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이 요시노부
1. 개요
이시이 요시노부는 1939년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에서 태어난 일본의 축구 선수이자 지도자이다. 선수 시절에는 도요 공업(현 산프레체 히로시마)에서 활약하며 일본 사커 리그 3연패와 천황배 2회 우승에 기여했으며, 1968년 토와 부동산(후지타 공업)으로 이적하여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1975년에는 후지타 공업의 선수 겸 감독으로 취임하여 팀을 이끌었고, 이후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과 J리그 창설에도 기여했다. 1998년부터 이시가키시 친선 대사, FC 도쿄 어드바이저, 일본 축구 협회 기술 위원 등을 역임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2018년 사망했다.
| 이름 | 이시이 요시노부 |
|---|---|
| 원어 이름 | 石井 義信 |
| 로마자 표기 | Ishii Yoshinobu |
| 출생 | 1939년 3월 13일 |
| 출생지 |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 |
| 사망 | 2018년 4월 26일 |
| 국적 | 일본 |
| 신장 | 171cm |
| 포지션 | 미드필더 |
| 유소년 클럽 | 후쿠야마 아시요 고등학교 (1954-1956) |
|---|---|
| 프로 클럽 | 도요 공업 (1957-1967): 28경기 0골 후지타 공업 (1968-1975) |
| 국가대표 | 일본 (1962): 1경기 0골 |
| 클럽 | 후지타 공업 (1975-1980) 후지타 공업 (1988-1990, 총감독) |
|---|---|
| 국가대표 | 일본 (1986-1987) |
| 팀 (도요 공업) | 일본 사커 리그 우승 (1965) 일본 사커 리그 우승 (1966) 일본 사커 리그 우승 (1967)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1965)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1967)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 (1957)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 (1966) |
|---|---|
| 팀 (후지타 공업) |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 (1975) |
-
1939년 출생 -
달머스 라수라라
달머스 라수라라는 흑인 착취 영화와 TV 미니시리즈 《뿌리》에서 활약한 미국의 배우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에도 출연했으나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1939년 출생 -
윤석남
윤석남은 자연과 여성을 주제로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실험하며 독창적인 화풍을 선보이는 한국의 여성주의 미술가로, 1985년 '시월모임' 결성을 통해 한국 여성주의 미술 운동의 시작을 알렸고 국제적인 무대에서도 활동하며 여성의 삶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
쇼난 벨마레의 축구 선수 -
고지마 노부유키
고지마 노부유키는 쇼난 벨마레, 아비스파 후쿠오카 등에서 활약한 일본의 은퇴한 축구 골키퍼 선수로, 쇼난 벨마레 시절 천황배와 아시안 컵 위너스 컵 우승에 기여했으며 일본 국가대표로도 활동했고 은퇴 후에는 해설가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
쇼난 벨마레의 축구 선수 -
마쓰야마 히로아키
마쓰야마 히로아키는 교토부 출신의 일본 전 축구 선수이자 지도자로, 선수 시절 미드필더로 활약했으며 은퇴 후 일본 및 부탄에서 코치 및 감독으로 활동했고 고교 시절 득점왕을 차지한 경력이 있다. -
히로시마현 출신 축구 선수 -
기무라 다카히로
기무라 다카히로는 일본의 전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산프레체 히로시마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천황배 결승 진출에 기여했으며, 은퇴 후 여러 팀에서 코치 및 감독을 역임하며 유소년 육성과 팀 성적 향상에 기여했다. -
히로시마현 출신 축구 선수 -
모리시게 마사토
모리시게 마사토는 일본의 전 축구 선수로, 오이타 트리니타와 FC 도쿄에서 수비수 및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J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5회 선정, U-19, U-20, U-23 대표팀과 일본 A대표팀에서 활동, 2013년 EAFF 동아시안컵 우승 및 2014 FIFA 월드컵 출전, A매치 41경기 2골 기록 등의 업적을 남겼다.
2. 선수 경력
이시이 요시노부는 1939년 3월 13일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57년 도요 공업에 입단하여 일본 사커 리그에서 1965년부터 1967년까지 3년 연속 리그 우승과 1965년, 1967년 천황배 우승을 경험했다. 1968년에는 도와 부동산(후에 후지타 공업)으로 이적하여 1975년까지 선수 생활을 하였다.
