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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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종화는 서라벌예술초급대학 학장과 중앙대학교 초빙교수를 역임한 영화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한성부 명문가 출신으로, 1922년 연극단체 예림회에서 문예부장으로 활동하며 예술계에 입문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영화 배우로 활동하며, 1927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가담하고 1928년 최초의 카프 영화 《유랑》을 제작했다. 1930년대에는 《청춘의 십자로》 등 한국 영화 맹아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 말기 친일 영화 제작을 주도했으며, 광복 후에는 우익 계열에서 활동하며 한국영화인협회 결성을 주도했다. 서라벌예술대학 학장을 지냈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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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종화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안종화 |
| 원어명 | 安鍾和 |
| 본명 | 안용희 (安龍熙) |
| 출생일 | 1902년 1월 21일 |
| 출생지 | 대한제국 한성부 |
| 종교 | 개신교(예장합동) |
| 사망일 | 1966년 8월 21일 |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 직업 | 시인 극작가 배우 연극연출가 영화감독 영화 연출가 문학평론가 영화평론가 시사평론가 |
| 학력 | 경성교동보통학교 졸업 |
| 활동 기간 | 1920년 ~ 1966년 |
| 친척 | 안석영(7촌 조카) 안병원(삼종손) |
2. 주요 대표 경력
안종화는 서라벌예술초급대학 학장, 중앙대학교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2. 1. 학계 경력
- 서라벌예술초급대학 학장
- 중앙대학교 초빙교수
3. 생애
안종화는 한성부에서 태어나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신교육을 받으며 문예에 재능을 보였다. 1922년 일본 도쿄 유학생들이 함경남도 함흥부에서 창립한 연극단체 예림회(藝林會) 문예부장을 맡으며 공연예술계에 들어섰다.[2] 아버지 몰래 함흥으로 가 예림회 활동을 하다 해체된 후, 부산 무대예술연구회에 참가했다. 이 단체가 조선키네마주식회사로 흡수되면서 영화계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3]
1925년 《해의 비곡》에 출연하며 배우로 활동했고, 1927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산파 역할을 한 조선영화예술협회에 가담, 1928년 최초의 카프 영화 《유랑》을 제작했다. 1930년대에는 《꽃장사》, 《노래하는 시절》, 《청춘의 십자로》 등을 연출하며 한국 영화 초창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영화는 안종화의 《청춘의 십자로》이다.[4]
일제강점기 말기 조선영화협단을 조직하고 조선영화인협회 임원을 지내며 친일 영화 제작을 독려했다. 《매일신보》에 친일 논설을 싣고, 영화인기능심사위원회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 황도학회와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을 역임하는 등 영화계에서 친일 행적이 뚜렷하여,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 명단에 포함되었다.
광복 후 1945년 조선영화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으나,[5] 좌익 계열 영화인들이 주도권을 잡자 영화감독구락부에 참가[6]하는 등 우익 계열에서 활동했다. 한국영화인협회 전신인 대한영화협의회 조직을 주도했고, 서라벌예술대학 학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지냈으며 문화훈장을 받았다.
1930년 감독 데뷔 후 광복 후에는 《사도세자》 (1956), 《천추의 한》 (1956), 《춘향전》 (1958) 등 사극을 주로 만들었다. 이만희 감독이 그의 조감독 출신이다.[7] 저서로는 《신극사 이야기》(1955)가 있다.
3. 1. 초기 생애 (1896년 ~ 1922년)
한성부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우다가 신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문예 방면에서 재능을 보였다. 1922년 일본 도쿄에 있던 조선인 유학생들이 함경남도 함흥부에서 창립한 연극단체 예림회(藝林會)에서 문예부장을 맡아 공연예술계에 들어섰다.[2] 안종화는 아들이 예술 분야에서 일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 아버지 몰래 함흥으로 간 것이었다.3. 2. 연극계 활동 (1922년 ~ 1925년)
1922년 일본 도쿄에 체류 중이던 조선인 유학생들이 함경남도 함흥부에서 창립한 연극단체 예림회(藝林會)에서 문예부장을 맡아 공연예술계에 모습을 드러냈다.[2] 이때 안종화는 아들이 예술 분야에서 일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몰래 함흥으로 간 것이었다.예림회가 해체된 뒤 부산에 잠시 내려가 무대예술연구회에 참가했다가 이 단체가 일본인이 세운 영화사인 조선키네마주식회사로 흡수되면서 영화계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3] 1925년 제주도에서 촬영된 《해의 비곡》에 아버지와 아들의 1인 2역으로 출연하는 등 1920년대 중반부터 영화 배우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3. 3. 영화계 활동 (1925년 ~ 1945년)
