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와 미치히로
1. 개요
오자와 미치히로는 1932년 우쓰노미야에서 태어난 일본의 전 축구 선수이다. 쓰쿠바 대학을 졸업하고 1955년 산프레체 히로시마 (당시 도요 공업)에 입단하여 하프백으로 활약했다. 1962년 일본 연간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1965년 일본 사커 리그 무패 우승에 기여했다. 1966년 은퇴 후에는 코치로 활동하며 1964년까지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36경기에 출전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 1958년과 1962년 아시안 게임에 참가했으며, 2014년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서 활동하며 2,000명 이상의 축구 선수를 육성했다.
| 이름 | 오자와 미치히로 |
|---|---|
| 원어 이름 | 小沢 通宏 |
| 로마자 표기 | Ozawa Michihiro |
| 출생일 | 1932년 12월 25일 |
| 출생지 | 도치기현 우쓰노미야시 |
| 신장 | 173cm |
| 포지션 | 미드필더, 수비수 |
| 유소년 클럽 | 도치기현립 우쓰노미야 고등학교 (1948-1950) 도쿄 교육대학 (1951-1954) |
|---|---|
| 프로 클럽 | 도요 공업 (1955-1967) |
| 클럽 출장 (골) | 42 (0) |
| 국가대표팀 |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1956-1964) |
|---|---|
| 국가대표 출장 (골) | 36 (0) |
| 소속팀 | 도요 공업 |
|---|---|
| 일본 사커 리그 | 1965년 (우승) 1966년 (우승) 1967년 (우승) |
| 천황배 | 1965년 (우승) 1967년 (우승) 1957년 (준우승) 1966년 (준우승) |
-
도쿄 교육대학 동문 -
최규하
최규하는 외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거쳐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12·12 군사 반란 등으로 신군부에 권력을 내주고 하야하였으며 재임 기간 실권이 거의 없었다. -
도쿄 교육대학 동문 -
가토 사와오
가토 사와오는 일본의 체조 선수로, 올림픽 개인 종합 2연패를 포함하여 총 8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며 일본 체조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아름다운 연기 스타일로 명성을 얻어 국제 체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소행성도 발견되었다. -
1932년 출생 -
피터 아이젠먼
피터 아이젠먼은 탈구조주의 건축과 CAD의 선구적인 미국 건축가이자 이론가이며, 뉴욕 5인조의 일원으로서 활동했고, 유럽 유대인 학살 기념관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미국 디자인 어워드와 울프상을 수상했다. -
1932년 출생 -
박봉식 (정치학자)
박봉식은 대한민국의 정치학자이자 교육자로, 서울대학교 교수 및 총장, 부산외국어대학교와 금강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며 국가보위입법회의 위원 활동, 총선 무소속 출마, 토지매입 알선 사기 사건 연루, 서울대학교 본부 점거 사태 관련 발언 등으로 논란이 있었다. -
일본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
스가마타 데쓰오
스가마타 데쓰오는 일본의 전 축구 선수로, 수비수로 활약하며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23경기에 출전했고, 히타치 제작소 축구부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1980년과 1982년 일본 사커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는 등 다양한 국제 대회에 출전했다. -
일본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
고지마 노부유키
고지마 노부유키는 쇼난 벨마레, 아비스파 후쿠오카 등에서 활약한 일본의 은퇴한 축구 골키퍼 선수로, 쇼난 벨마레 시절 천황배와 아시안 컵 위너스 컵 우승에 기여했으며 일본 국가대표로도 활동했고 은퇴 후에는 해설가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 선수 경력
오자와 미치히로는 토치기현립 우쓰노미야 고등학교와 쓰쿠바 대학(당시 도쿄 교육 대학) 재학 시절 전국 고등학교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간토 대학 축구 리그전 우승 등 학창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대학 졸업 후 1955년 도요 공업(현 산프레체 히로시마)에 입단하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62년 일본 올해의 축구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1965년 출범한 일본 사커 리그(JSL)에서는 팀의 3년 연속 우승(1965년-1967년)에 기여했다. JSL 통산 42경기에 출전한 뒤 1967년 은퇴했다.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는 1956년 대한민국과의 1956년 하계 올림픽 예선 경기를 통해 A매치에 데뷔했다. 이후 1956년 멜버른 올림픽, 1958년 아시안 게임, 1962년 아시안 게임 등 주요 대회에 참가했다. 1964년까지 국가대표로 총 36경기에 출전했다.
