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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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예는 촉한의 인물로, 유장, 유비, 제갈량 등을 섬기며 관직 생활을 했다. 유장 휘하에서 효렴으로 발탁되어 어복 현령, 종사 등을 역임했고, 유비에게 항복한 후 파군 태수와 사금중랑장을 지냈다. 익주 태수 정앙이 옹개에게 살해되자 후임으로 임명되었으나 옹개에게 붙잡혀 오나라로 압송되었다. 등지의 노력으로 석방되어 촉으로 돌아왔으며, 이후 제갈량을 보좌하며 참군, 익주치중종사, 야성교위, 유부장사 등을 역임했다. 제갈량이 북벌을 시작했을 때 장사로 활약했으며, 보한장군을 겸했다. 230년에 64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제갈량으로부터 정량사절의 신하로 칭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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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예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장의 |
본관 | 촉군(성도) |
자 | 군사(君嗣) |
출생 | 166년 |
사망 | 230년 (향년 64세) |
직업 | 관리 |
자녀 | 장목 장유 |
관직 | |
보한장군(輔漢將軍) | 229년 ~ 230년 |
승상장사(丞相長史) | 228년 ~ 230년 |
사성교위(射聲校尉) | 228년 ~ 230년 |
익주태수(益州太守) | 223년 ~ 228년 |
파군태수(巴郡太守) | 214년 ~ ? |
섬긴 군주 |
2. 생애
장예는 익주목 유장에게 효렴으로 추천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어복장, 종사(從事) 겸 장하사마(帳下司馬)를 거쳤다.[1] 유비가 익주를 공격할 때 장비에게 패하고, 이후 유비에게 항복하여 파군태수를 지냈다. 사금중랑장(司金中朗將)으로 농기구와 무기 제조를 맡았으며, 익주태수 정앙(正昻)이 옹개에게 살해되자 후임 태수가 되었으나, 옹개에게 붙잡혀 손권에게 압송되었다.
이후 촉한과 동오가 동맹을 재결성하면서 제갈량이 등지를 손권에게 사자로 보내 장예의 석방 협상을 하였고, 장예는 귀환을 허락받았다.[5] 손권은 장예와 대화 후 그를 범상치 않게 여겨 추격대를 보냈으나, 장예는 이를 예상하고 빠른 속도로 도망쳐 추격대를 따돌렸다.[6]
귀국 후 장예는 참군(參軍)·익주치중종사(益州治中従事)가 되어 제갈량을 보좌하며 군무를 맡았다. 227년 제갈량이 북벌을 위해 한중에 주둔할 때 야성교위(射聲校尉)·유부장사(留府長史)로 임명되었고,[7] 장사 직분을 유지하면서 보한장군(輔漢將軍)을 겸했다.[12] 230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3]
아들 장물이 뒤를 이었고, 삼군의 태수와 감군을 역임했다. 장물의 동생 장욱은 태자중서자가 되었다.
2. 1. 익주에서의 관직 생활
유장에게 효렴으로 추천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어복 장, 종사 겸 장하사마를 역임했다.[1] 유비가 익주를 침공하자, 유장은 장예에게 군사를 주어 덕양현 맥하에서 장비가 이끄는 군대와 싸우게 했으나 패하였다.[14] 이후 유장이 유비에게 항복하면서 장예도 유비를 섬기게 되었다.2. 2. 남방 통치와 오나라와의 외교
유비가 익주를 공격할 때, 유장은 장예를 덕양현으로 보내 유비의 증원군을 막게 했으나, 장비가 이끄는 군대에 패하였다.[2] 214년, 유비군이 성도에서 유장을 포위하자 유장은 장예를 보내 항복 조건을 협상하게 했다. 유비는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유장이 항복하면 잘 대우하겠다고 약속했다.[2]제갈량은 장예를 유장 휘하에서 가장 유능한 관리 중 하나로 지목하고 유비에게 등용할 것을 권했다. 유비는 장예를 파군태수로 임명하고, 사금중랑장(司金中朗將)으로 승진시켜 전쟁 장비 제조와 농업 생산 및 분배를 관리하게 했다.[3]
222년 말 또는 223년 초, 유비가 효정 전투에서 손권에게 패한 후, 윈난성 일부를 포함하는 남쪽의 익주군(益州郡)의 토착 부족들이 옹개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건녕군(建寧郡)의 촉나라 태수 정앙(正昂)을 살해하고 몰래 손권과 연락했다. 장예는 주를 되찾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옹개는 항복하는 척하다가 나중에는 만나기를 거부했다. 반란군은 장예를 사로잡아 죽이지 않고 포로로 손권에게 보냈다.[4]
223년경, 촉한과 동오가 조위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재결성했을 때, 제갈량은 등지를 오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손권을 만났다. 등지의 임무 중 하나는 장예의 석방을 요청하여 촉으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손권은 여러 해 동안 투옥되었던 장예를 처음 만나 석방에 동의했다.[5]
등지를 떠나보내기 전 송별 연회에서 손권은 장예에게 말을 걸었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장예가 등지와 함께 떠난 후, 손권은 장예를 자신의 신하로 등용하고 싶어 사람을 보내 쫓아가 데려오려 했다. 그러나 장예는 오나라를 떠난 순간부터 자신의 재치를 드러낸 것을 후회했고, 손권이 자신을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지하여 밤낮으로 서둘러 촉으로 돌아갔다. 손권의 사람보다 단 하루 먼저 도착했다.[6]
