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건국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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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 후, 여운형이 주도하여 결성된 단체이다. 일제로부터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받은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모체로 건준을 발족시켰으며, 안재홍이 부위원장을 맡았다. 건준은 전국적 지부 조직을 통해 치안 유지와 행정 업무를 수행하며, 일제 타도와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다. 9월 6일에는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하며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으나, 미군정의 수립으로 인해 해체되었다. 건준은 해방 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치안 유지에 기여했으나, 좌경화와 미군정의 불인정이라는 한계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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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건국준비위원회 - 여운형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독립운동 단체 활동, 임시정부 참여,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노력으로 알려졌으나 해방 후 암살당했고 그의 삶과 죽음은 친일 논란과 암살 배후에 대한 논쟁을 낳고 있다.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 조만식
조만식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의 민족주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로, 간디의 비폭력 저항 사상에 영향을 받아 실력 양성 운동에 참여하고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했으나, 한국 전쟁 중 처형되었다. - 건국동맹 - 여운형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독립운동 단체 활동, 임시정부 참여,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노력으로 알려졌으나 해방 후 암살당했고 그의 삶과 죽음은 친일 논란과 암살 배후에 대한 논쟁을 낳고 있다. - 건국동맹 - 조동호
조동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으로, 여운형과 함께 중국 망명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귀국 후 동아일보 논설위원, 조선공산당 설립 참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 등을 역임하며 민족 자주와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 1945년 한국 - 광복절
광복절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기념하는 날로서, 대한민국에서는 1945년 8월 15일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여 국경일 및 공휴일로 지정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국해방의 날로 기념한다. - 1945년 한국 - 창씨개명
창씨개명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내선일체를 명분으로 조선인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한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천황 중심의 국가 체계에 통합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한글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
한자 | 朝鮮建國準備委員會 |
가타카나 | チョソンコングッチュンビウィウォヌェ |
히라가나 | ちょうせんけんこくじゅんびいいんかい |
로마자 표기법 | Joseon Geonguk Junbi Wiwonhoe |
조직 | |
명칭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
활동 | |
주요 활동 | 건국 준비 |
관련 사건 | 미군정 |
관련 단체 | 인민위원회 |
기타 | |
![]() |
2. 결성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조선은 해방을 맞았지만, 소비에트 연방이 청진시에서 일본 제국과 전투를 계속하면서 일본인들의 안전 귀국 문제가 대두되었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는 민족주의 계열인 송진우에게 치안권과 행정권 이양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엔도 류사쿠는 서울 필동에서 여운형과 만나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하고 일본인의 안전 귀국을 보장받고자 했다. 여운형은 다음 조건을 제시하며 이를 수락했다.
건준의 주요 강령은 일제 타도와 민주주의 국가 건설이었다. 건준은 온건 우파와 온건 좌파 세력의 결집체로서, 해방 이후 혼란스러운 치안 상태와 행정 공백을 해소하고자 치안대와 행정 업무, 식량 확보에 주력했다. 전국적인 지부를 조직하고 자주적인 질서 유지 활동을 전개했으며, 광복 이후 최초의 정치 단체이자 한국 현대사 최초로 지방자치를 시행한 조직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7][8]
