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은 1946년 설립된 재일 한국인 단체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으며, 일본 내 한국인의 권익 보호, 한일 관계 개선, 역사 인식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한다. 민단은 일본 각지에 지부를 두고 있으며, 재일 한국인의 지방 참정권 획득 운동, 한글 강좌 운영, 탈북자 지원 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 또한, 한일 관계와 관련하여 대한민국 정부와 소통하고, 북한의 핵 개발에 항의하는 시위를 진행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박열 - 박열 (영화)
    이준익 감독의 2017년 영화 "박열"은 1923년 간토 대지진 직후 박열과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의 삶을 그린 영화로, 이제훈과 최희서가 주연을 맡아 일제강점기 아나키스트 단체 '불령사'를 조직하여 히로히토 황태자 암살을 시도했던 박열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 박열 - 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성장하며 조선 독립 운동에 공감하고 흑도회 등 아나키즘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박열과 함께 체포되어 옥사한 일본의 아나키스트이다.
  • 아자부 - 아토믹 몽키
    아토믹 몽키는 일본의 성우 및 연예인 기획사로, 국내외 인지도가 높은 성우들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연예인이 소속되어 있으며, 자체 레이블 음반 발매 및 성우 양성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 아자부 - 일본경위도원점
    일본경위도원점은 일본 측량의 기준점으로, 도쿄도 미나토구에 위치하며 과거 도쿄 천문대를 기준으로 설정되었으나 간토 대지진, 세계측지계 도입, 동일본 대지진 등의 영향으로 기준이 변경되어 현재는 세계측지계를 기반으로 재측정된 값을 사용한다.
  • 재일본대한민국민단 - 김철 (1926년)
    김철은 일본 유학 중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에 참여한 후 귀국하여 자유당에 입당, 탈당 후 민주사회주의에 눈떠 통일사회당 창당을 주도하고 유신 체제 반대 운동을 전개했으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을 지내고 사회민주당을 창당하는 등 민주사회주의 운동을 이끈 대한민국의 정당인이자 김한길의 아버지이다.
  • 재일본대한민국민단 - 박열
    박열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무정부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일본에서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천황 암살을 기도하다 체포되어 '박열 사건'으로 알려졌으며, 해방 후 재일 조선인 단체 활동과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지도
기본 정보
이름재일본대한민국민단
일본어 이름在日本大韓民国民団
영어 이름Korean Residents Union in Japan
약칭민단
설립일1946년 10월 3일
유형NGO
사용 언어한국어, 일본어
본부 위치미나미아자부 1-7-32, 미나토구, 도쿄도
웹사이트민단 공식 웹사이트
민단 깃발
민단 깃발
민단 로고
민단 로고
민단 중앙본부
민단 중앙본부
한자 표기
일본어 표기 (로마자)Zai-Nihon Daikanminkoku Mindan
한국어 표기 (한글)재일본대한민국민단
한국어 표기 (로마자)Jae-Ilbon Daehanminguk Mindan
한국어 표기 (매큔-라이샤워)Chae-Ilbon Taehanmin'guk Mindan
조직
활동 지역일본 전역
회원50만 명
단장여건이
역사
설립자박열
초대 수장박열
목표
목표일본인에 의한 법적 경제적 차별 철폐
일본 지방 참정권 부여
한일 교류 촉진
기타 정보
관련 주제재일 한국인
조선
한국

2. 역사

1946년 '''재일본조선거류민단'''(在日本朝鮮居留民団|자이니혼 조선 교류 민단jpn)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9월 28일에는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在日本大韓民国居留民団|자이니혼 다이칸민코쿠 교류 민단jpn)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94년 4월 20일에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 회원 수는 약 50만 명으로 추산되며, 일본 내 법적·경제적 차별 철폐, 일본 지방 참정권 획득, 한일 교류 촉진 등을 주요 활동 목표로 삼고 있다. 민단은 산하에 금융기관과 교육기관을 보유하고 있으며, 1982년에는 민단이 출자하여 신한은행을 설립하기도 했다.

한국 전쟁(1950-1953)은 재일 한국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쳐,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민단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조총련 사이에 뚜렷한 분열을 가져왔다. 민단 회원 중 일부는 전쟁 중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자원하여 한국군에 참전하기도 했다.[1][2][3]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어 대신 일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새로운 세대의 재일 한국인들이 등장함에 따라, 민단 내에서도 일본어 사용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민단은 일본 사회로의 완전한 동화를 지지하기보다는, 재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소수자로서의 지위를 강조하는 노선을 유지했다.[3]

1994년, 기존 명칭에 포함된 '거류민'(居留民|교류민jpn)이라는 단어가 정치적으로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면서, 이 단어를 삭제하여 현재의 명칭인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을 채택하게 되었다. 공식 명칭 변경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에서는 여전히 '한국민단' 또는 단순히 '민단'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4]

