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공신회맹축 - 보사공신녹훈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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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십공신회맹축 - 보사공신녹훈후는 1694년 갑술환국으로 재집권한 서인이 기사환국에 파훈된 5명의 공신을 복훈한 것을 계기로 제작된 회맹축이다. 숙종 대 서인과 남인의 정쟁, 왕권 강화 노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며, 조선 후기 기록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1680년 경신환국 당시 열린 회맹축을 기록하고 있으며, 개국공신부터 보사공신에 이르는 역대 20종의 공신과 그 자손들이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17세기 후반 숙종 대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사료로서 역사·학술적 가치가 높으며, 2021년 2월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십공신회맹축 - 보사공신녹훈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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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공신회맹축 - 보사공신녹훈후
이름이십공신회맹축 - 보사공신녹훈후
로마자 표기Isip gongsin hoemaengchuk (Scroll of Oath-taking Rites by 20 Meritorious Subjects)
유형국보
지정 번호335
지정일2007년 4월 20일에 보물로, 2021년 2월 18일에 국보로 지정
주소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 한국학중앙연구원 (운중동)
시대조선시대
소유자국유
면적세로 88.5 x 가로 2,414cm
수량1축
문화재청 ID12,151300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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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작 배경

이 문서는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 삭훈되었던 5명의 공신을 복훈한 것을 계기로 제작되었다.

회맹축 자체는 1680년 경신환국 당시에 서인 주도로 열렸던 회맹제를 기록하고 있다. 이 회맹제는 개국공신부터 보사공신에 이르기까지 역대 20종의 공신들과 그 자손들이 참석하여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자리였다.

문서에는 1680년 회맹제 당시의 회맹문, 보사공신을 포함한 역대 공신들과 그 후손 총 489명의 명단을 기록한 회맹록, 종묘에 올리는 축문과 제문 등이 담겨 있으며, 축의 말미에는 제작 사유와 제작 연대(1694년 10월)를 명시했다.

1680년 회맹제에는 489명 중 412명만 참석했으며, 불참한 77명의 명단과 그 사유(신병身病, 재상在喪, 발병廢病, 연유年幼, 변장재외邊將在外, 피적被謫 등)도 사유별로 기록하고 ‘康熙十九年 八月日’이라 적었다.

회맹축의 마지막 부분에는 1694년 6월 20일의 '복훈시고종묘제축문(復勳時告宗廟祭祝文)'에 이어 ‘康熙三十三年十月日’이라는 제작 연대를 적고, 좌측에 세필로 ‘己巳罷勳甲戌復勳’(기사년에 파훈되고 갑술년에 복훈됨)이라 쓴 후 그 위에 국새인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찍어 왕실 문서로서 완전한 형식을 갖추었다.

회맹제가 열린 1680년과 회맹축이 실제로 제작된 1694년 사이에 14년의 시간 차이가 있는 것은 숙종 재위 기간 중 발생한 정치적 변동 때문이었다.

이 회맹축은 왕실이나 충훈부에서 최고의 재질을 사용하여 거대한 크기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성 들여 쓴 글씨, 선명한 붉은 선(주사란), 고급 재질, 장대한 크기 등 모든 면에서 조선 후기 기록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또한, 현존하는 회맹축 중 국새가 날인되어 있고 형식과 내용 면에서 완전한 상태로 전해지는 유일한 어람용(왕이 보는 용도) 회맹축이라는 점에서 매우 희소하고 높은 가치를 지닌다. 1646년(인조 24년)에 제작된 〈이십공신회맹축 - 영국공신녹훈후〉는 국새가 없으며, 1728년(영조 4년) 분무공신 회맹축은 실물이 전해지지 않는다.

이 회맹축은 왕실 유물 중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로 제작되어 조선 후기 왕실 공예품의 백미(白眉)로서 예술성이 우수하다는 점과 더불어, 그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1년 2월 국보로 지정되었다.

2.1. 정치적 변동과 회맹축

숙종 재위(1674년~1720년) 중 일어난 여러 정치적 변동 때문에 회맹제가 거행된 시기(1680년)와 이 회맹축을 조성한 시기(1694년)는 15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 당시 남인과 더불어 정치 중심세력 중 하나였던 서인1680년 경신환국을 계기로 집권하여 공신이 되었으나,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공신으로서의 지위가 박탈되었다(삭훈).

이후 서인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다시 집권하면서 공신 지위를 회복(복훈)하였고, 이때 김만기, 김석주, 이입신, 남두북, 정원로, 박빈 등 총 6명에게 1등부터 3등까지 ‘보사공신’ 칭호가 내려졌다. 이 회맹축은 숙종 연간 보사공신 책봉에 이르기까지 공신으로 녹훈(錄勳), 삭훈(削勳), 복훈(復勳)이 반복된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물 자료이다.

