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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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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독립선언서는 1918년 조소앙이 기초한 독립 선언문으로, 일본과의 병합 무효와 육탄혈전을 통한 독립 쟁취를 주장한다. 정의를 통해 독립군을 촉구하고, 개인의 희생을 통해 민족 부활을 강조하며,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 것을 촉구한다. 기미독립선언보다 먼저 발표된 최초의 독립선언이며,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선언했다는 의의를 가진다. 김교헌, 김규식, 김좌진, 조소앙, 이승만, 안창호 등 39인의 독립운동가들이 연서자로 참여했다.

2. 무오독립선언서

조소앙이 기초한 무오독립선언서는 한일병합조약이 사기와 강박으로 이루어져 무효임을 선언하고, 무력 투쟁을 통한 독립 쟁취 의지를 담고 있다.[1]

2. 1. 핵심 내용

조소앙(본명 조용은)이 기초한 선언서에는 사기와 강박으로 이루어진 일본과의 병합(한일병합조약)은 무효이며, 육탄혈전으로라도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다.[1]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신성한 평등복리로 우리 자손 여민(黎民: 백성)에 대대로 전하게 하기 위하여, 여기 이민족 전제의 학대와 억압을 해탈하고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한다.[1] 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로써 하늘에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 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5천년 조정의 광휘(光輝)를 현양(顯揚)할 것이며, 이로써 2천만 백성[赤子]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니, 궐기[起]하라 독립군! 제[齊]하라 독립군![1]

천지로 망(網)한 한번 죽음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인즉, 개·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리오.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와 동체(同體)로 부활할 것이니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며, 집안이 기울어도 나라를 회복되면 3천리 옥토가 자가의 소유이니 일가(一家)를 희생하라![1]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본령(國民本領)을 자각한 독립임을 기억할 것이며,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며,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祇奉) 일절(一切) 사망(邪網)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1]

3. 무오독립선언의 배경

1919년 2월 (또는 1918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독립운동가 39명의 명의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기 전, 만주와 연해주는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해외 각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이 지역으로 집결하여 독립 의지를 결집하였다.[2]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신규식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3·1 운동을 주도하였다. 조소앙은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인 백관수, 이광수 등을 지도하여 2·8 독립 선언을 발표하도록 하였다. 신규식은 곽경, 선우혁 등을 국내의 손병희, 이승훈 등에게 밀파하여 3·1 운동 참여를 요청하였다.

4. 무오독립선언의 의의

무오독립선언은 1919년 3·1 운동에 앞서 발표된 '''최초의 독립선언'''이다.[2]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통합된 독립 의지를 보여주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에 대해 결사항전과 강력한 무장투쟁을 선언했다.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초석이 되었다. 참여 인사들 대부분은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고, 이탁 외에는 변절자가 없다. 또한, 독립 선언에 그치지 않고 노령에서 대한국민의회,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성에서 한성임시정부 등의 망명정부를 수립하는 구체적 행동으로 연결되었다.

5. 무오독립선언 연서자 39인

1919년 2월, 만주, 연해주, 중국, 미국 등 해외 각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39인이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에 서명하였다. 이 선언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참여한 인물들의 면면 또한 주목할 만하다.

김교헌, 김규식, 김동삼, 김좌진, 조소앙, 이동녕, 이승만, 안창호, 신채호 등 주요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공화주의를 지향했으며, 대종교,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를 믿었다.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한 이들의 참여는 선언의 무게를 더했다.

이들 외에도 이종탁[4], 임방[4]과 같이 가명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 훗날 변절한 이탁, 재만 한인 대지주 최병학도 서명에 참여했다.