1962년 9월 21일,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싱가포르를 상대로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 연도 | 출장 | 득점 |
|---|---|---|
| 1962 | 1 | 0 |
| | 1 || 0 |
2.1. 도요 공업 (현 산프레체 히로시마)
이시이는 1957년 도요 공업에 입단했다. 도요 공업은 1965년 신설된 일본 사커 리그에 참가하여 1965년부터 1967년까지 3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1965년과 1967년에는 천황배에서 우승했다. 오자와 미치히로를 연습 상대로 수비력을 갈고 닦았으며, 시모무라 유키오 감독 아래에서 오기 도쿠타쓰와 함께 하프백(HB)으로 활약, 주로 상대의 키맨을 마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야하타 제철의 미야모토 테루키의 마커로 유명했다. 이시이는 리그에서 28경기에 출전했다.
2.2. 도와 부동산/후지타 공업 (현 쇼난 벨마레)
이시이는 1968년 후지타 마사아키가 경영하는 도와 부동산이 축구부를 도치기현나스에 새로 창설할 때, 도요 공업의 시게마츠 요시노리와 함께 팀 강화에 기여했다. 이후 이적해 온 시모무라 유키오 감독과 함께 코치 겸 선수로 활동하며, 도와 부동산(후에 후지타 공업)을 도치기현 4부 리그에서 시작해 불과 4년 만에 JSL 1부로 승격시켰다.
1975년 후지타 감독으로 취임했으며, 전기 종료 후 팀은 도쿄로 이전함과 동시에 후지타 공업 클럽 축구부로 명칭을 변경했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초공격적인 팀을 만들었고, 마리뉴, 카르발류와 같은 브라질 선수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다. 쿠리모토 나오시, 고마에다 미츠루, 우에다 에이지, 우에키 시게하루 등을 이끌고 1977년 시즌 JSL 1부에서 사상 최다 득점(64득점)으로 첫 우승을 차지했으며, 1979년에도 우승했다. 1977년과 1979년에는 천황배도 두 번 제패했다.
2.3. 국가대표팀 경력
이시이 요시노부일본어는 1962년 9월 21일 싱가포르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데뷔했다.
|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 ||
|---|---|---|
| 연도 | 출장 | 득점 |
| 1962 | 1 | 0 |
| | 1 || 0 |
3. 지도자 경력
이시이 요시노부는 1975년부터 1980년까지 후지타 공업(현 쇼난 벨마레)의 감독을 맡아 1977년과 1979년 리그 우승, 1979년 천황배 우승을 이끌었다. 1986년에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어 1986년 아시안 게임에 참가했지만, 1988년 서울 올림픽 예선에서 탈락하며 사임했다. 1988년부터 1990년까지 다시 후지타 공업의 감독을 맡았으나, 1989-90 시즌에 팀이 2부 리그로 강등되면서 물러났다.
| 연도 | 클럽 | 소속 | 리그전 | 컵 대회 | ||||||
|---|---|---|---|---|---|---|---|---|---|---|
| 순위 | 승점 | 경기 | 승 | 무 | 패 | JSL컵 | 천황배 | |||
| 1975 | 후지타 | JSL 1부 | 7위 | 13 | 18 | 5 | 3 | 10 | - | 준우승 |
| 1976 | 3위 | 22 | 18 | 9 | 4 | 5 | 준결승 | 준결승 | ||
| 1977 | 우승 | 60 | 18 | 14 | 1PK승 2PK패 | 1 | 우승 | 우승 | ||
| 1978 | 3위 | 46 | 18 | 9 | 3PK승 4PK패 | 2 | 8강 | 4강 | ||
| 1979 | 우승 | 53 | 18 | 12 | 1PK승 3PK패 | 2 | 준우승 | 우승 | ||
| 1980 | 준우승 | 23 | 18 | 10 | 3 | 5 | 8강 | 8강 | ||
| 1988-89 | 4위 | 36 | 22 | 10 | 6 | 6 | 2회전 | 준우승 | ||
| 1989-90 | 11위 | 17 | 22 | 4 | 5 | 13 | 준결승 | 8강 | ||
| 총계 | 152 | 73 | 35 | 44 | - | - | ||||
3.1. 후지타 공업 (현 쇼난 벨마레)
1975년, 이시이는 후지타 공업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취임했다. 당시 팀은 도쿄로 이전하면서 후지타 공업 축구부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시이는 초공격적인 팀을 만들었고, 마리뉴, 카르발류 등 브라질 선수들의 신뢰를 받으며 쿠리모토 나오시, 고마에다 미츠루, 우에다 에이지, 우에키 시게하루 등을 이끌었다. 후지타 공업은 1977년에 리그 최다 득점(64득점)으로 우승했고, 1979년에도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1979년 천황배에서도 우승했다. 1980년에 팀을 떠났다.
