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영 (18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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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세영은 충청남도 청양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의병을 일으켰으며, 을사조약 체결 후 민종식과 함께 의병을 재차 일으켜 홍주성을 함락시키는 등 활약했다. 이후 체포되어 유배되었으나, 독립의군부 사령관, 신흥강습소 소장, 신흥무관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18년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한교공회를 조직하여 친일파 숙청 활동을 펼쳤다. 1922년 대한통군부 군사부장이 되었고, 1930년에는 한족동맹회와 조선혁명당 제1지부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지속했다. 1938년 중국 성도에서 사망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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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충청남도 청양(靑陽) 사람이다.

2.1. 의병 활동

1895년 11월 국모시해의 변을 당하자 분개하여 홍주(洪州)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이승우(李勝宇)의 간계(奸計)로 패하고 홍산(鴻山)으로 피신하였다. 1896년에는 황재현, 이관(李寬), 김홍제 등과 함께 남포(藍浦)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에 민종식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그의 참모장(參謀長)이 되어 홍주성을 함락시키는 등 활약하였으나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패하여 공주진위대병에 체포된 뒤 동년 11월 23일 평리원(平理院)에서 종신 유배형을 언도받고 황해도 황주(黃州)로 유배되어 한달 먼저 유배 온 전덕원과 함께 지냈다.

1907년 10월에 철도(鐵島)로 유배지가 옮겨졌으나 형(刑)이 중지되고, 같은 해에 독립의군부 충청 전라 경상 3도의 사령관에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1913년 3월에는 함경 평안 황해도의 독립의군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2.2. 망명과 독립군 양성

1910년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이세영은 1913년 5월 만주로 망명하여 통화현 합니하에 독립군 양성과 후진교육을 위해 설립된 신흥강습소의 소장 서리에 취임하였다. 1917년 6월에는 신흥강습소의 소장이 되었으며, 같은 해 11월에 신흥강습소가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됨에 따라 교장으로 취임하여 청년군관 양성에 주력하였다.

1918년 11월, 이세영은 길림에서 여준, 정안립, 김동삼, 김좌진 등 39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환인현에 거주하던 그는 손극장, 독고욱, 독고환 등과 함께 근처의 청년들을 모집하여 독립운동 단체인 한교공회를 발족시켰다.

군사기관으로 임시군사정부(서로군정서의 전신)가 설치되자 신흥무관학교 교장이던 그가 군사령관에 임명되어 군정부 규칙 제정을 서둘렀다. 1919년 4월 16일에는 13도대표에 의해 조직되었던 한성임시정부에서 그를 참모부 차장에 임명하였으며, 동년 8월 상해의 통합 임시정부에서는 그를 다시 노동부 차장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1920년 5월 3일 서로군정서에서는 신흥학교를 개편하여 정식사관학교로 개교식을 가졌는데 그는 계속해서 교장직을 맡아 독립군 중견간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2.3. 서로군정서와 대한통군부 활동

1922년 2월 광한단, 한족회, 독립단, 대한국민단, 대한청년연합회 등이 통합하여 관전현(寬甸縣)에서 민족단일의 독립단체를 지향하여 대한통군부가 조직되자 채상덕을 총장으로 추대하고 그는 군사부장이 되었다. 일군의 만주 출병 후 남북 만주에서의 무장단체연합회로서 발족한 통군부가 동년 8월 민정(民政)과 군정(軍政)을 병행한 통의부로 확대 개편되었을 때도 그는 군사위원으로 또는 참모부장으로 계속 무장항일투쟁에 전념하였다.

2.4. 친일파 숙청

이회영은 한교공회를 조직하여 일본에 아첨하는 친일파들을 적발, 숙청하는 등 격렬한 항일투쟁활동을 전개하였다. 한교공회는 본부를 환인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 두고 부근 각처에 지부를 설치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 홍승국(洪承國)과 백토벌(白討伐)이라는 가명을 가진 자가 중국토군(中國土軍)과 협력하여 독립운동자들을 살해하거나 체포하여 일본 경찰에 넘겨주는 악질적 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에 한교공회는 이들을 그대로 두고서는 독립운동을 할 수 없다고 판단, 환인현(桓仁縣) 횡도천(橫道川)에서 그 일당을 포위 습격하여 백토벌(白討伐)이란 자를 사살하고 나머지는 만주로부터 추방하였다.

2.5. 통의부 활동과 독립운동 노선 갈등

1923년 12월, 이세영은 통의부의 군사부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환인현(桓仁縣)에서 손극장(孫克章), 독고욱(獨孤旭) 등과 함께 한교공회(韓僑公會)를 조직하여 구국활동을 계속하다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다시 북경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청년계층과 유림계층과의 알력으로 독립운동 노선에 분규가 발생하자, 이회영은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 전덕원(全德元)은 통의부의 부활을 주장하여 그를 다시 돌아오도록 하였다.

1925년 5월 31일, 임시정부에 내분이 일어나자 그는 북경에서 이를 규탄하는 교정서(矯正書)를 작성하여 연병호(延秉昊), 박숭병(朴崇秉) 등과 같이 서명 배포하였다. 1930년 2월에는 북경에서 조성환(曺成煥), 손일민(孫逸民) 등과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를 조직하였으며, 같은 해 7월에는 강구우(姜九禹) 등과 조선혁명당 제1지부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2.6. 임시정부 활동과 이후 행적

이세영은 청년층과 유림층 간의 갈등으로 독립운동에 분규가 일어나자 북경으로 갔다. 전덕원은 통의부 부활을 주장하며 이세영이 돌아오도록 하였고, 1923년 12월 군사부문 확대와 함께 통의부 군사부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환인현에서 손극장, 독고욱 등과 한교공회를 조직하여 구국활동을 하다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다시 북경으로 갔다. 1925년 5월 31일 임시정부 내분 발생 후, 북경에서 연병호, 박숭병 등과 함께 이를 규탄하는 교정서를 작성하여 서명 배포하였다. 1930년 2월에는 북경에서 조성환, 손일민 등과 한족동맹회를 조직하였고, 같은 해 7월 강구우 등과 조선혁명당 제1지부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2.7. 최후

이후 중경(重慶)으로 옮겨 신사회(新社會) 부위원장 등으로 항일투쟁을 하다가 1938년 2월 사천성 성도(四川省 成都)에서 영면하였다.

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이회영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