5. 1. 연서자 명단 및 특징

이름생년몰년출신 지역종교정치이념운동계열당시 활동지역건국훈장 훈격서훈 년도비고
김교헌18681923경기 수원대종교공화주의북로만주독립장1977-
김규식18821950경기 양주-공화주의북로군정서만주독립장1963[3]
김동삼18781937경북 안동대종교공화주의서로, 임정만주대통령장1962-
김약연18681942함북 회령기독교-북간도국민회만주독립장1977-
김좌진18891930충남 홍성대종교공화주의북로만주대한민국장1962-
김학만18841931함남 단천--연해주노령애국장2012-
정재관18801930황해 황주기독교공화주의미주, 노령미주애국장1990-
조용은18871958경기 파주-공화주의임정만주대한민국장1988일명 조소앙
여준18621932경기 용인대종교공화주의서로만주독립장1968-
유동열18791950평북 박천-공화주의임정만주대통령장1989-
이광18791966충북 청주-공화주의만주, 상해중국 본토독립장1963-
이대위18781928평남 평양기독교공화주의미주중국 본토독립장1995-
이동녕18691940충남 천원대종교공화주의서로, 임정노령(러시아)대통령장1962-
이동휘18721935함남 단천기독교공화주의임정노령(러시아)대통령장1995-
이범윤18561940경기 고양-복벽주의북로만주대통령장1962-
이봉우18731921경남 동래-공화주의간도만주독립장1980-
이상룡18581932경북 안동대종교공화주의서로, 임정만주독립장1962-
이세영18691938충남 청양-복벽주의만주만주독립장1963-
이승만18751965황해 평산기독교공화주의미국, 임정미주대한민국장1949-
이시영18691953한성-공화주의서로, 임정만주대한민국장1949-
이종탁[4]--경상도--서로만주--가명 추정
이탁1872-평북 정주-공화주의서로만주--본명 이용화(李溶華), 변절
문창범18721938함북 경원-공산주의만주, 임정노령(러시아)대통령장1990-
박성태1873-한성대종교공화주의북로만주---
박용만18811928강원 철원기독교공화주의미주미주대통령장1995-
박은식18591925황해 황주-공화주의임정중국 본토대통령장1962-
박찬익18841949경기 파주대종교공화주의임정만주독립장1963-
손일민18841940경남 밀양-공화주의임정만주애국장1990-
신정18791922충북 고령대종교공화주의임정중국 본토대통령장1962본명 신규식
신채호18801936충남 대덕-공화주의연해주, 계몽중국 본토대통령장1962-
안정근18851949황해 신천카톨릭공화주의중로, 임정만주독립장1987안중근의 친동생
안창호18781938평남 강서기독교공화주의연해주, 미주미주대한민국장1962-
임방[4]------만주--가명 추정
윤세복18811960경남 밀양대종교공화주의대종교만주독립장1962본명 윤세린
조욱18751948한성대종교공화주의임정만주대통령장1962본명 조성환
최병학-----간도만주--재만 한인 대지주
한흥18881959함남 신흥-공화주의신간회국내독립장1968-
허혁18511939경북 선산--부민단만주애국장1991본명 허겸[5], 허위의 중형
황상규18901941경남 밀양-공화주의북로, 임정만주독립장1963-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9인은 대부분 공화주의 이념을 지향했으며, 대종교,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가졌다. 이들은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이탁을 제외한 대부분의 연서자들은 변절 없이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5. 2. 참여자로 추정되는 인물

나우(羅愚)[6], 정안립(鄭安立)[6], 정신(鄭信)[6], 서상용(徐相庸)[6], 서일(徐一)[6], 신팔균(申八均)[6] 등이 추가로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름출신 지역당시 활동 지역비고
나우평남 용강-본명 나순응(羅順膺)
정안립충북 진천만주정영택
정신함남 홍원만주-
서상용함북 길주노령-
서일함북 경원노령본명 서기학(徐夔學)
신팔균충북 진천만주일명 신동천(申東川)


6. 무오독립선언에 대한 평가

기미독립선언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으나, 무오독립선언은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무오독립선언 연서자들의 높은 순국 비율은 이들의 치열한 독립 투쟁 의지를 보여준다. 무오독립선언은 민족 자결주의와 민주 공화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자주독립 국가 건설을 위한 굳건한 의지를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다.

기미독립선언에 참여한 민족대표 33인 중 조국 광복을 본 사람은 15명이었지만, 이들보다 평균 연령이 5세 적은 무오독립선언 연서자 39명 중에서는 불과 11명만이 광복을 맞이했다. 이는 무오독립선언 연서자들이 조국 광복을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투쟁했는지를 보여준다.

7. 영향

1919년 2월 (또는 1918년 11월), 조소앙은 일본 도쿄로 건너가 2·8 독립 선언에 영향을 주었다.[2] 2·8 독립 선언은 유학생인 백관수, 이광수등이 참여 하였다. 신규식동제사 요원인 곽경, 선우혁 등을 국내의 손병희, 이승훈 등에게 밀파하여 3월 1일 독립혁명 거사에 참여하도록 밀서 등을 통해 동참을 요청하였다. 당시 한성(=서울)에서 손병희종교인 대표 33인의 기미독립선언과 함께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그 이전에 동경에서 2.8 학생 독립선언을 한 600여명의 학생들 중에서 약 390여 명이 일시에 귀국하여 각자의 고향에서 3.1 독립혁명을 일으켰다. 신규식의 지도를 받은 여운형은 1918년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3.1 혁명을 주도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다음백과 독립운동가 조소앙(趙素昻) https://100.daum.net[...]
[2] 서적 이야기 독립운동사 청아출판사 1994-11-07
[3] 웹사이트 김규식(金奎植) 관련 정보
[4] 웹사이트 이종탁, 임방 관련 정보
[5] 웹사이트 허겸 http://gumi.grandcul[...]
[6] 웹사이트 나우, 정안립, 정신, 서상용, 서일, 신팔균 관련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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