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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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논개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인물로, 《어우야담》 등의 기록을 통해 진주의 관기(官妓)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최경회의 후처였다는 설도 제기되며 신분에 대한 논란이 있다. 논개는 촉석루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했고, 이러한 행적을 기리기 위해 의암, 의암사적비, 의기사 등이 건립되었다. 또한, 논개는 문학 작품의 소재로도 활용되었으며, 2008년에는 윤여환 교수의 영정이 정부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었다.

논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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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김은호, 1892–1979년경)
한글 이름논개
한자 이름論介
로마자 표기Non-gae
생애
출생1574년
출생지전라도 장수현 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 (현재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사망1593년 (향년 19세)
사망지경상도 진주목 진주성에서 순절 (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성)
가족
배우자최경회
아버지주달문
어머니밀양 박씨 부인
기타 정보
본관신안 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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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수군 출신 - 정인승
    정인승은 일제강점기 국어학자로서 국어사전 편찬에 기여하고, 해방 후에는 여러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했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건국훈장과 국민훈장을 수훈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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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개에 대한 기록

논개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등장한다. 유몽인은 1594년 삼도순안어사로 진주에 들러 진주성 전투 희생자 명단을 정리하면서 논개의 이야기를 듣고, 그 순국 사실이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했다. 특히 광해군 9년에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논개가 관기라는 이유로 기록되지 않은 것에 주목하여, 1621년 《어우야담》에 논개의 순국 기록을 남겼다.

《어우야담》에서는 논개를 진주 관기로 묘사하며, 계사년 진주성 함락 당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논개는 진주 관기로 알려졌다. 그러나 1987년 해주 최씨 문중에서 발행한 《의일휴당실기》에 최경회의 부실(副室)로 언급되면서 논개가 기생이 아니라 최경회의 후처(後妻)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촉석루 정자와 남강
촉석루 정자와 남강


한편, 논개의 출신과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도 전해진다. 논개는 16세기 후반 조선 전라도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진사였던 주달문, 어머니는 박씨였다. 논개는 늦둥이였고, 그의 형은 15세에 병으로 사망했다.

157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논개는 삼촌에게 맡겨졌으나, 삼촌이 논개를 김부호라는 남자와 결혼시키려 하자 어머니가 논개를 데리고 나왔다. 1579년, 어머니와 논개는 재판을 받았으나 최경회의 도움으로 무죄 판결을 받고 흥암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17세에 논개는 최경회의 첩이 되어 "의암부인 신안 주씨"라는 칭호를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 최경회가 군사를 모집하고 훈련시킬 때 논개는 그를 도왔다. 1593년 최경회가 사망하고 진주성이 함락되자, 논개는 왜군 장수 기무라 로쿠스케를 남강으로 유인하여 함께 투신하였다. 이러한 논개의 행동은 최경회에 대한 복수이자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다만, 이 이야기는 박중화의 「논개와 계월향」(1962)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2.1. 《어우야담》의 기록

1594년 유몽인은 삼도순안어사가 되어 하삼도의 피해 상황을 살피게 되는데, 진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명단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논개의 이야기를 듣고 정사에 실리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광해군 9년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논개가 관기(官妓)로 알려졌다는 이유만으로 순국 사실이 기록되지 않자 이를 안타까워하며 1621년 자신이 편찬한 《어우야담》에 논개의 순국 기록을 남기게 된다.

권1 인륜편(人倫篇) 효열(孝烈)에 논개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인륜편에는 효열, 충의, 덕의, 은둔, 혼인, 처첩, 기상, 붕우, 노비, 배우, 창기 등으로 나누어 인물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논개의 이야기는 처첩, 노비, 창기에서 다뤄지지 않고 인륜편에 실려있다. 《어우야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기록을 근거로 그동안 논개는 진주의 관기(官妓)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1987년 해주 최씨 문중에서 발행한 《의일휴당실기(日休堂實記)》에 논개 관련 부분이 언급되는데, 최경회를 의미하는 경상우병사증좌찬성최공시장(慶尙右兵使贈左贊成崔公諡狀)에 논개 관련 부분이 언급되어 있다.

이 내용을 근거로 논개는 최경회의 후처(後妻)로 알려졌으며, 이로 인해 논개가 기녀의 신분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

2.2. 《의일휴당실기》의 기록

1987년 해주 최씨 문중에서 발행한 《의일휴당실기(日休堂實記)》에 논개 관련 부분이 언급되는데, 최경회를 의미하는 경상우병사증좌찬성최공시장(慶尙右兵使贈左贊成崔公諡狀)에 논개 관련 부분이 언급되어 있다.

且其副室 公死之日 盛服婆娑於江中巖石 誘賊長因而俱墜死 至今人稱義巖중국어

이 내용을 근거로 논개는 최경회의 후처(後妻)로 알려졌으며, 이로 인해 논개가 기녀의 신분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

3. 신분 논란

1594년 유몽인이 쓴 《어우야담》에는 논개가 진주성의 관기(官妓)로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논개가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패배하고 백성들이 죽임을 당할 때,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 기록을 근거로 오랫동안 논개는 진주 관기로 알려졌다.