2000년대에는 당시 대한민국김대중 대통령 정부의 영향으로 민단 내에서도 진보적인 움직임이 나타났다. 2006년에는 민단 내 일부 세력이 조총련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는 공동 선언을 발표했으나, 민단 내부 보수 세력의 반발로 인해 몇 주 만에 철회되기도 했다.[5]

최근 들어 재일 한국인들의 일본 국적 취득 증가로 인해 민단 회원 수는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또한, 재특회와 같은 일본 내 극우 단체로부터의 위협과 공격에 직면하기도 했다.[6][5]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단은 현재 일본 내 최대 규모의 재일 한국인 단체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회원 수는 대한민국 국적 보유자를 기준으로 집계하고 있다.[6][5]

2. 1. 설립 초기 (1946년 ~ 1950년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 도쿄에서 설립된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내에서 공산주의 노선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분리 움직임을 보였다.[3][6] 그 결과, 1946년 10월 3일 '''재일본조선거류민단'''(在日本朝鮮居留民団)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발족하였다. 초대 단장은 일제 강점기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였던 박열이 맡았다.[18] 초대 부단장은 유길명 공사 암살 사건의 실행범 중 한 명이었던 이강훈, 초대 사무총장 역시 같은 사건의 실행범 중 한 명이었던 원심창으로, 세 사람 모두 종전까지 복역했던 경력이 있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인 9월 28일, 단체는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在日本大韓民国居留民団)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한국 정부로부터 재일 동포의 유일한 공인 단체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 한국인들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1948년 10월 방일했을 때 환영을 위해 모인 박열 단장을 비롯한 3,000명의 민단 단원들과의 회견을 “암살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거부하기도 했다.[18]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민단은 대한민국을 지지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지지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와 뚜렷한 대립 관계를 형성했다. 민단은 재일학도의용군 644명을 모집하여 한국으로 파병하였다.[19] 이 시기 민단이 제작한 포스터들은 당시 한국의 상황을 반영하는 애국적이고 군사적인 색채를 띠며 재일 한국인과 고국, 그리고 민단과의 긴밀한 유대감을 보여주었다.[1][2][3] 파병된 의용군 중 일부는 한국에서 공작원 훈련을 받고 일본에 밀입국하여 북한이 주도하던 재일교포 북송 사업을 방해할 목적으로 니가타 적십자센터 폭파 미수 사건과 같은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20][21]

한국전쟁에 참전할 자원병을 모집하는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오사카 본부


설립 초기 및 이후 약 20년간 민단은 북한 정부와 연계된 조총련에 비해 재일 한국인 사회 내에서 상대적으로 인기가 적었다. 이는 당시 민단이 주로 하층민들에게는 덜 수용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3][6] 민단은 한국 정부로부터 재외국민 등록 및 여권 발급 등의 영사 업무 일부를 위탁받아 공인 단체로서의 지위를 강화했지만, 동시에 한국 정부의 간섭을 받게 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2. 2. 군사정권 시기 (1960년대 ~ 1980년대)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일, 민단 중앙단장 선거가 실시되어 권일이 당선되었다. 권일 단장은 박정희 군사정권을 가장 먼저 지지하며 "반권(반권일)은 반박(반박정희)이다. 그리고 반박은 반국가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민단은 1965년 한일 기본 조약 체결에도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다. (권일은 이후 박정희 정권 하에서 대통령 고문과 한국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러나 재일 한국인 사회 내에서는 군사정권에 대한 반대 여론도 점차 높아졌다. 1971년 민단 단장 선거에서는 민주화 세력을 대표하는 유석춘 후보와 군사정권의 지지를 받는 이희원 후보가 경쟁했다. 선거 초반에는 유석춘 후보가 우세했으나, 대한민국 중앙정보부(KCIA) 소속이었던 김재권 주일 공사가 선거에 개입하면서 결국 이희원 후보가 당선되었다. 선거 이후 유석춘 후보 지지자들은 민단에서 숙청되거나 제명되었다.

1973년, 민단에서 제명된 민주화 활동가들은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일본본부'(한민통, 후의 한통련)를 결성하고자 했다.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김대중을 의장으로 추대할 예정이었으나, 한민통 결성을 불과 일주일 앞둔 8월 8일에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민단은 군사정권에 대한 지지 입장을 유지했다. 사카모토 사건 이후에도 민단은 군정 정권을 지지하였다.

