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 (1544년)
1. 개요
이발(李潑)은 1544년에 태어나 조선 선조 때 활동한 문신이다. 김근공과 민순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568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1573년 문과 알성시에 장원 급제하여 예조좌랑을 거쳐 부교리, 헌납 등을 역임했다. 동인과 서인의 분열 과정에서 동인의 대표적인 인물로 언급되었으며, 정철과의 갈등을 겪었다. 정여립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사되었고, 그의 가족들 또한 멸문지화를 당했다. 광해군 때 신원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인조 때 신원되고 관작이 복원되었다. 숙종 때 정문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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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이씨 -
이병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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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이씨 -
이영수 (야구인)
이영수는 전 야구 선수이자 야구 코치로, KIA 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즈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현재는 두산 베어스에서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
기축옥사 관련자 -
정여립
정여립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동인으로 전향하여 이이를 비판하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 대동계를 결성했으나 반란 혐의로 자결했으며, 기축옥사로 동서인 갈등을 심화시킨 인물이다. -
기축옥사 관련자 -
이산해
이산해는 조선 중기 문신이자 정치가로, 뛰어난 문장과 서화 실력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동인으로 활동, 서인과의 당쟁 속에서 북인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임진왜란 초기 정국 운영에 대한 비판과 함께 사후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
1544년 출생 -
토르콰토 타소
토르콰토 타소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시인이자 극작가로, 서사시 《리날도》, 목가극 《아민타》, 대서사시 《해방된 예루살렘》 등의 작품을 남기며 유럽 문학과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544년 출생 -
프랑수아 2세
프랑수아 2세는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아들로 프랑스 국왕(재위: 1559년-1560년)이었으나, 어리고 병약하여 기즈 가문이 득세하고 앙부와즈 음모, 재정 위기, 종교 갈등 속에 귀 질환으로 요절하여 샤를 9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2. 생애
김근공(金謹恭)과 민순(閔純)의 문하에서 배웠다. 선조 1년(1568년), 25세 때 생원시에 급제하였고, 선조 6년(1573년) 30세에 문과 알성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선조 9년에는 부교리를 거쳐 헌납이 되었다.
선조 11년(1578년) 동인과 서인의 갈등 문제가 불거졌다. 정철은 선조 14년(1581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호남으로 갔고, 이발은 선조 15년에 부제학, 선조 16년에 대사간, 선조 20년에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2.1. 동서분당과 갈등
선조는 경연에서 강서(姜緖)의 발언으로 신하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추대받는 인물로 서인에는 정철, 동인에는 이발을 언급하였다. 이이는 동인과 서인을 화해시키려 했으나, 그러한 관계는 지속되지 못했다. 일부에서는 이발이 처음에는 이이와 정철을 스승으로 섬겼으나 후일 이들을 강하게 비판하거나 업신여기게 되었다고 하였다. 조헌은 상소를 올려 이발이 없는 사실을 꾸며 내어 정철을 모함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사간원에서는 조헌의 상소를 날조라고 주장하였다.
2.2. 기축옥사와 죽음
선조 22년(1589년) 음력 10월 17일, 정여립이 역모의 의심을 받고 피신 중에 자결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발은 대사간직을 스스로 사퇴하고 교외에서 대죄하였다. 11월 초에는 정여립과 친했던 이발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가 올라왔고, 고문에 승복한 정여립의 조카들의 자백 중에 이발이 언급되어 선조가 직접 심문하였다. 정여립의 집에서 이발의 서찰이 가장 많이 발견되었고, 그 내용이 시사를 거리끼지 않고 논하였으며 선조의 행위를 모두 알렸기에 그 벌이 심하였다. 이발은 귀양 가던 도중에 다시 옥에 갇히어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였다.
이발의 동생 이길 또한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선조수정실록》에 의하면, 정철은 이길의 사형을 막으려 임금에게 홀로 보고하였으나 형벌을 막지 못했다. 또 다른 동생인 이급(李汲)도 연좌되어 죽었고, 그 얼마 뒤 이발의 노모와 아내, 어린 아들까지 감옥에 갇혔다. 2년을 갇혀 있던 중에 이들을 심문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당시 위관이었던 이양원의 반대는 허락되지 않았다. 82세의 노모와 10세의 아들 모두 승복하지 않고 심문 중에 사망하였고, 이발의 가문에 화를 면한 사람은 없었다. 이발과 이길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이들의 죽음은 서인에 대한 동인의 감정이 더욱 악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3. 성품
효성스럽고 중후하였으며, 경연에서 왕도를 진술하고 기강을 진작하며, 정도와 사도를 분별하려 하였다. 그러나 시비를 가리고 인물을 비판하기를 좋아하여 원망을 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