잃자 뒤를 이어 6년에 안중후에 봉해졌다.[4]
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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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련 인물
참조
[1]
서적
漢書 王莽伝上
https://zh.wikisourc[...]
[2]
서적
漢書 元后伝
https://zh.wikisourc[...]
[3]
서적
漢書 趙尹韓張両王伝
https://zh.wikisourc[...]
[4]
문서
장량애후의 부왕은 사기에서는 강도역왕, 한서에서는 양공왕이라고 한다.
[5]
문서
한서에서는 효후, 후한서에서는 고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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