2. 3. 민주화 이후 (1990년대 ~ 현재)

1994년 4월, 기존 명칭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해진 '거류'라는 단어를 제외하고 재일본대한민국민단으로 정식 명칭을 변경하였다.[4][26] 이와 함께 대한민국 국적을 유지하면서 특별영주자 및 영주허가 제도를 통해 일본에서의 영주권을 확보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설정하였다.[26]

대한민국민주화 이후, 김대중 정부는 과거의 활동 경위와 관계없이 민단을 재일 한국인 사회의 공식적인 대표 단체로 인정하였다.[22] 반면, 후임 노무현 정부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방일 당시 TBS텔레비전 특별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재일 한국인 고등학생에게 "현지 문화와 체제에 적응하여 그 사회에 기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하였다.[22] 같은 해, 대한민국 정부는 과거 민단과 대립 관계에 있던 전 한민통(韓民統) 활동가들의 대한민국 방문 및 자유로운 왕래를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다.[22] 한편, 민단은 2003년 6월 탈북자 지원 민단 센터를 설립하여 탈북자들에게 정착을 위한 일시금 지급, 주거 및 취업 알선 등의 지원 활동을 시작하였다.[26]

2000년대에 들어 민단 내부에서는 몇 가지 문제와 비판이 제기되었다. 1997년 아시아 외환 위기 당시 대한민국 지원에 소극적이었다는 비판이 있었고,[23] 2000년경에는 민단 내부에서 6.5억 규모의 어음 사기 사건이 발생했으나 명확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23] 또한 2006년 대한민국 정부 감사에서는 정부 보조금 관련 허위 보고 문제가 드러났으며, 이를 계기로 민단 운영의 폐쇄성, 본국에 대한 의존성 심화, 과도한 정치 지향성, 내부 갈등 조정 능력 부족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하였다.[24][25]

조선총련과의 관계에서는 변화와 갈등이 공존했다. 2006년 민단 내 일부 세력이 조선총련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공동 선언을 발표했으나, 내부 보수 세력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몇 주 만에 철회되었다.[5] 같은 해, 조선총련 산하 조선학교 교원 출신인 하병욱(河丙鈺)이 단장으로 선출되었으나,[27] 탈북자 지원 민단 센터 폐지 및 조선총련 추종자의 한국 참배 중단을 조건으로 조선총련과의 우호 공동 선언을 발표한 사건(일명 '5.17 사태')[28] 등 여러 논란으로 인해 취임 몇 달 만에 사임하였다.[27][28]

민단은 재일 한국인의 일본 내 외국인 참정권 획득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2009년 중의원 선거를 외국인 참정권 실현의 중요한 계기로 보고, 참정권 부여를 약속한 민주당 후보들을 조직적으로 지원하였다.[30][31][32][33][34] 동시에 파칭코 산업 보호를 민주당 측에 요청하기도 했다.[30]

2009년에는 출입국관리 및 난민인정법 개정안(외국인 체류 관리 제도 법안) 심의 과정에서 재일 한국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여건이(呂健二) 부단장 등 대표단을 공명당 법무부회에 파견하여 항의 의사를 전달했다.[29] 2012년 단장 선거에서는 오공태(呉公太)가 당선되었다.

최근 민단은 재일 한국인들의 일본 국적 취득 증가로 인해 회원 수가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6][5] 재특회와 같은 일본 내 극우 단체의 위협과 공격에 직면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교토 민단 지부가 재특회 시위대의 행사 방해 위협으로 인해 예정되었던 강연을 취소하는 사건도 발생했다.[6]

현재 민단은 본부와 각 지부에서 한글 강좌를 운영하고 있으며, 한류의 영향으로 일본인 수강 희망자가 늘어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연간 약 80억의 자금을 지원받고 있으나,[13] 자금 운영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한국 정부는 민단에 대해 일본 법인으로 등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13]

3. 주요 활동

민단일본재일 한국인의 권익을 보호하고 지위를 향상시키며, 한일 관계 증진과 한국 문화 홍보 등을 목표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일본 47개 현 모두에 지부를 두고 있으며, 전국 250곳 이상의 거점에서 활동한다.[11]

주요 활동 목표는 다음과 같다.


  • 재일 한국인에 대한 법적·경제적 차별 철폐 및 일본 국민과의 평등 실현[5][6][7]
  • 일본 내 지방 참정권 획득[5][6][7]
  • 한일 교류 촉진 및 한국 문화 홍보[11]
  • 재일 한국인의 상호 친목 도모[11]


이를 위해 민단은 일본의 외국인 관련 제도 개선 요구, 특별영주자 자격 취득 지원, 외국인등록령 등 차별적 법규 반대 캠페인, 역사 교과서 문제 시정 요구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5][6][7][11] 특히 재일 한국인의 지방 참정권 획득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왔으며, 관련 입법을 위해 일본 정당들과 협력하고 있다.[5][6][7][15][30][31][32][33][34]

