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
1. 개요
경연은 군주에게 유교 경전을 강의하고, 학문을 토론하는 제도이다. 중국에서는 전한 선제 때 유래하여 당, 송, 원, 명, 청나라 시대에 걸쳐 존재했으나, 형식적인 제도로 변질되기도 했다. 고려 시대에는 청연각을 설치하여 경연을 실시했으나, 무신집권기 이후 유명무실해졌다. 조선 시대에는 태조 때 경연관을 증설하고 정종이 경연에 관심을 보이며 사관의 입시가 이루어지면서 자리를 잡았다. 세종은 경연을 정례화하고 집현전을 설치하는 등 경연에 적극적이었으며, 학술적 기능과 정치적 기능을 수행했다. 경연청에는 영사, 지사, 참찬관, 시강관, 시독관, 검토관 등의 관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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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교육 -
서당
서당은 조선시대 사설 초등 교육기관으로, 아동들에게 한문과 유교 경전을 가르쳤으며 훈장이 학생들을 지도했고, 다양한 설립 주체와 교육 내용, 개인별 맞춤 교육 방식을 특징으로 하며, 일제강점기 민족 교육의 보루였으나 근대 교육 제도 도입 후 쇠퇴하여 현재는 일부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조선의 교육 -
향교
향교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지방에 설립된 교육 기관으로, 유생 교육과 과거 응시 자격 부여 기능을 수행했으며, 현재는 문묘를 향사하는 역할을 하고 대성전, 명륜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
조선의 정치 -
대한제국 중추원
대한제국 중추원은 갑오개혁으로 설립되어 의회적 성격을 갖추었으나, 공화정 수립 루머로 황제의 견제를 받았으며, 독립협회 폐지 이후 자문기관으로 역할이 축소되다가 1907년 기능이 종식되었다. -
조선의 정치 -
아관파천
아관파천은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1896년부터 약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사건으로, 생존을 위한 선택이라는 긍정적 평가와 러시아의 이권 침탈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있으며, 조선 정치의 급격한 변화와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를 가져왔다. -
한국사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
한국사 -
토기
토기는 점토를 구워 만든 그릇으로, 일본에서는 구움 정도에 따라 도자기, 자기와 구분되며 인류 최초의 화학적 변화 응용 사례로 식생활과 문화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다원설이 유력한 발상지와 일본 열도 1만 6500년 전 토기 발견이 특징이며, 일본어 관점에서 정의, 역사, 제작 과정, 용도, 세계 각지 토기 문화를 설명한다.
2. 중국의 경연
중국에서는 전한 선제가 유학자들에게 석거각(石渠閣)에서 오경을 강의하도록 한 데에서 유래하며, 당나라 현종이 집현원(集賢院)에 시독학사(侍讀學士), 시강학사(侍講學士), 직학(直學) 등을 설치하였다. 송나라 태종 때 ‘경연’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다.
원나라·명나라·청나라에서도 경연이 있었지만, 이는 형식적인 제도로 전락하였다.
3. 한국의 경연
유교는 정치와 종교가 하나였기 때문에, 경서와 역사책은 정치와 교리를 모두 담고 있었다. 이러한 교리를 밝히고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 경연이다. 경연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발전했다.
3.1. 고려의 경연
1116년 예종은 궁궐 안에 청연각(淸燕閣)을 짓고 학사, 직학사, 직각 한 명씩을 임명하여 아침저녁으로 경서를 강론하게 하였다. 이후 무신집권기에 일시적으로 폐지되기도 했다.
이때는 경연을 ‘보문각’이라고 하였는데, 충렬왕 이후에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충목왕 때는 원의 압력으로 서연(書筵)으로 격하되었다. 충목왕은 번을 넷으로 나누어 날을 번갈아 시독(侍讀)하게 하였다. 공민왕은 5품 이하의 관리 네 사람을 시학(侍學)으로 삼았는데, 이후 공양왕 때 경연의 명칭을 회복하고 영사(領事), 지사(知事), 강독관(講讀官)을 두었다. 이때의 제도는 조선시대로 이어져 경연 제도의 기본을 이루었다.
3.2. 조선의 경연
태조는 즉위 후 관제를 제정하면서 경연관을 늘렸지만, 경연에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비공식적으로 《대학연의》를 진강토록 한 것이 경연의 역할을 대신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종은 경연에 관심을 보이며 즉위 직후 경사에서 국사 관련 내용을 모으게 하고, 《사서》에 구절 점을 쳐서 바치도록 지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세제였던 정안군에게 양위하기 한 달여 전 경연에서 노자와 신선의 도를 말해 달라고 청했는데, 이는 양위 의사를 내비친 것으로 보인다. 정종은 초기에는 사관(史官)의 경연 입시를 거부했지만, 이후 허락하여 사관이 경연에 참여하게 되면서 조선의 경연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태종은 세제 시절 《주역》, 《대학연의》 등을 공부했다. 즉위 후에도 경연에서 《대학연의》 진강을 잘 한 권근에게 음식을 내리는 등 잠시 활동을 보였으나, 이후 경연을 게을리하였다. 태종 6년 이후 경연에 대한 기록이 없어 경연을 실질적으로 폐지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세자 책봉 후 서연을 열었고, 즉위 후에는 경연을 공식적으로 정례화했다. 최초의 참찬관으로 하연 등을 임명하고, 집현전을 설치하는 등 경연에 관심을 보였으나, 말년에는 여러 이유로 경연을 열지 않았다. 대신 서연을 중시하였다.
3.2.1. 경연의 기능
유교는 정교일치(政敎一致)였던 바, 그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또한 정치를 다루면서도 교리(敎理)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교리를 현현(現顯)하고 정치를 구현(具現)하고자 하였던 것이 경연이다.
경연에서의 임금 교육은 서연에서부터 시작하여 경연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는데, 세종 이전의 3대( 태조, 정종, 태종)에 비해 세종은 강한 학문에 대한 의지와 의욕으로 실록에 등장하는 경연에 대한 기록이 2천여 회에 달할 정도였다. 경(經)과 사(史)를 중심으로 한 세종 대의 경연은 중강(重講)뿐만 아니라 삼강(三講)까지 할 정도였다.
세종의 학문적인 중추 역할을 담당한 집현전과 함께 경연은 학술적 기능도 수행했다. 또한 경연에서는 여러 가지 학술 서적의 찬술(纂述)도 논해졌고, 지시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의 경연은 정치적인 기능보다 학술적인 기능이 주목적이었으며 그를 중심으로 제도가 정비되었다. 하지만 세종 이후의 경연에서는 간간이 정치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이 나타났으며, 이후 정치적 기능이 훨씬 더 강화되어 경연 정치로 발전하게 되었다.
3.2.2. 경연청 관직
| 품계 | 관직 | 비고 |
|---|---|---|
| 정1품 | 영사 | 겸직 |
| 종1품 | ||
| 정2품 | 지사 | 겸직 |
| 종2품 | 동지사 | 겸직 |
| 정3품 | 참찬관 | 당상관 |
| 종3품 | ||
| 정4품 | 시강관 | |
| 종4품 | ||
| 정5품 | 시독관 | |
| 종5품 | ||
| 정6품 | 검토관 | |
| 종6품 | ||
| 정7품 | 사경 | |
| 종7품 | ||
| 정8품 | 설경 | |
| 종8품 | ||
| 정9품 | 전경 | |
| 종9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