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필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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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광필은 당나라 중종 연간에 태어나 안사의 난에서 활약한 장군이다. 거란 출신으로, 엄격하고 전략에 능했으며, 한서를 공부하고 기마술과 궁술에 뛰어났다. 현종 치세에 삭방 절도사의 규율관을 시작으로, 하서 부절도사를 거쳐 안사의 난 발발 후 하동 절도사가 되어 반란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환관의 참소를 두려워하여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말년을 불우하게 보냈다. 그는 뛰어난 군율로 명성을 얻었지만, 지나치게 엄격한 태도와 정치적 미숙함으로 인해 부하들의 신임을 잃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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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필 (당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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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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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광필 (李光弼) |
출생 | 708년 |
출생지 | 요주 유성 (현재의 랴오닝성 차오양시) |
사망 | 764년 8월 15일 (55–56세) |
사망 장소 | 서주 |
작위 | 임회왕 (臨淮王) |
시호 | 무목 (武穆) |
직업 | 군사 장군, 정치인 |
가계 | |
성씨 | 이 |
2. 생애
이광필은 엄격하고 의연하며 큰 계획을 가진 인물로, 《한서》를 읽고 기마술과 궁술에 능했다. 젊은 시절부터 군 복무를 시작하여 결단력 있고 엄격하며 전략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버지 이개락이 사망한 후에는 기군공 작위를 물려받았고, 상중에 아내와 성관계를 자제한 것으로 칭찬받았다.
현종 천보 연간 초, 삭방 절도사의 규율관이 되었고, 746년에는 왕충사에 의해 하서 절도사 휘하 적수군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고선지와 함께 왕충사의 핵심 장군으로 활약하며 "언젠가 이광필이 내 지휘권을 넘겨받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유능한 장군으로 명성을 얻었다. 749년 고선지 휘하에서 하서 부절도사가 되었고, 수군공 작위를 받았다. 752년에는 단우 부호군 대장이 되었으며, 755년 안사순의 요청으로 부관이 되려 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질병을 핑계로 장안으로 돌아갔다.
안사의 난 진압 이후, 어조은과 정원진 등 환관에게 누명을 쓸 것을 두려워하여 장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763년 가을 토번이 장안을 공격했을 때조차 구원하지 않았고,[7][11] 당 대종의 비위를 맞추려는 노력에도 응하지 않았다. 764년 여름, 대종에게 낙양을 맡겨졌음에도 서주를 떠나지 않았다. 명성을 얻었지만, 칙명을 여러 번 무시하여 평판과 인망을 잃었고, 764년 7월, 56세로 병사했다. 시호는 무목(武穆)이다.[7][11]
2. 1. 초기 생애
이광필은 영주(營州) 유성(柳城)에서 거란 출신 당나라 장수 이개락(李楷洛)의 아들로 태어났다.[7] 중종 경룡 2년(708년)에 태어났다.[7] 아버지 이개락은 현종의 개원 연간에 활약하여 영주도독이 되었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어머니는 거란 출신인 이개고(李楷固)의 딸이다. 이광필은 엄격하고 의연하며 큰 계획을 갖고 있었고, 《한서》(漢書)를 읽었으며, 기마와 궁술에 능했다.[7] 그는 젊은 시절부터 군 복무를 시작하여 결단력 있고 엄격하며 전략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2. 2. 안사의 난
755년 안록산이 범양절도사(范陽, 현대 베이징)로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켜 낙양으로 남진하자, 곽자의의 추천으로 하동절도사(河東, 현대 산시성 타이위안)가 되어 안록산군과 맞서 싸웠다. 756년 봄, 상산(常山, 대략 현대 허베이성 스자좡)을 함락시켰다.[2] 사사명이 반격해 오자 곽자의와 합류하여 격퇴했고, 이후 낙양과 범양 사이의 통신을 차단했다.
757년 봄, 사사명은 10만 대군으로 태원을 포위했으나, 이광필은 뛰어난 지략과 용맹으로 이를 격퇴하고 위공(후에 조공으로 개칭)에 봉해졌다.[7] 758년 초, 당 숙종이 장안을 탈환하자 사공에 임명되었다.[8]
759년, 삭방절도사가 되어 군권을 장악하고, 장용제를 처형하는 등 엄격한 군율을 확립했다. 사사명이 안경서를 죽이고 연나라 황제를 칭하며 남진하자, 낙양을 방어하지 못하고 하양(河陽)으로 후퇴했지만, 이후 반격을 통해 사사명의 진격을 저지했다.[9] 761년, 어조은과 복고회은의 낙양 탈환 작전에 반대했으나, 숙종의 명으로 참전했다가 연군에게 대패했다.