3.2.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이시이는 1986년 모리 타카지의 후임으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986년 아시안 게임에서 일본 대표팀을 지휘했다.
당시 일본 대표팀은 중동은 물론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도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시이는 "아시아에서 확실히 일본보다 개인기가 떨어지는 곳은 캄보디아, 네팔, 마카오 정도였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시이는 서울 올림픽 예선 통과를 위해 수비적인 팀을 구성했다. 모리 타카지 전 감독이 패스를 잇는 축구를 지향하다 올림픽 예선 및 월드컵 예선에서 패퇴한 점을 감안, 승리에 집착하여 수비적인 전술을 선택하고, 속공과 하라 히로미의 높이를 활용한 세트 플레이로 득점을 노렸다.
키무라 카즈시를 부진을 이유로 대표팀에서 제외하고, 공격적인 선수는 하라, 미즈누마 타카시, 테즈카 사토시 3명뿐이었다. 츠나미 토시히데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하여 니시무라 아키히로와 함께 배치하고, 오쿠데라 야스히코, 나카모토 쿠니하루, 카토 히사시, 카츠야 토시노부, 호리이케 타쿠미 5명의 수비수와 골키퍼 모리시타 신이치를 기용했다. 왼쪽 풀백인 오쿠데라에게 공수 밸런스를 맡겼다.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에서는 중국과의 대결이 유력했다.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3-5-2 시스템을 시도했는데, 이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마쓰다 코치였던 오프트와 오쿠데라에게 배우며 중국의 2톱에 대응했다.
1차전은 원정 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라의 골로 승리했지만, 홈에서 열린 2차전에서 패배하며 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하고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이 경기에서 일본은 처음으로 선제골을 허용하며 흔들렸고, 결국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감독 취임으로 팀을 만들 시간이 부족했던 이시이는 예선 통과를 위해 당시 일본 최고의 선수로 불리던 키무라를 제외하고 수비적인 전술을 선택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3.3. JSL 상임 운영 위원 및 J리그 창설
1980년, 후지타 감독에서 물러난 후 JSL 상임 운영 위원에 취임했다. 회사 내에서 후생 과장이라는 비교적 여유로운 직책을 맡았던 이시이는 모리 겐지와 함께 상임 운영 위원의 리더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83년 기노모토 고조가 JSL 사무국으로 전임되어 운영에 관해 프로 의식을 가지려는 분위기가 생겨났지만, 이시이는 1984년부터 현 체제를 유지하면서 JSL을 활성화할 방안이 없을까 고심했고, 다카하시 히데토키 총무 주사와 모리에게 상담한 후, 개혁을 위한 소위원회를 몇 개 발족시켰다. 여기서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검토되었으며, 선수 프로화에 대한 논의 등이 이루어졌다. 1986년에는 일본 대표팀 감독에 취임했기 때문에 JSL 상임 운영 위원의 업무는 잠시 떠났지만, 이후 JSL 내에 개설된 프로 리그화를 검토하는 프로젝트 (후에 활성화 위원회, 개설 준비 위원회)에 모리, 기노모토 등과 함께 중심 인물로 참여하여, J리그 창설에 진력했다.
3.4. 벨마레 히라쓰카 (현 쇼난 벨마레)
J리그 발족 후에는 벨마레 히라쓰카(현 쇼난 벨마레)의 이사, 강화 부장 등을 역임했다. 유망한 선수 영입 등에 수완을 발휘하여 히라쓰카를 한때 강호 팀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