# 전국 정치범, 경제범 즉시 석방.
# 3개월간 식량 확보.
# 치안 유지 및 건국 운동 정치 활동에 간섭하지 말 것.
# 학생 및 청년 훈련 조직에 간섭하지 말 것.
# 노동자 및 농민 조직 동원에 간섭하지 말 것.
여운형이 총독부와 교섭한 이유는 일본군 철수 전 조선인 학살, 해방 직후 친일파 처단을 명목으로 한 사적 보복 등의 혼란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4] 총독부는 여운형의 조건을 수락했고, 여운형은 1944년 8월에 결성했던 지하 비밀 독립운동 단체 건국동맹을 모체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시켰다. 건준 위원장은 여운형, 부위원장은 안재홍이 맡았으며, 건준의 명칭은 안재홍이 제안했다. 건준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정치범(독립운동가)들을 석방하여 건준에 편입시켰고, 발족 이틀 만에 체계적인 조직망을 갖추며 확대 개편되었다.[5]
건준의 주요 강령은 '''일제 타도와 민주주의 국가 건설'''이었다. 건준은 온건 우파와 온건 좌파 세력들이 결집하여 결성되었으며, 해방 이후 혼란스러웠던 치안 상태와 행정, 실무 등을 해결하고자 치안대와 행정 업무, 식량 확보에 주력하였다. 이후 전국적 지부를 조직하여 자주적 질서 유지 활동을 순조롭게 진행하였다. 건준은 광복 이후 '''최초의 정치단체'''이자 '''한국 현대사 최초로 지방자치를 시행한 조직'''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8월 말까지 민중들의 지지와 호응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140여 개의 지부가 설립되었다.[7][8]
북한 지역에서는 조만식이 건국 사업을 주도했다. 조만식은 평양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도 비폭력적, 비타협적 노선을 견지한 민족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여운형과 조만식은 남북의 서로 다른 지역 조건에서 동시에 건국 사업에 착수했다.[9][10]
이 조직 단체는 공산주의자나 민족주의자 중 어느 쪽이 주도하는가에 따라 지역별로 명칭이나 구성에 차이가 있었지만, 새로운 국가 건설의 기초를 마련한다는 목표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벌여왔던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중심이 된 '민중의 자치 조직'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11]
3. 강령
건준의 주요 강령은 '''일제타도와 민주주의 국가건설'''이었다.
4. 전개
8월 말까지 민중들의 지지와 호응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140여 개의 지부가 설립되었다. 북한 지역에서는 조만식이 건국 사업을 주도했으며, 남한의 여운형과 함께 새로운 국가 건설의 기초를 마련했다.[9][10] 건준은 지역에 따라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 중 어느 쪽이 주도하는가에 따라 명칭과 구성에 차이가 있었지만, 민중의 자치 조직이라는 공통된 특징을 가졌다.[11]
여운형은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건준에 사회주의 계열을 더 적극적으로 참여시켰고, 박헌영을 영입하기 위해 노력했다.[12] 김무용에 따르면, 여운형은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하면 사태가 달라질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고, 건준 참여 세력들은 사회주의 계열을 참여시켜 소련군의 남한 진주에 대응하는 국가 건설을 준비하고자 했다.[13] 그러나 김성수, 송진우와 같은 우익 세력들은 '중경 임정 지지'를 선언하며 건준에 불참했다.
1945년 9월 4일 건준 전체회의에서 좌파 변호사 허헌이 부위원장에 선출되는 등 집행위원 개편이 이루어졌고, 박헌영의 공산당 계열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건준은 좌파 우세로 전환되었다. 9월 6일 밤, 경기여고 강당에서 약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인민공화국임시조직법'이 통과되고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수립이 선포되었다. 9월 7일 건준은 '발전적 해소'라는 명목하에 각 지역 지부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고,[14] 이후 '인공'은 박헌영을 중심으로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김무용에 따르면, 여운형은 인공 수립에 적극 관여했으며, 비상 시기에 연합국의 진주에 대비하여 "연합국과 절충할 인민총의 집결체"로서 인공이 수립되었음을 강조했다. 또한 "혁명가는 정부를 조직하고 인민의 승인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인민이 승인만 한다면 조선인민공화국과 그 정부는 그대로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여운형은 북한에서의 "소군정의 조치를 당연히 연합국의 공동방침으로 해석"하여 남한에서 "미군 역시 조선인민에게 맡길 줄로 예상"하는 낙관적 정세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제시기부터 혁명단체와 혁명가들이 중심이 되어 과도정권을 수립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정권 구상은 인공과 다르지 않았다.[15] 여운형은 인공 수립에 합의한 뒤 건준 내부의 반발에 부딪치자 조각 발표를 보류하려 했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인공 대표 대회에서 인사도 하고 인공 부주석의 지위를 거부하지도 않았다.[16] 여운형은 인공 수립 당시, 38도선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모든 것을 조선인민에게 맡길 뿐 목적이 없는 듯하였고, 이러한 소련군의 조치를 연합군의 공동 방침으로 해석하여 미군도 38도선 이남에 진주하면 조선인민에게 모든 것을 맡길 줄 예상했기 때문에 그것을 맡을 준비를 하였다고 밝혔다.[17]
9월에 미군이 한반도에 입성하면서 미군정의 직접 통치를 발표하는 '맥아더 포고령 1호'에 따라 국내에서 치안, 행정 업무를 담당했던 '건준'과 '인공'은 불인정되었고,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불인정되었다. 그 이후 38선 이남에서는 미군정기가 시작되게 된다.