2014년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1. 클럽 경력
쓰쿠바 대학 (당시 도쿄 교육대학)을 졸업한 후, 1955년 마쓰다 (당시 동양공업)에 입사하여 동양공업 축구부 (현 산프레체 히로시마)에 합류했다. 오바타 미노루 감독의 지도 아래 하프백으로 뛰며 시모무라 유키오, 이시이 요시노부, 키타지마 히데오 등과 함께 팀의 주축 선수로 활약했다. 1962년에는 팀의 국민체육대회 첫 우승과 전일본 실업단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에 기여했으며, 이러한 활약을 인정받아 같은 해 제2회 일본 연간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1965년 일본 사커 리그(JSL)가 출범하자, 오자와는 풀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하여 이마니시 카즈오, 니와 요스케, 쿠와바라 히로유키와 함께 수비 라인을 구축했다. 마츠모토 이쿠오, 오기 토쿠타츠, 쿠와바라 라쿠시 등 공격진과 함께 팀의 JSL 초대 시즌 무패 우승에 공헌했다. 동양공업은 1965년부터 1967년까지 리그 3연패를 달성했다.
1966년부터는 코치 겸 선수로 활동했으나, 회사 상사로부터 선수 생활보다는 업무에 집중하라는 권유를 받고 1967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JSL 통산 기록은 42경기 출전이다. 선수 은퇴 후에도 동양공업 축구부 코치로 활동하며 팀에 기여했다.
이후에는 회사원으로 동양공업/마쓰다에서 근무했다. 1970년대에는 해외 근무를 통해 호주 멜버른에서 1년, 북미 마쓰다 부사장으로 로스앤젤레스에서 3년을 보냈다. 귀국 후에는 이사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이후 마쓰다를 퇴사하고 마쓰다 렌탈리스 사장으로 취임했다.
축구계와의 인연은 1984년, 마쓰다 SC가 JSL 2부 리그로 강등되자 축구부 부장으로 복귀하면서 다시 이어졌다. 그는 마쓰다 SC가 프로팀 산프레체 히로시마로 전환되기 직전 해인 1991년까지 부장직을 맡았다. 또한, J리그 출범을 앞두고 일본 축구 협회의 나가누마 켄, 카와부치 사부로 등과 협상을 진행하며 산프레체 히로시마의 창단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오자와 미치히로는 1955년 도쿄 아시안 게임 대비를 위한 B대표팀에 선발된 것을 시작으로, 1956년 6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A대표로 정식 발탁되었다. 그는 1956년 하계 올림픽 예선에 참가하여 6월 3일 대한민국을 상대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대표팀의 주전 선수로 활약하며 1956년 멜버른 올림픽 본선, 1958년 아시안 게임, 1962년 아시안 게임 등 주요 국제 대회에 참가했다.
1960년부터 1964년까지는 나가누마 겐 감독 체제 하에서 대표팀 주장을 맡아 수비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1964년, 31세의 나이로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대표팀의 주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대 교체를 이유로 최종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그는 1964년까지 국가대표로 총 36경기에 출전했으며, 득점은 기록하지 못했다. 선수 은퇴 후 오랜 시간이 지난 2014년, 오자와는 일본 축구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2.1. 국가대표팀 출전 대회
1955년 도쿄 아시안 게임을 대비하여 젊은 선수를 기용하는 방침에 따라 야에가시 시게오와 함께 B대표로 선출되었다. 1956년 6월에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A대표로 정식 선발되어 1956년 하계 올림픽 예선에 참가했다. 이 예선 중 6월 3일에 열린 대한민국과의 경기가 그의 국가대표 데뷔전이었다. 이후 대표팀의 주전 선수로 자리 잡아 거의 모든 경기에 출전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는 대한민국과 두 경기를 치렀다. 첫 경기는 2-0으로 승리했으나, 두 번째 경기에서는 0-2로 패배했다. 결국 추첨을 통해 일본이 올림픽 본선 진출권을 획득했다. 오자와는 당시 추첨에서 당첨된 후 모두가 만세를 부르며 기뻐했다고 회상했다. 멜버른 올림픽 본선에서는 개최국 호주에게 0-2로 패배했다. 오자와는 이 패배가 일본 축구가 정신론에서 벗어나 과학적 분석을 도입하는 등 근대화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후 1958년 아시안 게임과 1962년 아시안 게임에도 출전했다. 나가누마 겐이 감독을 맡았던 1960년부터 1964년까지는 대표팀 주장을 역임하며 수비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이 시기 일본 대표팀은 1958년 아시안 게임과 로마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탈락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특히 로마 올림픽 예선 탈락은 일본 축구 협회가 위기감을 느끼고 독일 출신 코치 데트마르 크라머를 영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오자와는 31세의 대표팀 주장이었으나, 크라머 코치가 제안한 세대 교체 방침에 따라 최종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이 결정은 당시 대표팀 스태프 회의에서 격론을 불러일으켰고, 언론에서도 예상 밖의 탈락으로 받아들여졌다. 오자와는 올림픽 일본 대표팀의 첫 경기였던 아르헨티나전 해설을 맡아 복잡한 심경으로 경기를 지켜보았지만, 동료들의 투지에 감격하여 경기 후 라커룸을 찾아 격려했다고 한다. 그는 이 탈락의 아쉬움을 일본 사커 리그(JSL)에서의 활약으로 승화시켰다.
