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로스
1. 개요
이나로스는 기원전 460년경 페르시아 제국에 대항하여 이집트에서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사이스 출신 아미르타이오스의 지원을 받아 세금 징수관과 용병들을 몰아내고 반란을 시작했다. 아테네의 지원을 받은 이나로스는 팜프리미스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페르시아군의 반격으로 멤피스에서 포위되었고, 결국 메가비주스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수사로 끌려간 그는 아메스트리스의 요구로 처형당했다. 이나로스의 반란은 이집트 민족주의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나로스 1세와 2세는 문헌에서 종종 혼동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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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호 | 이집트 통치자 |
|---|---|
| 통치 기간 | 기원전 460년경 |
| 선임자 | 프삼메티쿠스 4세 |
| 왕조 | 사이스 왕조 |
| 사망일 | 기원전 454년경 |
| 사망 장소 | 수사, 페르시아 |
| 부친 | 프삼메티쿠스 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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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반란자 -
카모세
카모세는 이집트 제17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힉소스 왕조에 맞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통일을 시도했으며, 그의 치세는 힉소스 왕조와의 갈등, 누비아 원정, 석비와 유물, 그리고 훼손된 미라를 통해 알려져 있다. -
이집트의 반란자 -
아라비 파샤
아라비 파샤는 19세기 이집트에서 군대 내 개혁과 민족주의적 개혁을 요구하며 시위를 주도하고 군부 대표로 활동했으나, 외세의 침공으로 유배된 후 이집트 민족주의의 아버지로 재평가받은 군인이자 민족주의 운동가이다. -
십자가형된 사람 -
필립보
필립보는 갈릴래아 베싸이다 출신으로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명이며, 본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고, 나타나엘을 예수에게 인도하였으며, 오병이어 기적, 헬라인들과의 만남 주선, 아버지에 대한 질문 등으로 복음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외경과 유물, 그리고 여러 교파에서 성인으로 공경받는다. -
십자가형된 사람 -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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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세기 파라오 -
크세르크세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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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세기 파라오 -
다리우스 2세
다리우스 2세는 기원전 423년부터 404년까지 아케메네스 제국을 통치한 왕으로, 제국 안정과 국력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지방 총독들의 반발, 왕실 내부 권력 다툼, 잦은 전쟁 등으로 제국은 쇠퇴했다.
2. 반란과 여파
이나로스 2세는 나일강 삼각주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페르시아의 조세 징수원을 몰아내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사이스 출신의 아미르타이오스의 도움을 받아 용병을 모으고 세금 징수원들을 몰아냈다. 이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암살 이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아테네는 이나로스 2세에게 100척의 삼단 노선을 지급받고, 카리티미데스가 이끄는 200척 이상의 군함과 군대를 파견하여 그를 지원했다. 이집트-아테네 연합군은 팜프리미스 전투에서 아카마이메네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을 격파하고 그를 죽이는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는 일시적이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카리미데스는 전사했고, 이나로스 2세는 허벅지에 부상을 입고 뷔블로스로 퇴각했다. 뷔블로스는 메가비주스에게 항복하지 않은 유일한 도시였다. 결국 1년 6개월 간의 전투 끝에 이나로스 2세는 메가비주스에게 패배하여 그리스인들과 함께 수사로 압송되었다.
2.1. 팜프리미스 전투 (기원전 460년)
기원전 460년, 이나로스 2세가 이끄는 이집트 반란군은 아테네의 지원을 받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형제이자 태수인 아카마이메네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대와 팜프리미스에서 격돌했다.
디오도루스에 따르면, 아테네 군이 도착하자 이집트 군과 아테네 군은 페르시아 군과의 전투를 받아들였다. 반란군은 아카이메네스가 이끄는 40만 명의 보병과 80척의 함선으로 구성된 페르시아 군과 맞섰다. 처음에는 페르시아 군의 수가 많아 유리했지만, 결국 아테네 군이 페르시아 군 진영을 돌파하면서 페르시아 군은 패주했다. 아카이메네스는 이 전투에서 40만 명 중 10만 명의 병력과 함께 패배하여 전사했다. 페르시아 군은 멤피스로 후퇴했다.
아테네 함대를 이끌던 사령관 카리티미데스와 키몬은 해전에서 페르시아 군과 격돌했다. 40척의 그리스 배가 50척의 페르시아 배와 교전하여, 20척을 선원들과 함께 사로잡았고, 나머지 30척은 침몰시켰다. 반란군은 승리를 과시하기 위해 태수 아카이메네스의 시체를 페르시아 왕에게 보냈다.
2.2. 멤피스 공방전 (기원전 459-455년)
팜프리미스 전투에서 패배한 페르시아군은 멤피스로 후퇴하여 방어전을 펼쳤다. 이집트-아테네 연합군은 멤피스를 포위 공격했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이 포위전은 최소 4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아테네-이집트 연합군은 포위 공격을 잘 수행해내지 못했다.
2.3. 프로소피티스 공방전 (기원전 455년)
기원전 455년, 페르시아의 메가비주스가 이끄는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전세는 다시 페르시아 쪽으로 기울었다. 이집트-아테네 연합군은 나일강 삼각주의 프로소피티스 섬에 함선을 정박시키고 저항했다. 메가비주스는 18개월 동안 그들을 포위했고, 마침내 운하를 파서 섬 주변의 강물을 빼내어 "섬을 본토에 연결"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군은 그 후 이전 섬으로 건너가 섬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아테네군은 거의 전멸당했고, 살아남은 소수만이 리비아를 거쳐 키레네로 행군하여 아테네로 돌아갈 수 있었다. 디오도로스는 강물 배수로 인해 이집트인들이 페르시아에 항복했고, 페르시아는 아테네군에게 많은 사상자를 내고 싶지 않아 키레네로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고 기록했다. 이집트 원정의 패배로 아테네가 델로스 금고를 옮긴 점을 볼 때, 투키디데스의 기록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한편, 뷔블로스에 있던 이나로스는 메가비주스에게 항복하지 않고 저항했으나 결국 붙잡혀 수사로 후송되었다.
2.4. 후퇴와 체포
카리미데스는 전투에서 사망했고, 이나로스는 페르시아 군에게 허벅지를 부상당해 그의 요새이자 메가비주스에게 항복하지 않은 유일한 이집트 도시인 비블로스로 퇴각했다. 1년 반 동안 늪지에서 싸운 후, 이나로스는 메가비주스에게 패배했다. 그는 남은 그리스인들과 함께 수사로 포로로 끌려갔다.
3. 처형
메가비주스는 이나로스 2세와 그에게 가담한 그리스 반란군에게 수사에 도착하면 처형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왕비 아메스트리스는 아들 아케메네스를 죽인 것에 대한 복수로 이들의 처형을 강력히 요구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처음에는 약속을 지키려 했으나, 5년간의 간청 끝에 이나로스 2세와 50명의 그리스인을 아메스트리스에게 넘겨주었다.
이나로스 2세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크테시아스는 포티오스 1세를 통해 이나로스 2세가 세 개의 말뚝에 꿰뚫려 처형되었고, 다른 50명의 그리스인은 참수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의 처형 방법을 묘사하는 그리스어 '아네스타우로테'(anestaurothe)는 말뚝형이나 십자가형을 모두 의미할 수 있어, 정확한 처형 방식은 역사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투키디데스는 휴전 없이 이나로스 2세가 기원전 454년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