1925년 제주도에서 촬영된 《해의 비곡》에 아버지와 아들 1인 2역으로 출연하는 등 1920년대 중반부터 영화 배우로 활발히 활동했다.[2] 1927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산파 구실을 한 조선영화예술협회에 가담했고, 1928년 최초의 카프 영화인 《유랑》을 제작했다. 1930년대에는 《꽃장사》, 《노래하는 시절》, 《청춘의 십자로》, 《은하에 흐르는 정열》, 《역습》, 《인생항로》 등을 연출하여, 한국 영화 맹아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영화인이었다. 2008년 기준으로 대한민국 국내에 현존하는 극영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도 안종화의 《청춘의 십자로》이다.[4] 신파극 정서에서 벗어나 신극 보급에 노력했다.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어용 단체인 조선영화협단을 조직하고 내선일체를 표방하는 조선영화인협회 임원을 지내며 친일 영화 제작을 독려했다. 《매일신보》에 〈신체제에 순응하는 조선영화의 장래〉, 〈전환쇄신의 시 영화의 국가사명〉과 같은 친일 논설을 싣기도 했다. 특히 조선영화인협회가 검열을 담당하고 친일 활동을 실무적으로 전담할 수 있도록 산하 조직으로 설치한 영화인기능심사위원회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3. 4.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 (1940년 ~ 1945년)
일제 강점기 말기, 안종화는 어용 단체인 조선영화협단을 조직하고 내선일체를 표방하는 조선영화인협회의 임원을 맡아 친일 영화 제작을 독려했다. 《매일신보》에 〈신체제에 순응하는 조선영화의 장래〉, 〈전환쇄신의 시 영화의 국가사명〉과 같은 친일 논설을 싣기도 했다.[2] 조선영화인협회가 검열을 담당하고 친일 활동을 실무적으로 전담할 수 있도록 산하 조직으로 설치한 영화인기능심사위원회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영화 외에도 친일 단체인 황도학회와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을 역임하여, 영화계에서는 친일 행적이 뚜렷한 편에 속한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3. 5. 광복 후 활동 (1945년 ~ 1966년)
광복 후 안종화는 1945년 말 결성된 조선영화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다.[5] 그러나 영화동맹의 주도권을 좌익 계열 영화인들이 잡게 되면서, 이에 반발한 영화인들의 모임인 영화감독구락부에 참가[6] 하는 등 우익 계열에서 활동했다. 한국영화인협회의 전신인 대한영화협의회가 조직될 때도 이를 주도했다. 이후 서라벌예술대학 학장을 지냈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문화훈장도 수여받았다.1930년 《꽃장사》와 《노래하는 시절》을 연출해 감독으로 데뷔한 이래 광복 후에는 《사도세자》 (1956), 《천추의 한》 (1956), 《춘향전》 (1958) 등 사극 및 시대극을 주로 만들었다. 안종화의 조감독으로 연출 수업을 받은 제자 중에는 이만희가 있다.[7] 저서로 초창기 연극계를 다룬 회고록 《신극사 이야기》(1955)가 있다.
4. 평가
안종화는 일제강점기 한국 영화의 맹아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영화인으로 평가받는다. 1920년대 예림회 문예부장으로 공연예술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배우와 감독으로 활발히 활동하며 초기 한국 영화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1930년대에는 《꽃장사》, 《노래하는 시절》, 《청춘의 십자로》 등 다수의 영화를 연출하여 한국 영화의 기틀을 다졌다. 2008년 기준으로 대한민국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영화도 안종화의 《청춘의 십자로》이다.[4] 또한, 신파극 정서에서 벗어난 신극 보급에도 힘썼다.
광복 후 조선영화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으나, 좌익 계열 영화인들이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영화감독구락부에 참가하는 등 우익 계열에서 활동했다.[5][6] 한국영화인협회의 전신인 대한영화협의회를 주도했고, 서라벌예술대학 학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며 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1930년 감독 데뷔 이후 광복 후에는 《사도세자》 (1956), 《천추의 한》 (1956), 《춘향전》 (1958) 등 사극 및 시대극을 주로 만들었다. 그의 조감독으로 연출 수업을 받은 제자 중에는 이만희가 있다.[7]
4. 1. 부정적 평가
안종화는 일제 강점기 말기 조선영화협단이라는 어용 단체를 조직하고, 내선일체를 표방하는 조선영화인협회 임원을 지내며 친일 영화 제작을 독려하는 등 영화계에서 친일 행적이 뚜렷한 편이었다.[4] 《매일신보》에 〈신체제에 순응하는 조선영화의 장래〉, 〈전환쇄신의 시 영화의 국가사명〉과 같은 친일 논설을 싣기도 했다. 조선영화인협회가 검열을 담당하고 친일 활동을 실무적으로 전담할 수 있도록 산하에 설치한 영화인기능심사위원회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영화 외에도 친일 단체인 황도학회와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을 역임했다.이러한 행적 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4]
참조
[1]
뉴스
映畵監督 安鍾和씨
http://gonews.kinds.[...]
동아일보
2008-07-02
[2]
뉴스
불꽃처럼 타버린 서글픈 천재 - [한국영화스타 1] 춘사 나운규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8-05-12
[3]
뉴스
영화로 혁명을 꿈꾼 사나이 - [한국영화스타6-①] 영화 배우 주인규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8-06-11
[4]
뉴스
현존 最古 한국 극영화 '청춘의 십자로' 발굴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08-03-04
[5]
서적
한국영화사연구
새미
2003-02-03
[6]
서적
한국현대 예술사대계 1 (해방과 분단 고착 시기)
시공사
1999-12-22
[7]
뉴스
이만희의 영화세계가 궁금하십니까? - [FILM FESTIVAL] 이만희 감독 전작전 '영화천재 이만희'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008-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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