또한 이 회맹축은 17세기 후반 숙종 대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을 거치면서 서인남인의 정쟁으로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수습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당시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사료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

3. 내용 구성

이 문서는 크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 회맹문(會盟文): 1680년 경신환국 당시 열린 회맹제에서 사용된 회맹문이 기록되어 있다. 이 회맹은 개국공신부터 보사공신에 이르기까지 역대 20종의 공신들과 그 자손들이 숙종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자리였다.
* 회맹록(會盟錄): 회맹에 참여해야 할 대상자들의 명단이다. 보사공신을 포함한 역대 공신들과 그 후손 총 489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 불참자 명단: 회맹제에 참석한 인원은 412명이었으며, 불참한 77명의 명단과 그 사유가 기록되어 있다. 불참 사유는 신병身病(질병), 재상在喪(상중), 발병廢病(중병), 연유年幼(나이가 어림), 변장재외邊將在外(국경 수비 등 외지 근무), 피적被謫(귀양) 등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명단 끝에는 ‘康熙十九年 八月日’ (1680년 8월)이라고 적혀 있다.
* 축문(祝文) 및 제문(祭文): 종묘에 올리는 축문과 제문이 포함되어 있다.
* 복훈시고종묘제축문(復勳時告宗廟祭祝文): 1694년 6월 20일, 기사환국 때 삭훈되었던 공신들의 복훈을 종묘에 고하는 제례 때 사용된 축문이다.
* 제작 사유 및 연대: 문서의 말미에는 이 회맹축을 제작한 이유와 제작 연대(‘康熙三十三年十月日’, 즉 1694년 10월)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왼쪽에는 가는 글씨로 ‘己巳罷勳甲戌復勳’(기사환국 때 공신 자격을 박탈했다가 갑술환국으로 복권함)이라고 쓰여 있고, 그 위에 시명지보(施命之寶)라는 국새가 찍혀 있어 왕실 문서로서의 형식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4. 역사적, 예술적 가치

이 회맹축은 17세기 후반 숙종 대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을 거치면서 서인남인의 정쟁으로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수습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당시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 특히 숙종 연간 보사공신 책봉 과정에서 나타난 녹훈錄勳, 삭훈削勳, 복훈復勳의 복잡한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물 자료이다.

왕실이나 충훈부에서 최고의 재질을 사용하여 정성껏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교하게 쓰인 글씨, 선명한 붉은 선(주사란), 고급 재질, 그리고 거대한 크기 등 모든 면에서 조선 후기 기록 문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또한, 현재까지 전해지는 완전한 형태의 어람용(왕이 보는 용도) 회맹축이 매우 드물다는 점에서 희소 가치가 크다. 조선 시대에는 공신 회맹제가 있을 때마다 어람용 회맹축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이나, 문헌상 확인되는 것은 1646년(인조 24년), 1694년(숙종 20년), 1728년(영조 4년)의 세 건뿐이다. 이 중 영조 때의 것은 실물이 전해지지 않고, 인조 때 제작된 〈이십공신회맹축 - 영국공신녹훈후〉는 국새가 찍혀 있지 않다. 따라서 왕이 직접 보던 것이면서 형식과 내용이 완전하게 전해지는 회맹축은 이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가 유일하다.

이처럼 높은 역사적, 학술적 가치와 더불어, 다른 왕실 유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로 제작되어 조선 후기 왕실 공예품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뛰어난 예술성까지 인정받아 2021년 2월 국보로 지정되었다.

5. 현존하는 회맹축

조선 시대에는 공신회맹제가 있을 때마다 임금이 볼 목적(어람용)으로 회맹축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910년까지 문헌 기록을 통해 전래가 확인된 회맹축은 아래의 3건에 불과하다.

* 1646년(인조 24년) 제작: 〈이십공신회맹축 - 영국공신녹훈후〉가 존재하지만, 이 회맹축에는 국새가 날인되어 있지 않아 완전한 형태라고 보기는 어렵다.
* 1694년(숙종 20년) 제작: 〈이십공신회맹축 - 보사공신녹훈후〉는 이 문서에서 다루는 회맹축이다. 임금이 직접 열람하는 어람용으로 제작되었으며, 형식과 내용 면에서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유일한 사례이다.
* 1728년(영조 4년) 분무공신 녹훈 때 제작: 문헌상으로는 존재가 확인되나, 회맹축의 실물은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 알려진 회맹축 중 임금이 직접 열람하는 어람용이자 형식과 내용 모두 완전하게 전해지는 것은 1694년에 제작된 〈이십공신회맹축 - 보사공신녹훈후〉가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