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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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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대위는 평안남도 강서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미국으로 이민하여 미주 한인 사회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1903년 친목회 결성을 시작으로 공립협회, 상항한인감리교회, 대한인국민회 창립에 참여하여 항일운동과 동포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회장, 신한민보 주필 등을 역임하며 한인 사회 결속을 강화하고, 한글식자기를 발명하여 신문 발행에 기여했다. UC버클리대학교를 졸업하고 구미위원부 사무장으로 외교 활동을 펼치다 과로로 사망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 생애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2. 1. 미주에서의 독립 투쟁

1903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장경 등과 함께 미주 한인단체의 효시인 친목회를 결성하고 동포 간 연락과 친목을 위주로 활동하면서 한인사회의 생활개선운동을 전개하였다.[1] 1905년 4월 안창호 등과 함께 미주 최초의 민족운동기관인 공립협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과 동족상애를 목적으로 활동하였고, 1906년 4월에는 상항(샌프란시스코)한인감리교회를 창립하여 한인 동포들의 구호사업, 교육계몽운동, 직업 알선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1] 1908년 12월 상항한인감리교회에서 미국 내 한국어 출판의 효시인 『대도보』라는 주보를 발행하여 국내외 정세를 전달하고, 기독교 복음 전도 및 교포 교양에 공헌하였다.[1]

1909년 2월 미주 공립협회 대표로 참석하여 미주 유일의 통일적 한인민족운동기관인 대한인국민회를 창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1] 1910년 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고, 그해 7월 일제의 한국 강점이 현실화되자,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명의로 애국동맹단을 조직하고, 번역원으로 선임되어 하와이 지방총회와 연서로 일본 왕에게 한국 강점을 강력히 반대하는 서한을 발송하였다.[1] 또한 국권회복을 위해 각 지방에 독립군양성소를 설립하고 재원 마련에 노력하는 한편, 미국으로 망명해오는 애국지사와 신도(새로 건너온) 유학생들을 위해 신원보증을 서거나 이민국 수속을 위해 대변인으로 헌신하였다.[1]

2. 2. 미주 한인사회의 지도자

1913년 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회장, 6월에는 신한민보 주필로 선임되어 언론을 통해 한인 교포들의 계몽운동과 항일독립운동, 민족교육운동 등에 힘쓰며 한인사회의 결속을 강화했다.[1] 같은 해 6월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 지역에서 한인 노동자들이 영국인 농장으로 일하러 갔다가 일본인으로 오인되어 쫓겨난 사건이 발생하자, 주미일본공사가 한인들의 노동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며 해외 한인들을 일본의 지배 하에 두려는 의도를 보였다. 이에 그는 미국 국무장관 브라이언에게 서한을 보내 일본공사의 간섭행위를 강력히 항의하고 재미한인사회에 대한 간섭을 중단하겠다는 서약을 받아달라고 요청하여 이를 인정한다는 허락을 받아냈다.[1] 그 결과, 1914년 4월 미국무장관은 물론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를 사단법인으로 정식 인정을 받아 재미한인의 대표기관으로 대우받음과 동시에 미주 내 망명자치정부로서 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1] 1915년 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으로 재선된 그는 같은 해 3월 국문자모를 직접 만들고, 독창적인 인터타입 한글식자기를 발명하여 문선을 통해 만들던 기존 신문에 활자의 혁명을 일으켰다.[1] 이 기계로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서는 1915년부터 1970년까지 신한민보를 제작하였다.[1] 또한 망명객들을 위한 숙식과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70여 명의 사진결혼 신부들의 결혼식 주례를 직접 서주기도 하였다.[1] 1916년 한인 최초로 UC버클리대학교를 졸업한 뒤 산앤젤모에 소재한 태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다.[1] 1918년 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회장으로 다시 선출되어 한인사회 지도자로서 역량을 발휘하는 한편, 1919년 대한독립선언(大韓獨立宣言)에 참여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1] 1919년 8월 워싱턴으로 가서 이승만을 만나 구미주차외교위원회(歐美駐箚外交委員會)의 설립문제를 논의하였다.[1] 1921년 3월 김규식, 송헌주 등과 함께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사무장으로 외교와 독립 선전활동에 주력하다가 과로로 서거하였다.[1]

3. 사후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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