또한, 민단은 산하에 금융기관과 교육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1982년에는 민단이 출자하여 신한은행을 설립했으며,[14] 현재도 상업신용조합 등 금융기관을 보유하고 있다.[14] 일본 내에 한국인 학교를 포함한 4곳의 학교를 지원하며, 학생들에게 정규 일본 교육과 함께 한국어 교육을 제공한다.[5][6] 본부와 각 지부에서는 한글 강좌를 개설하여 재일 한국인뿐 아니라 일본인에게도 한국어를 배울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사회 공헌 활동으로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피해자들에게 식량을 지원한 사례가 있으며,[8] 2003년에는 탈북자 지원 센터를 설립하여 정착 지원 활동을 시작하기도 했다.[26] 자체적으로 '민단신문'을 발행하여 소식을 전하고 있다.[5]

대한민국 정부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재일 한국인의 여권 신청 및 호적 관련 업무를 대행하고 있다.[12] 한국 정부로부터 연간 80억 규모의 지원금을 받고 있으나, 자금 운영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한국 정부는 민단에 일본 법인 등록을 요구하고 있다.[13] 민단은 재일 한국인의 인구 변화 및 권익 문제 등에 대해 정기적으로 한국 정부와 소통하고 있다.[7][9]

3. 1. 재일 한국인의 권익 보호

민단의 주요 활동 중 하나는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 한국인의 권익을 보호하고 법적·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민단은 일본 사회 내 차별 철폐와 권리 보장을 목표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왔다.
법적·경제적 차별 철폐 및 지위 향상민단은 창립 초기부터 재일 한국인에 대한 일본 사회의 법적·경제적 차별 철폐와 일본 국민과의 불평등 해소를 중요한 활동 목표로 삼고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벌여왔다.[5][6][7] 시위, 청원, 청년 활동가 모집 등을 통해 일본 사회의 차별적인 인식과 관행에 맞서 재일 한국인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해왔다.[5][6][7]
외국인 등록 제도 관련 활동민단은 재일 한국인의 권익을 침해할 소지가 있는 외국인등록령 및 관련 법률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쳐왔다.[5][6][7] 특히, 외국인 등록 시 요구되었던 지문 날인과 같은 생체 정보 제공 의무화에 반대하며, 이를 거부하는 재일 한국인들을 지원했다.[5][6][7] 2009년 2월에는 외국인 관리 강화를 골자로 하는 출입국관리 및 난민인정법 개정안(외국인 재류 관리 제도 법안) 심의 과정에서 재일 한국인에 대한 배려 부족을 지적하며 공명당 등 정치권에 항의 의사를 전달하기도 했다.[29]
영주 자격 획득 지원민단은 재일 한국인이 안정적으로 일본 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특별영주자 자격 획득 지원을 중요하게 여긴다. 1994년 단체 명칭을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에서 '재일본대한민국민단'으로 변경한 것은, '거류'라는 임시 체류의 의미를 넘어 특별영주자 및 영주허가를 통해 한국 국적을 유지하면서 일본에 영주하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또한 일본에 새로 이주해 온 한국인들의 특별영주자 자격 취득을 돕는 활동도 전개하고 있다.[5][6][7]
지방 참정권 획득 운동민단은 재일 한국인의 일본 내 지방 참정권 획득을 위한 운동을 오랜 기간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다. 이는 재일 한국인이 거주하는 지역 사회의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 민단은 참정권 부여에 긍정적인 정당들과 협력 관계 구축에 노력했으며, 특히 민주당과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지지를 보내왔다.[5][6][7][30][31][32][33][34] 자유민주당, 공명당 등 다른 정당들과도 접촉하며 참정권 문제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15][40][41]
  •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 1996년: 재일 한국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서명 운동을 전개하여 1만 2천 명의 서명을 받았다.[35]
  • 1998년 3월: 부인회·학생회와 합동으로 도쿄 신주쿠에서 1,200명 규모의 시위 행진을 실시했다.[35]
  • 1999년 3월: 지방 참정권 입법화를 요구하는 전국 릴레이 캠페인을 개최했다.[35]
  • 2004년: 제20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 참정권 부여에 적극적인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36] 이 선거에서 민주당 비례대표로 출마한 한국계 일본인 백진훈이 당선되었고, 당선 직후 민단을 방문하여 참정권 획득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37]
  • 2007년: 제21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 민단 갈식지부(葛飾支部) 국제과장인 김정옥(金政玉)(2005년 귀화한 재일 2세)이 참정권 부여를 주장하며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38] 같은 해 11월, '영주 외국인에게 지방 참정권을! 11·7 전국 결기 대회'를 개최하고, 이후 각 정당 및 국회의원에 대한 요청 활동을 강화했다.[39] 12월에는 창가학회 회장과 회담하여 참정권 문제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40]
  • 2008년 3월: 자유민주당 소속 다나카 카즈노리(田中和徳) 의원이 민단 집회에 참석하여 지방 참정권 실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발언했다.[41]
  • 2009년: 중의원 선거를 외국인 참정권 부여를 위한 중요한 기회로 보고, 참정권을 약속한 민주당 후보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30][31][32][33][34] 당시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대표 측근은 민단의 지원이 전례 없는 규모가 될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42] 선거 후인 10월, 민단 오사카 지부는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을 초청하여 친목회를 열고 참정권 문제에 대한 논의를 이어갔다.[43]

3. 2. 한일 교류 및 문화 홍보

민단은 주요 활동의 하나로 대한민국일본 간의 교류를 촉진하고 한국 문화를 소개하며 홍보하는 데 힘쓰고 있다.[11] 여기에는 한국의 역사 인식에 기반한 한일 역사문화 교류 활동과 대외 홍보 활동이 포함된다.

