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박기채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에 활동한 대한민국의 영화감독이다. 일본 도시샤 대학에서 수학하고 동아키네마에서 영화를 공부한 후, 1935년 《춘풍》으로 데뷔하여 이광수의 소설 《무정》을 영화화하며 문예 영화의 흐름을 주도했다. 1937년에는 조선 영화 주식회사를 창립하여 《무정》을 제작했으나, 일제강점기 말에는 친일 영화를 제작했다. 광복 후 좌우익 영화 단체에 참여했으나, 우익 영화인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밤의 태양》을 연출했다. 한국 전쟁 중 납북된 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선영화동맹의 인물 - 문예봉
문예봉은 일제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배우로,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로 데뷔하여 《춘향전》에서 춘향 역을 맡아 스타덤에 올랐으며, 월북 후 북한에서 공훈배우로 활동하다 사망했다. - 조선영화동맹의 인물 - 안종화
안종화는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이후까지 활동한 영화감독, 연극연출가, 배우로서 한국 영화 초창기 작품들을 연출하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나, 일제강점기 말기 친일 행적과 광복 후 우익 계열 활동으로 논란이 된 인물이다. - 일제강점기의 영화 각본가 - 안석주
안석주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삽화가, 만화가, 영화감독, 작사가로, 미술, 영화, 문학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시사만화 연재와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알렸으나, 친일 행적과 광복 후 우익 언론 활동, 〈우리의 소원〉 작사 등의 행적을 남겼다. - 일제강점기의 영화 각본가 - 이규환 (영화 감독)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활동한 이규환은 《임자 없는 나룻배》로 데뷔하여 문예봉을 스타덤에 올리고, 해방 후에는 《춘향전》을 연출하여 전후 한국 영화 부흥을 이끈 영화 감독으로, 그의 영화는 민족주의, 서정적 리얼리즘, 향토색 등의 특징을 지닌다. - 일제강점기의 영화감독 - 안석주
안석주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삽화가, 만화가, 영화감독, 작사가로, 미술, 영화, 문학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시사만화 연재와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알렸으나, 친일 행적과 광복 후 우익 언론 활동, 〈우리의 소원〉 작사 등의 행적을 남겼다. - 일제강점기의 영화감독 - 나운규
나운규는 일제강점기 영화감독이자 배우, 각본가로, 영화 《아리랑》을 통해 조선인의 저항 의식을 고취하며 한국 영화사에 큰 획을 그었으나, 민족주의적 영화 제작 중 조선총독부의 탄압과 건강 악화로 요절한 독립운동가이다.
박기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박기채 |
본명 | 알 수 없음 |
출생일 | 1906년 7월 24일 |
출생지 | 대한제국 전라남도 광주 |
사망일 | 알 수 없음 |
사망지 | 알 수 없음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직업 | 영화 감독, 각본가 |
종교 | 알 수 없음 |
활동 기간 | 알 수 없음 |
배우자 | 알 수 없음 |
자녀 | 알 수 없음 |
수상 | 알 수 없음 |
웹사이트 | 알 수 없음 |
2. 생애
전라남도 광주 출신으로 1927년경 일본 도시샤 대학에서 수학했다. 1930년 교토시에 있는 동아키네마에 의탁생으로 입사하여 영화 촬영을 공부했다. 1935년 양세웅과 함께 귀국한 뒤 《춘풍》을 연출해 데뷔했고, 이광수의 소설 《무정》을 영화화해 주목받았다. 박기채는 문예 영화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주도한 감독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영화계는 발성 영화 등장으로 제작비가 크게 상승하면서 영화 기업화론이 대두되었다. 박기채는 대규모 스튜디오를 창설하여 조선 영화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7년 안석영, 최남주와 함께 조선 영화 주식회사를 창립, 창립작 《무정》은 비평과 흥행 모두 성공을 거두었으며, 박기채의 연출 기법을 둘러싼 박기채-서광제 논쟁까지 불러온 화제작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나는 간다》(今ど我は行|곤도와레와유쿠|나는 간다일본어)(1942년)와 《조선해협》(1943년) 등 친일 영화를 감독했다. 두 영화는 모두 태평양 전쟁에 참전할 것을 부추기는 국책 영화이다. 특히 징병제 실시 기념으로 제작된 《조선해협》은 지원병으로 참전한 형이 전사한 뒤에 동생이 그 뒤를 잇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친일 영화로 꼽힌다.
광복 직후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영화 부문과 조선영화건설본부에 참여했으며, 1945년 말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과의 통합으로 발족한 조선영화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다. 그러나 조선영화동맹의 좌경화로 안석영 등 우익 영화인들은 이듬해 3월 탈퇴하고 영화감독구락부를 결성, 박기채도 여기에 참가하여 우익 영화인으로 분류되었다.
