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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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한민보는 1909년 2월 1일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로 창간된 한국어 신문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주간으로 발행되었으며, 해외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다루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 독립과 관련된 기사를 주로 게재했으며, 3·1 운동 당시에는 국내 소식을 재미 한인들에게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 격일로 발행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김운하가 신문을 인수하여 1980년대 후반까지 발행을 이어갔으며, 김운하는 언론 활동과 한반도 평화 통일 옹호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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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어니스트 베델과 양기탁이 창간하여 일제 침략에 맞서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추진하며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 기관지로 전락한 한국 언론사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매체이다.
신한민보 - [회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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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민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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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주간 신문 (1909년–1974년) |
형태 | 브로드시트 |
창립자 | 대한인국민회 |
창간일 | 1909년 2월 10일 |
폐간일 | 1980년대 후반 |
언어 | 한국어 |
본사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
2. 역사
1909년 2월 1일 대한인국민회(KNA)가 정식 발족되면서 기관지인 ''신한민보''(The New Korea)를 발행했다. 이 신문은 공립신보와 경쟁 관계였던 대한공보를 대체했다.[2] 공제회의 자금 지원을 받아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본부 근처에서 발행되었으며, 주간 발행 부수는 약 3000부였다.[3] 초기에는 한국 일부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으나, 1910년 일본의 한국 병합 이후 검열로 인해 거의 배포되지 못했다. 전성기에는 시베리아에 판매 지점을 포함하여 33개의 판매처를 확보하기도 했다.[4]
초대 발행인 겸 편집인은 최정익이었으며, 1910년 5월 14일 이환우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1912년 11월부터 1913년 6월까지 발행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으며, 이환우의 영문란 개설 시도는 운영 부실로 무산되고 최정익이 다시 편집을 맡았다.[5] 1915년 3월 11일에는 대한인국민회 회원 이대위가 한국어 활자 주조기를 발명하여 신문 인쇄에 기여했다.
1937년부터 1946년까지 신한민보는 영코리안국민회(YKNA)가 편집한 영문란을 4면에 할애했으며, 1937년부터 1940년까지는 독립운동가 서재필(필립 제이슨)이 영문 칼럼을 기고했다.
1974년 9월, 김형순(해리 S. 김)의 손자 김운하가 신문을 인수하여 로스앤젤레스에서 월간으로 발행했다.[1][9] 김운하는 1980년대 후반까지 발행을 계속하다가,[10][11][12] 1988년 4월 북한 전문 여행사로 전업하고 오스트리아로 이주했다. 2019년 10월 5일, 문재인 정부로부터 국민훈장[13]을 받았으나,[12] 신한민보 사무실 물품 관련 사건[14]과 친북 논란[15]에 휩싸이기도 했다.
2. 1. 창간과 대한인국민회 (1909-1910)
1909년 2월 1일, 대한인국민회(KNA)는 기관지인 '신한민보'(''The New Korea'')를 창간했다. 공립신보와 경쟁 관계였던 대한공보를 대체한 신문이다.[2] 대한인국민회의 주요 기관으로서 모든 한인들의 정신을 일깨우고 목표 달성을 위한 헌신을 촉구했다.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본부 근처에서 발행되었으며, 주간 약 3,000부를 발행했다. 이 중 700~800부는 미국 본토, 500~600부는 하와이, 300~400부는 멕시코, 나머지는 시베리아와 만주에 배포되었다.[3]최정익이 초대 발행인이자 편집인이었고, 1910년 5월 14일 이환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1912년 11월부터 1913년 6월까지 발행이 중단되기도 했다.[5] 운영 부실로 최정익이 다시 편집을 맡았다. 1915년 3월 11일, 대한인국민회 회원 이대위가 신문 인쇄를 위한 최초의 한국어 활자 주조기를 발명했다.
신문 제호는 '신한민보'라는 한자 "新韓民報"를 한국 지도 위에 표기했다. 1925년 한글 ㅅㅣㄴㅎㅏㄴㅁㅣㄴㅂㅗ (신한민보)로 디자인을 변경했지만,[6] 1929년 다시 원래 디자인으로 돌아갔다. 세로쓰기를 사용했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었다.

같은 해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1년간 신문사에서 활동하며 "만국 징병 제에 대한 견해"라는 기사를 통해 한국 독립을 위한 군 복무가 애국적 의무임을 강조했다.[7]
2. 2.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지원 (1910-1945)
1910년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신한민보의 기사는 주로 한국 독립과 관련된 내용이었지만, 해외 한인들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도 다루었다.[1] 창간호에서는 모든 한인들을 대표하는 단체의 신문으로서, 이전의 두 한국어 신문보다 더 광범위한 뉴스 범위와 공정한 시각을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3] 창간과 같은 해에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1년간 신문사에서 활동하며 "만국 징병 제에 대한 견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는데, 이 기사에서는 한국 독립을 위한 군 복무가 애국적인 의무임을 강조했다.[7]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신문은 국내 소식을 재미 한인들에게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 격일로 발행하기 시작했다.[6]
1937년부터 1946년까지 신한민보는 영코리안국민회(YKNA)가 편집한 영문란을 4면에 할애했다. 이 기사들은 주로 젊은 독자, 특히 재미 한인 2세들을 대상으로 했다. 1937년부터 1940년까지는 독립운동가 서재필(필립 제이슨)이 "나의 한국에서의 나날들" 및 "단상"과 같은 영문 칼럼을 기고했다.