민단은 일본의 역사 교육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한다. 『다민족·다문화 공생과 민족 교육의 추진에 관한 요망서』 등을 통해, 일본 내 교육 과정에서 한국의 역사적 입장을 존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일례로 민단 오사카 지부는 오사카 시내 여러 유적지(예: 백제계 도래인 행기(行基) 관련 유적, 조선통신사 숙박지였던 절터 등) 안내판에 백제, 신라,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명시하고 한국어를 병기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49]

또한, 민단 본부와 각 지부에서는 한글 강좌를 개설하여 운영한다. 이 강좌는 재일 한국·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도 수강할 수 있으며, 일본 내 한류 붐이 일었을 때는 수강 희망자가 늘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2007년 미국 하원에서 "일본 정부는 위안부 강제 연행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는 내용의 미국 하원 121호 결의안이 통과된 것을 계기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유럽, 아시아 등 다른 국가들에서도 유사한 결의안 채택 운동을 촉구했으며, 여러 나라에서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결의안이 채택되는 성과를 거두었다.[44] 민단은 '위안부'를 '종군위안부'로 명칭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행정 기관에 항의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45] 위안부 피해자로 여겨지는 고령 여성을[46] 일본 총리 관저로 초청하여 총리의 직접적인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47] 다만, 2016년 12월 부산의 일본 영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이 설치되었을 때는, 당시 단장이었던 오공태가 "철거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재일 동포의 공통된 간절한 마음"이라며 위안부 문제 한일 합의의 이행을 촉구하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48]

영토 및 명칭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의 입장을 지지한다.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서는 홈페이지 등에서 일관되게 '독도'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대한민국 정부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동해 명칭 문제에 대해서도, 돗토리현 코토우라정에 세워진 '한국인 구출 기념비'에 '동해' 병기를 요구하는 등, '일본해' 단독 표기에 반대하며 한국 정부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63]

3. 3. 기타 활동

2003년 6월, 탈북자 지원 민단 센터를 설립하여 일시금 지급, 주거 및 취업 지원 활동을 시작했다.[26] 그러나 2006년 조선총련 산하 조선학교 교원 출신인 하병욱(河丙鈺)이 단장으로 선출된 후,[27] 탈북자 지원 민단 센터 폐지 등을 포함한 조선총련과의 우호 공동 선언(5.17 사태)을 발표했으나,[28] 여러 논란 끝에 몇 달 만에 사임했다. 후임 정진신 단장은 조선총련과의 화해는 잘못이었다고 평가하며, 탈북자 지원과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였다.[65]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발생 당시에는 피해자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등 구호 활동을 펼쳤다.[8]

일본 내 역사 왜곡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특히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역사 교과서가 일본 중학교에서 채택되는 것에 대해 "한일 관계의 열기를 얼어붙게 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52] 스기나미구에서 해당 교과서 채택이 추진되자, 당시 구청장인 야마다 히로시에게 전국 민단 지부에서 항의 서한과 팩스를 대량으로 보냈으며,[53][54] 구의회 채택 당시에는 방청석에서 "그런 교과서를 용납할 수 있느냐", "부끄러운 줄 알아라", "꺼져라" 등의 항의를 표출하고 구청장실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53][54] 이에 대해 야마다 구청장은 "상식을 벗어난 항의 활동"이라고 언급했다.[54] 2010년 8월에는 해당 교과서를 채택한 도치기현 오타와라시에 "바람직한 역사 교과서 채택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제출했다.[55]