이후 임회(臨淮, 장쑤성 화이안시)에 주둔하며 사조의의 남진을 막고, 전신공, 상형, 은중경 등 여러 장수들을 복귀시키는 등 당나라의 세력을 재건하는 데 힘썼다. 762년, 당 대종 즉위 후 낙양 탈환 작전에 참여하여 사조의를 패주시켰다. 763년, 사조의가 자살하면서 안사의 난이 종식되었다.[10]
2. 3. 안사의 난 이후
안사의 난이 진압된 후, 이광필은 어조은과 정원진 등 환관에게 누명을 쓸 것을 두려워하여, 대종이 있는 장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정원진이 부장 래진에게 자결을 명령한 것을 두려워하여 광덕 원년(763년) 가을에 토번이 장안을 공격했을 때조차 구원하지 않았다.[7][11] 대종은 이광필의 친족을 우대하는 것으로 비위를 맞추려 했지만, 이광필은 응하지 않았다. 764년 여름, 대종에게 낙양을 맡겨졌음에도 서주를 떠나지 않았다. 이광필은 명성을 얻었지만, 칙명을 여러 번 무시했기 때문에 평판이 떨어지고 인망을 잃었다. 광덕 2년(764년) 7월, 56세로 병사했다. 시호는 무목(武穆)이다.[7][11]3. 평가
이광필은 안사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명장이었지만, 몇 가지 비판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당나라 부흥에 기여했다. 엄격한 군율과 뛰어난 전략을 바탕으로 당나라 군대의 전투력을 향상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2] 그러나 지나치게 강경한 태도는 부하 장수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특히, 환관의 참소를 두려워하여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점은 비판받는 부분이다.[3] 어초은이 군대 조사관으로 임명된 후, 이광필은 예현 방어에 대한 전면 공격을 제안했으나, 어초은은 이를 반대했다. 또한 761년 봄, 어초은과 보고회은이 낙양 탈환 작전을 제안했을 때도 이광필은 반대했지만, 당 대종의 명령에 따라 결국 장안으로 진격해야 했다.[3]
3. 1. 긍정적 평가
안사의 난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반란군을 진압하고 당나라의 재건에 크게 기여했다.[2] 그는 엄격한 군율과 공정한 상벌을 통해 군대의 기강을 확립하고 전투력을 강화했으며, 뛰어난 전략과 전술을 바탕으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여 당나라의 영토를 회복하고 백성들의 안전을 지켰다.[3]3. 2. 부정적 평가
이광필은 환관 어초은의 참소를 지나치게 두려워하여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어초은이 당나라 군대의 조사관으로 임명된 후, 이광필은 예현(鄴縣) 방어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제안했지만 어초은은 이를 반대했다.[3] 또한,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등 정치적으로 미숙한 모습을 보였다. 761년 봄, 어초은과 보고회은(僕固懷恩)은 낙양 탈환 작전을 제안했고, 이광필은 이에 반대했으나 당 대종은 이광필에게 낙양 공격을 명령했다. 이광필은 망설였지만 결국 명령에 따라 장안으로 진격했다.[3]토번의 침입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나치게 엄격한 군율로 인해 부하 장수들의 불만을 샀으며, 결국에는 인망을 잃게 되었다. 삭방군은 이광필의 엄격한 스타일에 불만을 품었고, 장군 장용제(張用濟)는 이광필을 강제로 내쫓고 곽자의 복귀를 요구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이광필은 이를 알아차리고 장용제를 체포하여 처형했다.[3]
4. 가족 관계
참조
[1]
웹사이트
兩千年中西曆轉換
http://www.sinica.ed[...]
[2]
웹사이트
vol. 62
http://www.sidneyluo[...]
New Book of Tang
2008-09-22
[3]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4]
서적
vol. 223
https://zh.wikisourc[...]
Zizhi Tongjian
[5]
웹사이트
vol. 136
http://www.sidneyluo[...]
New Book of Tang
2007-12-26
[6]
서적
五胡興華:形塑中國歷史的異族
https://www.google.c[...]
知書房
[7]
서적
旧唐書
[8]
서적
資治通鑑
[9]
서적
資治通鑑
[10]
서적
資治通鑑
[11]
서적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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