오자와는 1964년까지 일본 대표팀 소속으로 총 36경기에 출전했다. 2014년에는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주요 출전 대회
* 1956년 멜버른 올림픽
* 아시안 게임(1958, 1962)
* 1960년 로마 올림픽 예선
* 1962년 FIFA 월드컵 예선
국가대표팀 출전 기록
| |개최일||개최 도시||경기장||상대||결과||감독||대회 | |||||||
|---|---|---|---|---|---|---|---|
| 1. | 1956년 6월 3일 | 도쿄도 | 고라쿠엔 경륜장 | 대한민국 | ○2-0 | 다케코시 시게마루 | 올림픽 예선 |
| 2. | 1956년 6월 10일 | 도쿄도 | 고라쿠엔 경륜장 | 대한민국 | ●0-2(연장) | 올림픽 예선 | |
| 3. | 1956년 11월 27일 | 멜버른 | 호주 | ●0-2 | 올림픽 | ||
| 4. | 1958년 5월 26일 | 도쿄도 | 도쿄 축구장 | 필리핀 | ●0-1 | 가와모토 다이조 | 아시안 게임 |
| 5. | 1958년 5월 28일 | 도쿄도 | 국립 가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 | 홍콩 | ●0-2 | 아시안 게임 | |
| 6. | 1958년 12월 25일 | 홍콩 | 홍콩 | ●2-5 | 다케코시 시게마루 | 국제 친선 경기 | |
| 7. | 1958년 12월 28일 | 쿠알라룸푸르 | 말라야 | ●2-6 | 국제 친선 경기 | ||
| 8. | 1959년 1월 4일 | 페낭 | 말라야 | ○3-1 | 국제 친선 경기 | ||
| 9. | 1959년 1월 10일 | 싱가포르 | 싱가포르 | ○4-3 | 국제 친선 경기 | ||
| 10. | 1959년 8월 31일 | 쿠알라룸푸르 | 홍콩 | △1-1(연장) | 메르데카 대회 | ||
| 11. | 1959년 9월 2일 | 쿠알라룸푸르 | 홍콩 | ●2-4 | 메르데카 대회 | ||
| 12. | 1959년 9월 3일 | 쿠알라룸푸르 | 싱가포르 | ○4-1 | 메르데카 대회 | ||
| 13. | 1959년 9월 5일 | 쿠알라룸푸르 | 대한민국 | △0-0 | 메르데카 대회 | ||
| 14. | 1959년 9월 6일 | 쿠알라룸푸르 | 대한민국 | ●1-3 | 메르데카 대회 | ||
| 15. | 1959년 12월 13일 | 도쿄도 | 고라쿠엔 경륜장 | 대한민국 | ●0-2 | 올림픽 예선 | |
| 16. | 1959년 12월 20일 | 도쿄도 | 고라쿠엔 경륜장 | 대한민국 | ○1-0 | 올림픽 예선 | |
| 17. | 1960년 11월 6일 | 서울 | 대한민국 | ●1-2 | 데트마르 크라머(코치) | 월드컵 예선 | |
| 18. | 1961년 5월 28일 | 도쿄도 | 국립 가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 | 말라야 | ○3-2 | 다카하시 에이신 | 국제 친선 경기 |
| 19. | 1961년 6월 11일 | 도쿄도 | 국립 가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 | 대한민국 | ●0-2 | 월드컵 예선 | |
| 20. | 1961년 8월 2일 | 쿠알라룸푸르 | 말라야 | ●2-3 | 메르데카 대회 | ||
| 21. | 1961년 8월 6일 | 쿠알라룸푸르 | 인도 | ○3-1 | 메르데카 대회 | ||
| 22. | 1961년 8월 10일 | 쿠알라룸푸르 | 남베트남 | ●2-3 | 메르데카 대회 | ||
| 23. | 1961년 11월 28일 | 도쿄도 | 국립 가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 | 유고슬라비아 | ●0-1 | 국제 친선 경기 | |
| 24. | 1962년 8월 25일 | 자카르타 | 태국 | ○3-1 | 아시안 게임 | ||
| 25. | 1962년 8월 29일 | 자카르타 | 인도 | ●0-2 | 아시안 게임 | ||
