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금룡
1. 개요
이금룡은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시대를 거쳐 활동한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배재학당과 조선배우학교를 거쳐 1926년 조선키네마에 입사하여 영화계에 데뷔했다. 나운규프로덕션의 창립작 《잘 있거라》에서 조연으로 출연했으며, 《아리랑》에도 참여했다. 이후 《들쥐》, 《사랑을 찾아서》 등 반일 성향의 영화에 출연했고, 1930년에는 《어사 박문수전》을 연출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1930년대 후반 배우로 복귀하여 활동했으며, 무성 영화 배우 출신으로 발성 영화 시대까지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친일 영화에 출연하여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춘향전》 등에 출연했으며, 마지막 출연작인 《열애》 촬영 중 사망했다. 그의 업적을 기려 금룡상이 제정되었다.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이름 | 이금룡 |
|---|---|
| 출생일 | 1906년 6월 16일 |
| 출생지 | 대한제국 한성부 |
| 사망일 | 1955년 4월 3일 (향년 48세) |
| 사망지 | 대한민국 |
| 국적 | 대한제국→대한민국 |
-
일제강점기의 영화 각본가 -
안석주
안석주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삽화가, 만화가, 영화감독, 작사가로, 미술, 영화, 문학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시사만화 연재와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알렸으나, 친일 행적과 광복 후 우익 언론 활동, 〈우리의 소원〉 작사 등의 행적을 남겼다. -
일제강점기의 영화 각본가 -
이규환 (영화 감독)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활동한 이규환은 《임자 없는 나룻배》로 데뷔하여 문예봉을 스타덤에 올리고, 해방 후에는 《춘향전》을 연출하여 전후 한국 영화 부흥을 이끈 영화 감독으로, 그의 영화는 민족주의, 서정적 리얼리즘, 향토색 등의 특징을 지닌다. -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김웅 (정치인)
-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정진석 (정치인)
-
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 -
이순재
이순재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대한민국의 배우이자 전직 국회의원으로, 1956년 연극으로 데뷔하여 60년 이상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고, 드라마 '거침없이 하이킥',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 등에 출연했으며 국회의원과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하고 예능 출연 및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
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 -
양동근
양동근은 1987년 아역 배우로 데뷔하여 드라마와 영화에서 활동하며 YDG aka Madman이라는 예명으로 힙합 가수로도 데뷔하여 독특한 스타일과 개성 있는 음악으로 입지를 다진 대한민국의 배우이자 힙합 래퍼이다.
2. 생애
배재학당을 수료하고 조선배우학교에서 연기 공부를 시작했다. 1926년 조선키네마에 입사해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1927년 나운규가 설립한 나운규프로덕션의 창립작 《잘 있거라》에서 부호이자 색마인 민범식 역으로 데뷔했다. 나운규와는 《아리랑》(1926)을 찍은 조선키네마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다.
《들쥐》(1927)와 《사랑을 찾아서》(1928) 등 반일 정서가 담긴 영화에 출연했으며, 《사랑을 찾아서》에서 나팔수 역을 맡은 후 노역 전문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나운규프로덕션의 핵심 배우였으나, 1929년 경영 악화로 인한 나운규와의 불화로 프로덕션을 탈퇴했다. 1930년에는 《어사 박문수전》을 연출했으나 흥행에 실패해 배우로만 활동했다.
1932년부터 약 3년간 공백기를 가진 뒤 안종화의 《역습》으로 복귀, 193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배우로 활약했다. 무성 영화에서 발성 영화로의 전환기에도 살아남은 배우 중 한 명으로, 박기채는 그를 겸손하고 온후하며 과묵한 성품이라고 평가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지원병》(1941), 《젊은 모습(若き姿일본어)》(1943), 《병정님》(1944) 등 친일 영화에 출연하여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해방 후 이규환의 《춘향전》(1955)에서 변사또 역을 맡았고, 홍성기의 《열애》(1955)가 마지막 작품이다. 《열애》 촬영 중 사망하자 동료 배우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금룡상을 제정했다.
2.1. 초기 활동 (1926년 ~ 1930년대 초)
배재학당을 수료하고 조선배우학교에서 연기 공부를 시작했다. 조선배우학교가 폐교한 뒤 1926년에 조선키네마에 입사해 본격적으로 영화계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27년 나운규가 나운규프로덕션을 세우고 창립작으로 제작한 《잘 있거라》(1927)에서 부호이자 색마인 민범식 역으로 데뷔하여 나운규프로덕션에서 활동했다. 나운규와는 《아리랑》(1926)을 찍은 조선키네마 시절부터 함께한 사이였다. 《아리랑》에 단역으로 출연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본인의 회고에서는 《아리랑》이 개봉된 뒤 조선키네마에 입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반일 정서를 담아 정치색이 짙은 영화였던 《들쥐》(1927)와 《사랑을 찾아서》(1928)에 출연했으며, 《사랑을 찾아서》에서 노역인 나팔수 역을 맡은 이래 노역을 전담했다. 이금룡은 나운규프로덕션의 전 작품에 출연한 핵심 배우였다.
그러나 1929년 경부터 불황과 함께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중심 인물인 나운규와 동인들 사이의 불화가 불거졌다. 이때 이금룡을 비롯한 여러 동인들이 나운규를 비판하고 나운규프로덕션을 탈퇴하였다. 1930년에는 자신이 시나리오를 쓴 《어사 박문수전》을 연출했으나,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이후 영화 배우로만 활동했다.
2.2. 공백기와 복귀 (1930년대 초 ~ 1930년대 후반)
1926년 조선키네마에 입사하여 영화계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32년부터 약 3년 동안 공백기를 가졌다가 안종화의 《역습》에 출연하면서 복귀했다. 이후 활발하게 활동하여 193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배우 중 한 명이 되었다. 무성 영화 배우 가운데 발성 영화 등장 이후까지 살아남은 배우이기도 하다. 박기채는 이금룡을 겸손하고 온후한 성품이며 과묵하다고 평했다.
2.3. 친일 행적 논란 (1940년대)
일제 강점기 말기에 《지원병》(1941), 《젊은 모습(若き姿일본어)》(1943), 《병정님》(1944) 등 친일 영화에 출연하여,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