광복 후에는 경찰 홍보 영화 《밤의 태양》(1948) 한 편만을 연출했는데, 신문 기자의 모습을 왜곡했다는 이유로 수도청 기자단이 반발하면서 진통을 겪기도 했다.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1]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2. 1. 일본 유학과 영화계 입문 (1920년대 ~ 1930년대 초)
전라남도 광주 출신으로 1927년경 일본 도시샤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30년 교토시에 있는 동아키네마에 의탁생으로 입사하여 영화 촬영을 공부했다.[1]2. 2. 문예 영화와 발성 영화 도입 (1930년대 중반 ~ 1930년대 후반)
1935년 양세웅과 함께 귀국하여 유명 문예인들이 발기인으로 참가한 《춘풍》을 연출하며 데뷔했고, 이광수의 소설 《무정》을 영화화하여 주목받는 신진 감독이 되었다. 《무정》은 한은진의 첫 출연작이기도 하다. 박기채는 문예 영화라는 새로운 흐름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주도한 감독 중 한 명이었다.당시 영화계의 또 다른 흐름은 영화 기업화론이었다. 발성 영화 등장으로 제작비가 크게 상승하면서 이전 제작 방식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박기채는 대규모 스튜디오를 창설하여 조선 영화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석영, 최남주와 함께 발성 영화 촬영소를 설립하고자 실업가들의 지원을 받아 1937년 조선 영화 주식회사를 창립하였고, 창립작 《무정》은 비평과 흥행 모두 성공을 거두었으며, 박기채의 연출 기법을 둘러싼 박기채-서광제 논쟁까지 불러온 화제작이 되었다.[1]
2. 3. 조선 영화 주식회사 설립과 활동 (1937년 ~ )
1937년 안석영, 최남주와 함께 발성 영화 촬영소 설립을 목표로 실업가들의 지원을 받아 조선 영화 주식회사를 창립했다. 박기채는 대규모 스튜디오를 창설하여 조선 영화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진 그룹 중 한 명이었다.[1] 조선 영화 주식회사의 창립작으로 촬영한 이광수 원작의 《무정》은 비평과 흥행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었으며, 박기채의 연출 기법을 둘러싸고 박기채-서광제 논쟁까지 불러온 화제작이 되었다.[1]2. 4. 일제 강점기 말 친일 영화 제작 (1940년대 초 ~ 1945년)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친일 영화를 감독했다. 今ど我は行|곤도와레와유쿠|나는 간다일본어(1942년)와 조선해협(1943년) 두 편으로, 모두 태평양 전쟁에 참전할 것을 부추기는 내용의 국책 영화이다.[1] 특히 징병제 실시 기념으로 제작된 《조선해협》은 지원병으로 참전한 형이 전사한 뒤에 동생이 그 뒤를 잇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본격적인 친일 영화로 꼽히고 있다.[1]2. 5. 광복 후 활동과 우익 영화인으로의 행보 (1945년 ~ 1950년)
1945년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영화 부문과 조선영화건설본부에 참여했고,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과의 통합으로 발족한 조선영화동맹의 중앙집행위원도 맡았다. 그러나 조선영화동맹의 좌경화로 안석영을 비롯한 우익 영화인들은 이듬해 3월 조선영화동맹을 탈퇴하고 영화감독구락부를 결성하였으며, 박기채도 여기에 동인으로 참가하여 대표적인 우익 영화인으로 분류되었다.[1]광복 후에는 경찰 홍보 영화로 형사들이 밀수단을 일망타진한다는 줄거리의 《밤의 태양》(1948) 한 편만을 연출했는데, 이 영화가 신문 기자의 모습을 왜곡되게 그렸다는 이유로 수도청 기자단이 반발하면서 진통을 겪기도 했다.[1]
2. 6. 한국 전쟁 중 납북 (1950년 ~ )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1]3. 친일 논란
일제 강점기 말기에 《나는 간다》(今ど我は行|이마도 와레와 유쿠일본어, 1942년)와 《조선해협》(1943년) 등의 친일 영화를 감독했다. 이 영화들은 모두 태평양 전쟁에 참전할 것을 부추기는 내용의 국책 영화이다.[1] 특히 징병제 실시 기념으로 제작된 《조선해협》은 지원병으로 참전한 형이 전사한 뒤에 동생이 그 뒤를 잇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본격적인 친일 영화로 꼽힌다.[1]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1]
4. 평가
박기채는 한국 영화 초창기 발전에 기여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친일 영화를 감독한 행적은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다.[1] 특히 징병제 실시를 기념하여 제작된 《조선해협》(1943년)은 지원병으로 참전한 형이 전사한 뒤 동생이 그 뒤를 잇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본격적인 친일 영화로 꼽힌다.[1]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다.[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