| 26. | 1962년 8월 30일 | 자카르타 | 대한민국 | ●0-1 | 아시안 게임 | ||
| 27. | 1962년 9월 8일 | 쿠알라룸푸르 | 말라야 | △2-2 | 메르데카 대회 | ||
| 28. | 1962년 9월 12일 | 쿠알라룸푸르 | 파키스탄 | △1-1 | 메르데카 대회 | ||
| 29. | 1962년 9월 15일 | 쿠알라룸푸르 | 버마 | ●1-3 | 메르데카 대회 | ||
| 30. | 1962년 9월 21일 | 싱가포르 | 싱가포르 | ●1-2 | 국제 친선 경기 | ||
| 31. | 1963년 8월 8일 | 쿠알라룸푸르 | 말레이시아 | ○4-3 | 나가누마 겐 | 메르데카 대회 | |
| 32. | 1963년 8월 10일 | 쿠알라룸푸르 | 태국 | ○4-1 | 메르데카 대회 | ||
| 33. | 1963년 8월 12일 | 쿠알라룸푸르 | 남베트남 | ○5-1 | 메르데카 대회 | ||
| 34. | 1963년 8월 13일 | 쿠알라룸푸르 | 대한민국 | △1-1 | 메르데카 대회 | ||
| 35. | 1963년 8월 15일 | 쿠알라룸푸르 | 중화민국 | ●0-2 | 메르데카 대회 | ||
| 36. | 1964년 3월 3일 | 싱가포르 | 싱가포르 | ○2-1 | 국제 친선 경기 |
2.2.2. 국가대표팀 통계
1955년 도쿄 아시안 게임을 대비하여 젊은 선수를 기용하는 방침에 따라 야에가시 시게오와 함께 B대표로 선발되었다. 1956년 6월에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A대표로 발탁되어 1956년 하계 올림픽 예선에 참가했으며, 이 예선에서 6월 3일 대한민국을 상대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대표팀 주전 선수로 자리매김하여 거의 모든 경기에 출전했다.
멜버른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는 대한민국과 두 경기를 치렀다. 첫 경기는 2-0으로 승리했으나, 두 번째 경기에서는 0-2로 패배하여 추첨을 통해 올림픽 본선 진출을 결정했다. 오자와는 당시 추첨에서 당첨된 후 모두가 만세를 부르며 기뻐했다고 회상했다. 1956년 11월, 1956년 멜버른 올림픽 본선에 출전하여 홈팀 호주와의 경기에서 0-2로 패배했다. 오자와는 이 패배가 정신력만 강조하던 것에서 벗어나 과학적 분석을 도입하는 등 일본 축구 근대화의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1958년 아시안 게임과 1962년 아시안 게임에도 출전했다. 나가누마 겐이 감독을 맡았던 1960년부터 1964년까지는 대표팀 주장을 맡아 수비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이 시기 일본 대표팀은 도쿄 아시안 게임과 로마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탈락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로마 올림픽 예선 탈락은 일본 축구 협회에 위기감을 주어 데트마르 크라머를 코치로 영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4년, 31세의 오자와는 대표팀 주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크라머 코치의 젊은 선수 기용 제안에 따라 세대 교체를 이유로 1964년 도쿄 올림픽 대표팀 최종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대표팀 스태프 회의에서는 격론이 벌어졌고, 언론에서도 예상 밖의 탈락으로 여겨졌다. 오자와는 올림픽 일본과 아르헨티나의 조별 리그 1차전 해설을 맡아 복잡한 심경으로 경기를 지켜보았으나, 동료들의 투지에 감동하여 경기 후 라커룸을 찾아 격려했다고 한다. 그는 이 탈락 경험이 일본 사커 리그(JSL)에서의 활약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술회했다.