파칭코 산업과 관련해서도 활동하고 있다. 민단 산하 재일한국상공회의소 소속 기업 중 상당수가 파칭코 관련 업체라는 지적이 있으며,[56] 일본 정부가 조선총련의 경제 활동 차단을 명분으로 민단 소속 재일 한국인이 경영하는 파칭코 업소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자, 경영자들의 위기감이 커지기도 했다. 이는 한때 추진되었던 조선총련과의 화해를 철회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민단과 재일한국상공회의소는 공동으로 “레저산업 건전화 추진협회”를 설립하고, 오자와 이치로 등 정치인에게 파칭코 업계 규제 완화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다.[57]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서는, 홈페이지 등에서 일관되게 "독도"라고 명칭하며, 독도는 한국 영토라는 한국 정부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또한 동해 명칭 문제와 관련해서도 돗토리현 코토우라정의 ‘한국인 구출 기념비’에 "동해" 병기를 요구하는 등, "일본해" 단독 표기에 반대하며 한국 정부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63]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2006년 5월 17일, 당시 민단 단장 하병욱과 조선총련 의장 서만술이 회담을 갖고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화해를 시도했으나, 북한 인권 문제 등을 이유로 민단 내부의 반발에 부딪혔다.[64] 이후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이 강행되자 민단은 한 달여 만에 화해 방침을 철회했고, 하병욱 단장은 사임했다. 2009년 북한의 비행체 발사에 대해서는 “민족의 명예를 훼손하는 만행”이라는 항의 성명을 발표했으며,[66] 2016년에는 반복되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항의하며 도쿄, 나고야 등 주요 도시에서 시위를 열고 핵 개발 중단, 미사일 발사 중지, 납치 피해자 석방 등을 요구했다.[67]

4. 조직

1946년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9월 28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94년 4월 20일에는 현재의 '''재일본대한민국민단'''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주요 활동 내용은 재일 한국인( 在日韓国人|자이니치 간코쿠진일본어 )의 상호 친목 도모, 한국 문화( 韓国文化|간코쿠 분카일본어 ) 소개 등 홍보 활동, 일본 내 재일 한국인의 지위 향상(일본 내 참정권( 日本における外国人参政権|니혼니오케루 가이코쿠진 산세이켄일본어 ) 요구, 역사 교과서 문제( 歴史教科書問題|레키시 교카쇼 몬다이일본어 ) 내용 시정 요구 등) 등이다.[11] 회원 수는 약 30만 명이며, 일본 등으로 귀화하여 한국 국적을 상실한 사람도 회원이 될 수 있다.[12] 한국 국적 여권( パスポート|파스포토일본어 ) 신청, 한국 호적( 戸籍|고세키일본어 ) 처리 등 대한민국 관련 업무를 대행하기도 한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연간 80억의 지원을 받고 있다.[13]

민단은 산하에 금융기관 및 교육기관을 보유하고 있으며,[14] 1982년에는 민단이 출자하여 신한은행을 설립하기도 했다.

냉전 시대에는 반공주의( 反共主義|한쿄슈기일본어 )를 내세우며 일본의 자유민주당( 自由民主党|지유민슈토일본어 ), 공명당( 公明党|고메이토일본어 ), 민사당( 民社党|민샤토일본어 )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현재는 이들 정당 외에도 입헌민주당( 立憲民主党|릿켄민슈토일본어 ), 일본유신회( 日本維新の会|닛폰 이신노 카이일본어 ), 사회민주당( 社民党|샤민토일본어 ), 일본공산당( 日本共産党|니혼 교산토일본어 )과도 우호 관계를 맺고 있다.[15]

4. 1. 중앙본부

중앙본부는 도쿄도 미나토구 미나미아자부 1-7-32에 위치한다. 중앙본부에는 중앙집행위원회와 중앙상임위원회가 있으며, 사무총장은 기획조정실을 관할한다.

  • 총무국
  • 조직국
  • 생활국
  • 문교국
  • 민단신문
  • 본국사무소

4. 2. 지방본부

각 도도부현에 하나씩 지방본부가 있다.[68]

4. 3. 역대 중앙 단장

wikitext

대수이름한자표기취임퇴임비고
1~5대박열朴烈1946년 10월 3일1949년 4월 1일
6대정한경鄭翰景1949년 4월 1일1949년 6월 9일
7, 8대조규훈1949년 6월 9일1950년 3월 25일
9, 10대김재화金在華1950년 3월 25일1951년 4월 3일
11대원심창元心昌1951년 4월 3일1952년 4월 3일
12대원심창
김현
김재화
元心昌
金光男
金在華
1952년 4월 3일1952년 10월 4일단장단 체제
13~16대김재화金在華1952년 10월 4일1955년 4월 13일
17~19대정찬진1955년 4월 13일1958년 4월 26일
20~21대김재화金在華1958년 4월 26일1959년 7월 14일
22~23대정인석鄭寅錫1959년 7월 14일1960년 7월 25일
24대조영주1960년 7월 25일1961년 5월 15일
25~26대권일1961년 5월 15일1963년 5월 25일
27대김금석金今石1963년 5월 25일1964년 7월 12일
28~29대권일1964년 7월 12일1967년 6월 13일
30대이유천1967년 6월 13일1969년 3월 26일
31~32대이희원1969년 3월 26일1972년 8월 8일
윤달용尹達鏞단장 대리
33대김정주1972년 8월 8일1974년 3월 24일
34대윤달용尹達鏞1974년 3월 24일1976년 3월 31일
35대조영주1976년 3월 31일1979년 3월 28일
36, 37대장총명1979년 3월 28일1985년 3월 18일
38, 39대박병헌1985년 3월 18일1991년 3월 24일
40대정해룡1991년 3월 24일1994년 4월 20일[69]
41, 42대신용상1994년 4월 20일2000년 3월
43, 44대김재숙2000년 3월2006년 2월
45대하병옥2006년 2월2006년 9월
46, 47대정진2006년 9월2012년 2월
48, 49대오공태2012년 2월2018년 2월재일동포 2세 출신 첫 단장
50대여건이呂健二2018년 3월현재