4. 1. 조직 구성 (일본어 위키 번역/참고)
초기 건준은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주요 구성원은 조직부장 정백, 총무부장 최근우, 재무부장 이규갑, 선전부장 조동호, 무경부장 권태석 등이었다.[2]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당시 건준의 구성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극좌 공산당원, 비공산주의적 좌익 즉 온건한 사회주의자, 안재홍이나 이규갑과 같은 우익, 그리고 여운형을 존경하고 지지하는 인물들로 다양하게 구성되었다고 언급했다.[2]
이는 건준이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진 인물들로 구성되었음을 보여준다.
5. 건준 내부 갈등과 해체
여운형은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건준에 사회주의 계열을 더 적극적으로 참여시켰다. 여운형은 박헌영을 건준에 영입하기 위해 노력했다.[12] 김성수, 송진우 같은 국내 우익 세력들은 '중경 임정 지지'를 선언하며 건준에 불참하였다.
1945년 9월 4일 건준 전체회의에서 부위원장에 좌파 변호사 허헌을 선출하는 등 집행위원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박헌영의 공산당 계열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건준은 좌파 우세로 전환되었다. 9월 6일 경기여고 강당에서 약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인민공화국임시조직법'을 통과시키고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수립을 선포했다. 9월 7일 건준은 '발전적 해소'라는 명목 아래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고,[14] 이후 '인공'은 박헌영을 주축으로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여운형은 인공 수립에 적극 관여했으며, 소련군의 조치를 연합국의 공동 방침으로 해석하여 미군 역시 조선인에게 모든 것을 맡길 것으로 예상하는 낙관적인 정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15] 여운형은 인공 수립에 합의한 뒤 건준 내부의 반발에 부딪혔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고 인공 부주석 지위를 거부하지 않았다.[16]
그러나 9월에 미군이 한반도에 입성하면서 맥아더 포고령 1호에 따라 건준과 인공은 불인정되었고, 38선 이남에서는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6. 의의와 한계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서중석은 해방 후 건준과 같은 조직이 없었다면 큰 혼란이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충칭 임시정부를 비롯한 주요 독립운동 단체들이 해외에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동맹과 건준의 조직 및 활동이 해방 직후 안정을 가져왔고, 치안과 행정 업무를 자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18]
미국 저널리스트 에드거 스노 기자는 해방 후 조선에 2개월간 머무르면서 정세를 파악한 뒤, 미국이 건국준비위원회를 활용했다면 조선 건설이 더 신속하고 유리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19]
반면, 건준 위원장을 지냈던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1945년 9월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된 과정에 대해 '순전히 소아병적인 극렬 공산당원들이 꾸며낸 하나의 연극'이었으며, 박헌영 등 극렬 공산주의자와 손을 끊지 못하고 건준이 좌경화되어 이용당한 것이 여운형의 정치생활 중 가장 큰 실수였다고 평가했다.[20]
7. 역대 건준위 위원장
건준위 위원장에 대한 내용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문서를 참고하면 된다.
참조
[1]
웹사이트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
http://encykorea.aks[...]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2-03-04
[2]
서적
(제목 없음)
2023
[3]
서적
(제목 없음)
2023
[4]
일반
[5]
방송
KBS 인물 현대사, 여운형편
[6]
서적
안재홍: 민족애 실천했던 온건파 지식인
선인
2003
[7]
일반
[8]
서적
대한민국 50년사
[9]
서적
대한민국 50년사
들녘 출판사
[10]
일반
[11]
서적
대한민국 50년사
들녘
[12]
서적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http://www.riss.kr/s[...]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2005
[13]
서적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http://www.riss.kr/s[...]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2005
[14]
서적
8·15직후 민족국가 건설운동
역사비평사
2000
[15]
서적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http://www.riss.kr/s[...]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2005
[16]
서적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http://www.riss.kr/s[...]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2005
[17]
서적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http://www.riss.kr/s[...]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2005
[18]
방송
KBS 인물 현대사, 여운형 편
[19]
서적
에드거 스노 자서전
[20]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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