2. 3. 해방 이후의 변화 (1945-1980년대)
1945년 광복 이후, 신한민보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해리 S. 김(김형순)이 신문 사장으로 재직하던 중, 1974년 9월 그의 손자 김운하가 신문을 인수하면서 주간 발행에서 월간 발행으로 전환되었다.[1] 이는 미주 한인 사회의 변화와 신문 경영 환경의 어려움을 반영한 결과였다.김운하는 1980년대 후반까지 신문 발행을 계속했으며,[10][11][12] 1988년 4월에는 북한 전문 여행사가 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로 이주했다. 2019년 10월 5일, 문재인 정부로부터 언론 활동과 한반도 평화 통일 옹호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13]을 받았다.[12] 그러나 신한민보 사무실에서 가져간 물품 관련 사건[14]과 북한에 대한 옹호 정도에 대한 논란[15] 등 여러 차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 4. 김운하 시대와 논란 (1980년대-현재)
김운하(金雲夏한국어)는 1974년 9월 신문 사장이었던 해리 S. 김(金衡珣한국어)의 손자로서 신한민보를 인수했다.[8] 이후 신문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월간으로 발행되었다.[1][9] 김운하는 1980년대 후반까지 신문 발행을 계속했다.[10][11][12]1988년 4월, 김운하는 북한 전문 여행사가 되었고, 이후 오스트리아로 이주했다.[12] 그는 신한민보 사무실에서 가져간 물품 관련 사건[14]과 북한에 대한 그의 옹호 정도에 대한 논란으로 여러 차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15]
2019년 10월 5일, 김운하는 언론 활동과 한반도 평화 통일 옹호에 기여한 공로로 문재인 정부로부터 국민훈장을 받았다.[13][12]
3. 주요 논조 및 특징
新韓民報|신한민보한국어는 1909년 2월 10일 창간된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였다.[2] 창간 당시에는 경쟁 신문이었던 공립신보와 대한공보를 대체했다.[2] 모든 한인들의 정신과 목표 달성을 위한 헌신을 되살리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2]
신문은 주로 한국 독립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었지만, 해외 한인들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도 다루었다.[1] 창간호에서는 모든 한인들을 대표하는 단체의 신문으로서, 이전의 두 한국어 신문보다 더 광범위한 뉴스 범위와 공정한 시각을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3]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국내 소식을 재미 한인들에게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 격일로 발행하기도 했다.[6]
1910년, 독립운동가 박용만은 "만국 징병 제에 대한 견해"라는 기사를 통해 한국 독립을 위한 군 복무가 애국적인 의무임을 강조했다.[7] 1937년부터 1946년까지는 영코리안국민회(YKNA)가 편집한 영문란을 4면에 할애하여 재미 한인 2세 등 젊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 기간 동안 독립운동가 필립 제이슨은 "나의 한국에서의 나날들" 및 "단상"과 같은 영문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신문의 제호는 초기에는 ‘’’신한민보’’’라는 한자 "新韓民報"를 한국 지도 위에 표기했다. 1925년에는 한글 ㅅㅣㄴㅎㅏㄴㅁㅣㄴㅂㅗ (신한민보)로 디자인을 변경했으나,[6] 1929년에 다시 원래 디자인으로 돌아갔다. 다른 한국 신문들과 마찬가지로 세로쓰기를 사용했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방식을 채택했다.
참조
[1]
웹사이트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in Korean)
http://encykorea.aks[...]
[2]
서적
News For All The People: The Epic Story of Race and the American Media
https://books.google[...]
Verso Books
2012-09-11
[3]
문서
The Quest for Statehood: Korean Immigrant Nationalism and U.S. Sovereignty, 1905-1945 p. 42
[4]
웹사이트
신한민보(新韓民報)의 광고에 대한 연구
http://kja.koads.or.[...]
[5]
서적
Sinhan minbo = The New Korea
https://searchworks.[...]
1909-01-01
[6]
웹사이트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in Korean)
http://contents.hist[...]
[7]
웹사이트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United States
http://icks.org/data[...]
[8]
뉴스
"[미주 한인 100년의 발자취] 김형제 상회 II - 과수업으로 성공해 한인 사회에 큰 기여"
https://www.voakorea[...]
2007-08-20
[9]
웹사이트
김운하 Woon Ha Kim 金雲夏
https://kahistorymus[...]
2014-07-07
[10]
뉴스
한국 도산기념 사업회에 넘긴 자료 대부분 분실된 것
https://sundayjourna[...]
2003-09-04
[11]
뉴스
해외 독립운동 자료 1500점 햇빛…재미동포 김운하씨 기증
https://www.donga.co[...]
2003-02-27
[12]
뉴스
제 3대 재 오스트리아 한인원로회 김운하 회장
http://www.korean.at[...]
[13]
웹사이트
대한민국 상훈 > 상훈제도안내 > 훈장과 포장
https://www.sanghun.[...]
2023-04-02
[14]
뉴스
국민회관 사료 미국에 되돌려줄 의향있다
https://sundayjourna[...]
2005-03-13
[15]
뉴스
"[LA] 한인타운에서 '김정일 소동'"
https://www.chosun.c[...]
2020-08-16
[16]
웹인용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in Korean)
http://encykorea.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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