그러나 1987년 해주 최씨 문중에서 발행한 《의일휴당실기(日休堂實記)》에는 논개가 최경회의 후처(後妻)였다는 기록이 있어, 논개의 신분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논개는 최경회가 죽은 후 강가 바위에서 왜장을 유인해 함께 죽었다고 한다.

20세기 후반 이후, 논개는 관기가 아니라 몰락한 양반 가문의 딸로, 최경회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그의 후처가 되었다가 사후 정실 부인으로 승격된 인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또한, 적장을 죽이기 위해 연회장에 잠입할 목적으로 기생으로 위장했을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촉석루 정자와 남강
촉석루 정자와 남강

4.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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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아버지주달문1500년 - 1578년진사
어머니밀양 박씨1550년 - ?
오빠주대룡? - ?요절
삼촌주달무? - ?
남편최경회1532년 - 1593년 6월
아들최홍남? - ?

5. 의암과 의암사적비

1625년(인조 3년) 논개가 순국한 지 32년 뒤, 논개가 떨어져 죽은 바위에는 진주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논개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다.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의 둘째 아들 정대륭이 진주로 이사와 의암(義巖)이라는 글씨를 바위에 새겼다. 1651년(효종 2년) 경상우도의 재난을 살피러 조정에서 파견된 오두인이 진주에 들러 바위에 새겨진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보고, 촉석루에 의암기(義巖記)를 지었다.

촉석루 정자와 남강
촉석루 정자와 남강


1721년(경종 1년),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의암사적비를 의암 바로 위에 세워 그 뜻을 기렸다. 이후 의암은 "의로운 바위"로 불린다.

5.1. 의암(義巖)

1625년(인조 3년) 논개가 순국한 지 32년 뒤, 논개가 떨어져 죽은 바위에는 진주 백성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던 논개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다.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의 둘째 아들 정대륭이 진주로 이사 와서 의암(義巖)이라는 글씨를 바위에 새겼다. 1651년(효종 2년) 경상우도의 재난을 살피러 조정에서 파견된 오두인이 진주에 들러 바위에 새겨진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보고, 촉석루에 의암기(義巖記)를 지었다. 1721년(경종 1년),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의암사적비를 의암 바로 위에 세워 그 뜻을 기렸다.

5.2.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

1625년(인조 3년) 논개가 순국한 지 32년 뒤,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의 둘째 아들 정대륭이 진주로 이사와 의암(義巖)이라는 글씨를 바위에 새겼다. 1721년(경종 1년),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의암사적비를 의암 바로 위에 세워 그 뜻을 기렸다.

6. 의기사

1739년(영조 16년)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논개의 애국충정을 추모하는 사당인 의기사를 진주 촉석루 옆에 세웠다.

7. 의암별제와 진주논개제

1868년(고종 5년)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의 노력으로 매년 6월 논개를 기리는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중단되었다가 최근에 진주논개제로 부활하였다. 진주논개제는 매년 5월 의암별제 서막으로 시작된다.

의암
의암


정현석(鄭顯奭)이 쓴 1868년 기록인 『교방가요』에 따르면, 고종 5년부터 매년 6월에 논개의 넋을 기리는 의암별제가 열렸다고 한다. 진주성 일대에서는 2002년부터 매년 5월에 논개의 업적을 기리고 기억하기 위한 논개제가 열리고 있다.

8. 논개 영정

2008년 2월 4일 문화체육관광부는 충남대학교 윤여환 교수가 그린 논개 영정을 정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하였다. 진주시는 표준영정 원본을 진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사본을 의기사에 봉안해 일반인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원래 의기사에는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미인도 논개' 그림의 사본이 걸려 있었으나, 2005년 6월 10일 한 진주 지역 시민단체가 김은호의 친일 행적을 문제삼아 의기사에 봉안되어 있던 논개 영정 사본을 무단으로 뜯어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논개의 출생지인 전북 장수군과 순국지인 경남 진주시가 공동으로 표준영정 제작에 합의해 전국에 걸쳐 공모를 하였으며, 윤여환 교수가 새로 그린 그림이 표준영정으로 채택되었다.

9. 문학 속의 논개

여러 문학 작품에서 논개를 다루고 있다. 변영로, 한용운, 고은, 임종성 등은 논개를 소재로 시를 썼으며, 모윤숙서사시 논개를 창작했다. 정약용은 촉석루에 올라 논개를 기리는 한시를 남겼다.

9.1. 시

* 변영로 - 《논개》
* 한용운 -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에》
* 고은 - 《논개》
* 임종성 - 《논개에게》

9.2. 서사시

모윤숙서사시 논개

9.3. 한시

다산 정약용은 촉석루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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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한국어 번역
矗石樓頭送客時 (촉석루두송객시)촉석루 머리에서 손님을 보낼 때
樓名矗石問誰知 (루명촉석문수지)촉석루 이름 뜻을 누가 알까
矗石夫人何處在 (촉석부인하처재)촉석부인은 어디에 계시는가
只應渢矗是天姿 (지응풍촉시천자)의당 빼어난 그 모습이 하늘거리는 자태이리

10.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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