오자와는 1964년까지 일본 대표팀 소속으로 국제 A매치 36경기에 출전했으나 득점은 기록하지 못했다.
2014년,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일본 통산 기록 | ||
|---|---|---|
| 연도 | 출장 | 득점 |
| 1956 | 3 | 0 |
| 1957 | 0 | 0 |
| 1958 | 4 | 0 |
| 1959 | 9 | 0 |
| 1960 | 1 | 0 |
| 1961 | 6 | 0 |
| 1962 | 7 | 0 |
| 1963 | 5 | 0 |
| 1964 | 1 | 0 |
| |36||0 |
| No. | 날짜 | 장소 | 경기장 | 상대 | 결과 | 감독 | 대회 |
|---|---|---|---|---|---|---|---|
| 1. | 1956년 6월 3일 | 일본 도쿄 | 고라쿠엔 경륜장 | 대한민국 | ○ 2-0 | 다케코시 시게마루 | 올림픽 예선 |
| 2. | 1956년 6월 10일 | 일본 도쿄 | 고라쿠엔 경륜장 | 대한민국 | ● 0-2 (연장) | 올림픽 예선 | |
| 3. | 1956년 11월 27일 | 호주 멜버른 | 호주 | ● 0-2 | 올림픽 | ||
| 4. | 1958년 5월 26일 | 일본 도쿄 | 도쿄 축구장 | 필리핀 | ● 0-1 | 가와모토 다이조 | 아시안 게임 |
| 5. | 1958년 5월 28일 | 일본 도쿄 | 국립 가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 | 홍콩 | ● 0-2 | 아시안 게임 | |
| 6. | 1958년 12월 25일 | 홍콩 | 홍콩 | ● 2-5 | 다케코시 시게마루 | 국제 친선 경기 | |
| 7. | 1958년 12월 28일 | 말라야 연방 쿠알라룸푸르 | 말라야 | ● 2-6 | 국제 친선 경기 | ||
| 8. | 1959년 1월 4일 | 말라야 연방 페낭 | 말라야 | ○ 3-1 | 국제 친선 경기 | ||
| 9. | 1959년 1월 10일 | 싱가포르 | 싱가포르 | ○ 4-3 | 국제 친선 경기 | ||
| 10. | 1959년 8월 31일 | 말라야 연방 쿠알라룸푸르 | 홍콩 | △ 1-1 (연장) | 메르데카 대회 | ||
| 11. | 1959년 9월 2일 | 말라야 연방 쿠알라룸푸르 | 홍콩 | ● 2-4 | 메르데카 대회 | ||
| 12. | 1959년 9월 3일 | 말라야 연방 쿠알라룸푸르 | 싱가포르 | ○ 4-1 | 메르데카 대회 | ||
| 13. | 1959년 9월 5일 | 말라야 연방 쿠알라룸푸르 | 대한민국 | △ 0-0 | 메르데카 대회 | ||
| 14. | 1959년 9월 6일 | 말라야 연방 쿠알라룸푸르 | 대한민국 | ● 1-3 | 메르데카 대회 | ||
| 15. | 1959년 12월 13일 | 일본 도쿄 | 고라쿠엔 경륜장 | 대한민국 | ● 0-2 | 올림픽 예선 | |
| 16. | 1959년 12월 20일 | 일본 도쿄 | 고라쿠엔 경륜장 | 대한민국 | ○ 1-0 | 올림픽 예선 | |
| 17. | 1960년 11월 6일 | 대한민국 서울 | 대한민국 | ● 1-2 | 데트마르 크라머 (코치) | 월드컵 예선 | |
| 18. | 1961년 5월 28일 | 일본 도쿄 | 국립 가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 | 말라야 | ○ 3-2 | 다카하시 에이신 | 국제 친선 경기 |
| 19. | 1961년 6월 11일 | 일본 도쿄 | 국립 가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 | 대한민국 | ● 0-2 | 월드컵 예선 | |
| 20. | 1961년 8월 2일 | 말라야 연방 쿠알라룸푸르 | 말라야 | ● 2-3 | 메르데카 대회 | ||
| 21. | 1961년 8월 6일 | 말라야 연방 쿠알라룸푸르 | 인도 | ○ 3-1 | 메르데카 대회 | ||
| 22. | 1961년 8월 10일 | 말라야 연방 쿠알라룸푸르 | 남베트남 | ● 2-3 | 메르데카 대회 | ||
| 23. | 1961년 11월 28일 | 일본 도쿄 | 국립 가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 | 유고슬라비아 | ● 0-1 | 국제 친선 경기 | |