2. 3. 제갈량의 북벌 보좌
張裔|장예중국어는 제갈량을 보좌하여 군무를 맡았으며, 227년 제갈량이 북벌을 위해 한중에 주둔할 때 야성교위(射聲校尉) 겸 유부장사(留府長史)로 임명되었다.[7] 장사 직분을 유지하면서 보한장군(輔漢將軍)을 겸했다.[12]張裔|장예중국어는 제갈량과 함께 전선에 합류하지 않고, 대신 제갈량과 성도에 있는 촉 중앙 정부 간의 통신을 담당했다. 제갈량은 결정을 내리기 전에 모든 것을 검토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張裔|장예중국어는 핵심 정책 문제에 대한 그의 의견을 구하기 위해 제갈량이 주둔하고 있는 한중으로 가야 했다. 張裔|장예중국어가 성도를 떠날 때,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거리에 줄을 섰다고 한다.[9]
제갈량은 『출사표』에서 "시중(곽유지, 비의), 상서(진진), 장사(張裔|장예중국어), 참군(장완)은 모두 정량사절(貞亮死節)의 신하입니다."라고 張裔|장예중국어를 칭찬했다.[15]
2. 4. 사망과 평가
張裔|장예중국어는 230년에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3] 촉나라 건흥 8년(230년)에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다.張裔|장예중국어는 양공(楊恭)과 친한 친구였지만, 양공은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양공의 어린 자식들은 張裔|장예중국어가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돌보았으며, 양공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대했다. 양공의 아이들이 성인이 되자, 張裔|장예중국어는 그들을 위해 밭과 집을 사주고, 아내를 구해 주고 직업을 갖도록 도왔다. 그는 늙은 친구들을 보살피고, 고아와 몰락한 가문을 돌보고 지원하는 등 지극히 덕이 있는 행동을 보였다.[13]
제갈량은 『출사표』에서 "시중(곽유지, 비의), 상서(진진), 장사('''장예'''), 참군(장완)은 모두 정량사절의 신하입니다."라고 張裔|장예중국어를 칭찬했다. 건흥 6년(228년), 전선의 제갈량에게 사무 회의를 하러 갔을 때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를 전송했다고 한다. 張裔|장예중국어는 최종적으로 보한장군까지 승진하여 장사 직을 계속 겸임했다.
아들 장물이 뒤를 이었고, 삼군의 태수와 감군을 역임했다. 장물의 동생 장욱은 태자중서자가 되었다.
3. 인물 평가 및 일화
장예는 성인이 된 후 건위군 사람 양공과 친했으나, 양공은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장예는 양공의 어린 자식들을 집으로 데려와 돌보고, 양공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대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자 밭과 집을 사주고, 아내를 구하고 직업을 갖도록 돕는 등 늙은 친구, 고아, 몰락한 가문을 지원하며 덕을 베풀었다.[13]
3. 1. 중도진보적 관점에서의 평가 (개요에 포함)
장예는 『춘추공양전』을 배우고 『사기』, 『한서』를 읽었다고 한다.[1] 허정은 장예가 실무 능력이 뛰어나고 머리 회전이 빨라 조조 휘하의 종요에 비견된다고 평가했다.[2]장예는 제갈량을 "상에는 소원한 자라도 잊지 않고, 벌에는 친한 자에게도 아첨하지 않으며, 작위는 공이 없는 자에게 주지 않고, 형벌은 귀한 세력이라도 면제시키지 않는다. 이것이 현자도 우자도 모두 그 몸을 잊고 일하는 이유이다"라고 칭찬했다.[3]
친구 양공이 죽은 후에는 그의 가족을 후하게 원조했다.[4] 진수는 장예의 이러한 의로운 행동을 꼼꼼하다고 평가했다.[4]
양홍과 친했지만, 아들 장욱이 벌을 받았을 때 양홍이 사면해주지 않자 그를 원망하게 되었다.[5] 양홍은 제갈량에게 장예가 장사(長史) 직책에는 적임이지만 공정하지 못하므로 향랑 밑에서 일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진언했다.[6] 장예는 이 말을 듣고 제갈량이 자신에게 장사를 맡길 것이니 양홍이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6]
잠술과도 사이가 좋지 않아 제갈량에게 꾸짖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7] 제갈량은 편지에서 장예와 자신이 금석지교(金石之交)라고 생각했지만, 잠술을 등용한 것을 참지 못하는 장예를 질책했다.[7]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41
[2]
서적
Sanguozhi vol. 41
[3]
서적
Sanguozhi vol. 41
[4]
서적
Sanguozhi vol. 41
[5]
서적
Sanguozhi vol. 41
[6]
서적
Sanguozhi vol. 41
[7]
서적
Sanguozhi vol. 41
[8]
서적
Sanguozhi vol. 41
[9]
서적
Sanguozhi vol. 41
[10]
서적
Sanguozhi vol. 41
[11]
서적
Sanguozhi vol. 41
[12]
서적
Sanguozhi vol. 41
[13]
서적
Sanguozhi vol. 41
[14]
서적
화양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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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화양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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