4. 4. 현직 간부 (2019년 9월 30일 기준)

2019년 9월 30일 현재 기준 간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
단장여건이(呂健二)
부단장박안순(朴安淳)
김소부(金昭夫)
임삼호(林三鎬)
오영의(呉英義)
의장박안순(朴安淳)
부의장양동일(梁東一)
이수부(李秀夫)
감찰위원장양동일(梁東一)
감찰위원김풍성(金豊成)
김춘식(金春植)
사무총장하정남(河政男)


5. 관련 단체

1982년에는 민단에서 출자하여 신한은행을 설립했다. 민단은 재일한국인의 취업 지원이나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재정 지원 등의 목표 달성을 위해 재일본대한민국 청년회 및 재일본한국상공회의소와 같은 다른 재일한국인 단체들과 협력해 왔다.[7]

민단 산하 및 관련 단체는 다음과 같다.


  • 재일본대한민국 부인회
  •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
  • 재일대한 체육회
  • 재일본한국상공회의소
  • 재일본대한민국 청년회
  • 재일본대한민국 학생회
  • 재일한국 과학기술자협회
  • 재일한국인 법조포럼
  • 재일한국인견습생자원봉사자동지회
  • 재일본한국신용협동조합
  • 재일본한국문화예술협회
  • 재일본한국의사회
  • 재일본한국학교연맹
  • 민단 생활안내센터
  • 민단 탈북자 지원센터
  • 재일한국인역사박물관
  • 한국학교
  • * 백두학원 교육재단
  • ** 경욱유치원
  • ** 경욱초등학교
  • ** 경욱국민학교
  • ** 경욱고등학교
  • * 오사카 금강국제초중고등학교
  • * 도쿄한국학교
  • * 교토국제중고등학교

6. 교육기관

민단은 산하 교육기관을 보유 및 지원하고 있다.[14] 민단이 지원하는 학교는 일본 각지에 분포하며, 과거에 비해 그 수가 줄어들었다.[5][6] 이들 학교는 학생들에게 정규 일본 교육과 함께 한국어 교육을 제공하여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함양하는 데 중점을 둔다.[5][6]

주요 학교 목록은 다음과 같다.

학교명소재지비고
도쿄한국학교도쿄도
건국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오사카시백두학원 산하
오사카금강인터내셔널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오사카시
교토국제중학교·고등학교교토시
나고야한국학교나고야시정시제


