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근 (19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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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영근(1919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이후 정치인으로, 대한민국 농림부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청주 출신으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에 참여하여 퇴학당한 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다. 농지 개혁에 관여했으나, 조봉암과의 정치적 행보로 인해 망명하여 일본에서 민족 통일 운동을 펼쳤다. 그는 재일 한국인 사회에서 평화 통일 운동을 주도하고, 조선신문을 창간하여 여론을 주도했으며, 통일학원을 설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90년 사망 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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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1919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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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글 | 이영근 |
한자 | 李榮根 |
가타카나 | 이 요우구은 |
참고자료 | |
기타 | |
출처 필요 | 필요 |
토막글 | 한국 근현대사 |
2.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 다락리 출신으로, 청주 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일본 제품 불매 운동에 관여하여 퇴학당했다. 이후 경복 고등보통학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는 기계상을 하면서 여운형, 송진우 등 좌우 독립 운동가와 교류했다. 1943년 여름 회사를 해산하고 독립 운동에 전념, 만주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1]。 카이로 선언 발표부터 태평양 전쟁 종결을 예상하고 여운형이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결성하자 이에 참여하였다[1]。
여운형이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결성하자 이에 참여, 1945년 8월 광복 후에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성립된 후에는 보안대를 조직하여 치안 유지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좌우합작을 추진하여 통일된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했지만, 좌우 대립이 격화되고 남북 분열의 공산이 강해지자 대한민국 체제 하에서의 진보 세력으로서의 입장으로 전환했다.[1]
일본 망명 후, 이영근은 4·19 혁명 이후 진보적 성향의 신문으로 창간된 민족일보 창간을 지원하고, 진보당 사건으로 처형된 조봉암과 민족일보 발행인 조용수의 사면 운동을 전개했다.[1] 그는 재일 한국·조선인 사회의 평화 통일을 위해 조선통일문제 연구소를 주재하며,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중재 역할을 수행했다.[1] 그러나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 이후 김일성·김정일 세습 체제가 굳어지면서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명확히 했다.[1]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 이후 김일성, 김정일 세습 체제가 굳어지면서 이영근은 북한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1]
3. 해방 이후 정치 활동
대한민국 성립 후 초대 농림부 장관이 된 조봉암의 요청으로 농림부 비서실장이 되어 농지 개혁 실시에 관여했다. 이승만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조봉암이 장관을 사임한 후, 이영근도 행동을 함께하여 야당에서 정치 활동을 지속했다. 1951년 국회 부의장인 조봉암과 함께 반 이승만 신당 운동을 전개했다. 그해 말 대남 스파이 사건으로 체포·투옥되었지만, 최종적으로 무죄가 되었지만, 1956년에 겨우 출옥했다.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수뇌부가 체포·처형되었기 때문에, 이영근은 4월에 밀출국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1]
4. 일본 망명과 통일 운동
1959년, 이영근은 원심창과 함께 조선신문(현 통일신문)을 창간하여 재일 한국인 사회의 여론을 주도했다.[1] 1965년 7월에는 '민족자주통일동맹 일본 본부'를 결성하고 대표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66년에는 4·19 혁명 6주년을 기념하여 도쿄에 통일 운동 간부 양성 기관인 통일학원을 설치했다.[1] 1979년에는 주일 공사 최세현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책임 내각제로의 개헌을 제안하기도 했다.[1]
5. 비판적 관점
5. 1. 북한 체제 비판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이 일어나 김일성, 김정일 세습 체제가 굳어지자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명확히 했다.[1]
6. 사망
1990년 도쿄에서 사망했으며, 사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1]
7. 평가
이영근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민주화, 통일 운동에 헌신한 인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의 활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7. 1. 긍정적 평가
이영근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품 불매 운동에 참여하였고, 여운형, 송진우 등 좌우 독립 운동가와 교류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1] 카이로 선언 발표 이후 여운형이 비밀리에 결성한 건국동맹에 참여하였고, 광복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보안대를 조직하여 치안 유지에 힘썼다.[1]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초대 농림부 장관 조봉암의 비서실장으로서 농지 개혁 실시에 기여했다.[1] 이승만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조봉암이 장관직을 사임한 후에도 야당에서 정치 활동을 계속했으며, 1951년에는 국회 부의장 조봉암과 함께 반 이승만 신당 운동을 전개했다.[1]
진보당 사건으로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수뇌부가 체포, 처형되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조선통일문제 연구소를 통해 재일 한국인, 조선인 사회에서 평화 통일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1]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중재 역할을 하기도 했다.[1] 1965년에는 '민족자주통일동맹 일본 본부'를 결성하고 대표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66년에는 통일 운동 간부 양성 기관인 통일학원을 도쿄에 설치했다.[1]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사망 후에는 일등 무궁화장(국민훈장)이 추서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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