| 24. | 1962년 8월 25일 |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 태국 | ○ 3-1 | 아시안 게임 | ||
| 25. | 1962년 8월 29일 |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 인도 | ● 0-2 | 아시안 게임 | ||
| 26. | 1962년 8월 30일 |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 대한민국 | ● 0-1 | 아시안 게임 | ||
| 27. | 1962년 9월 8일 | 말라야 연방 쿠알라룸푸르 | 말라야 | △ 2-2 | 메르데카 대회 | ||
| 28. | 1962년 9월 12일 | 말라야 연방 쿠알라룸푸르 | 파키스탄 | △ 1-1 | 메르데카 대회 | ||
| 29. | 1962년 9월 15일 | 말라야 연방 쿠알라룸푸르 | 버마 | ● 1-3 | 메르데카 대회 | ||
| 30. | 1962년 9월 21일 | 싱가포르 | 싱가포르 | ● 1-2 | 국제 친선 경기 | ||
| 31. | 1963년 8월 8일 |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 말레이시아 | ○ 4-3 | 나가누마 겐 | 메르데카 대회 | |
| 32. | 1963년 8월 10일 |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 태국 | ○ 4-1 | 메르데카 대회 | ||
| 33. | 1963년 8월 12일 |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 남베트남 | ○ 5-1 | 메르데카 대회 | ||
| 34. | 1963년 8월 13일 |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 대한민국 | △ 1-1 | 메르데카 대회 | ||
| 35. | 1963년 8월 15일 |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 중화 타이베이 | ● 0-2 | 메르데카 대회 | ||
| 36. | 1964년 3월 3일 | 싱가포르 | 싱가포르 | ○ 2-1 | 국제 친선 경기 |
3. 은퇴 후
1966년에 코치 겸 선수로 활동하던 중, 회사 상사로부터 은퇴 권유를 받고 현역에서 물러났다.
선수 은퇴 후에는 사원으로서 마쓰다에서 근무했다. 1970년 전후에는 해외 근무를 하여, 호주 멜버른에서 1년, 북미 마쓰다 부사장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3년 동안 거주했다. 일본으로 귀국한 후에는 이사 총무부장을 지냈으며, 이후 마쓰다를 퇴사하고 마쓰다 렌탈리스 사장에 취임했다.
축구계와의 인연은 1984년, 당시 일본 사커 리그 2부로 강등된 마쓰다 SC의 축구부 부장으로 취임하면서 이어졌다. 그는 마쓰다 SC가 프로팀 산프레체 히로시마로 전환되기 직전 해인 1991년까지 부장직을 맡았다. 또한, J리그 출범을 앞두고 일본 축구 협회의 나가누마 켄, 카와부치 사부로 등과 협상하여 산프레체 히로시마의 창단과 J리그 진입에 기여했다.
3.1. 지도자 경력
1950년대 후반부터 동양공업 축구부 선수로서 히로시마 시내 학교에서 축구 지도를 시작했으며,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노무라 무츠히코와 이마니시 카즈오를 가르쳤다. 현역 은퇴 후에는 동양공업의 코치를 맡았다.
축구부를 떠난 후에도 지도자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멜버른으로 해외 근무를 하던 시기에는 현지의 일본인 아이들을 지도했다.
일본으로 귀국한 후, 1975년부터 히로시마현 아키군 후추정에 설립된 아키후추 축구 스포츠 소년단의 총감독으로 취임했다. 현재도 코치로서 초등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으며, 2014년 기준으로 2,000명 이상을 가르쳤다. 그의 제자 중에는 우메다 나오야와 미야모토 타쿠야 같은 프로 축구 선수들도 있다.
4. 수상 내역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구체적인 수상 내역을 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