참조

[1] 백과사전 Mindan http://rekishi.jkn21[...] Shogakukan 2012-08-05
[2] 백과사전 Issues of Zainichi Koreans http://rekishi.jkn21[...] Shogakukan 2012-08-05
[3] 학술지 Visualization of an Imagined Landscape through Posters: Figurative Elements of Mindan Posters https://acdht.com/do[...] 2022
[4] 백과사전 Mindan http://rekishi.jkn21[...] Shogakukan 2012-08-05
[5] 웹사이트 Responding to Hate in Contemporary Japan: Fragmenting Factors Obstructing Effective Ethnic Advocacy https://academic.oup[...] 2024-03-26
[6] 웹사이트 The Future of Zainichi Korean Socio-Political Organizations in Japan https://honors.libra[...] 2014
[7] 학술지 South Korean Diaspora in Japan: Suffrage and COVID-19 Issues https://www.research[...] 2022
[8] 뉴스 http://www.yonhapnew[...] 2011-04-07
[9] 뉴스 Mindan Leader Hopes for Removal of Girl Statue Before Japan's Consulate https://en.yna.co.kr[...] 2024-04-07
[10] 뉴스 韓国民団が提言「慰安婦像は撤去すべき」「安倍首相が元慰安婦に謝罪するのもいい」 https://biz-journal.[...] 2017-06-05
[11] 웹사이트 ■民団の組織 https://www.mindan.o[...] 在日本大韓民国国民団 2023-03-10
[12] 기타
[13] 뉴스 民団が日本法人化の検討に着手 懸念の声も http://www.chosunonl[...] 2014-12-21
[14] 웹사이트 民団紹介 https://www.mindan.o[...] 在日本大韓民国民団 2021-02-22
[15] 웹사이트 民団「光復節」記念式 田村副委員長が祝辞 https://www.jcp.or.j[...] 일본공산당 2023-09-17
[16] 웹사이트 民団と総連、合同でブライダル会(02.11.27) http://www.mindan.or[...] 在日本大韓民国民団 2002-11-27
[17] 웹사이트 「同胞社会団結のため協力」・・・民団・朝鮮総連が会談 https://japanese.joi[...] 중앙일보 2006-05-17
[18] 서적 在日義勇兵帰還せず 朝鮮戦争秘史 이와나미 쇼텐 2007-01
[19] 웹사이트 민단의 연혁과 역사 http://www.mindan-ky[...] 재일본대한민국민단 교토지부
[20] 서적 在日義勇兵帰還せず 朝鮮戦争秘史 이와나미 쇼텐 2007-01
[21] 뉴스 闇の部隊「北送阻止隊」 (2009/9/26 放送) http://www.tbs.co.jp[...] 2009-09-26
[22] 서적 韓国・盧武鉉大統領 本音で直接対話 도쿄 방송 2003
[23] 뉴스 <在日社会>◆在日商工人列伝◆パチンコ業界の最大手・韓昌祐 マルハン会長 http://www.toyo-keiz[...] 2004-04-23
[24] 뉴스 <在日社会>政府補助金めぐる民団虚偽報告問題 <離任辞>羅鍾一・駐日本国大韓民国特命全権大使 http://www.toyo-keiz[...] 2007-03-16
[25] 뉴스 <在日社会>在日韓国民団・虚偽報告問題を討議 http://www.toyo-keiz[...] 2007-02-02
[26] 기타
[27] 웹사이트 「『民団』団長就任後に続く異常事態発生の不可解 河丙鈺氏はいったい何者か?」 https://yoshiko-saku[...] 사쿠라이 요시코 2006-07-08
[28] 웹사이트 https://yoshiko-saku[...]
[29] 뉴스 민단신문 2009-02-18
[30] 뉴스 在日民団「外国人参政権に賛成の候補を支援」 https://www.donga.co[...] 동아일보 2021-04-30
[31] 뉴스 민단, 민주·공명 지원へ 차기 중원선 선거권 부여 메자스 https://megalodon.jp[...] 아사히 신문 2008-12-12
[32] 뉴스 총선거へ 겐마와시착착 민주, 공명도 「부여」 강조 http://www.mindan.or[...] 민단신문 2008-11-27
[33] 뉴스 <전국단장회의>참정권 찬동 후보를 철저 지원 http://www.mindan.or[...] 민단신문 2009-04-29
[34] 뉴스 「참정권」획득へ 우리는 이렇게 움직인다 http://www.mindan.or[...] 민단신문 2009-08-15
[35] 뉴스 지방참정권 어필 전국 릴레이 청년회, 전국 6도시에서 단단히 손에 잡히는 성과 http://www.mindan.or[...] 1999-04-28
[36] 뉴스 2004年6月30日民団新聞 https://megalodon.jp[...] 민단新聞 2004-06-30
[37] 뉴스 2004年7月14日民団新聞 https://megalodon.jp[...] 민단新聞 2004-07-14
[38] 뉴스 2007年5月16日付 民団新聞 https://megalodon.jp[...] 민단新聞 2007-05-16
[39] 뉴스 参政権小委 各地でシンポ開催 http://www.mindan.or[...] 2007-11-28
[40] 뉴스 民団中央団長が創価学会原田会長を表敬訪問、地方参政権など意見交換 http://www.mindan.or[...] 민단新聞
[41] 뉴스 <参政権>「成立へ邁進の時」 神奈川で集会 http://www.mindan.or[...] 민단新聞 2008-03-26
[42] 뉴스 民団、民主・公明支援へ 次期衆院選 選挙権付与めざす https://megalodon.jp[...] 朝日新聞 2008-12-12
[43] 뉴스 民団大阪:「民主党大阪府連 衆・参国会議員との祝賀懇親会」を盛大に開催 http://www.mindan-os[...] 2009-11-02
[44] 뉴스 <民論団論>目をそらすな「慰安婦」問題 米下院決議案採択の意味と課題 国際世論の日本政府指弾続く http://www.mindan.or[...] 在日本大韓民国民団 2007-08-29
[45] 뉴스 民団埼玉、歴史年表の「従軍慰安婦」の「従軍」削除問題で抗議 7月10日、埼玉県平和資料館 http://news.onekorea[...] 統一日報 2009-07-10
[46] 기타
[47] 뉴스 安倍首相に「慰安婦」決議文 婦人会代表団 http://www.mindan.or[...] 在日本大韓民国民団 2007-05-08
[48] 뉴스 【釜山・慰安婦像設置】民団トップが撤去求める 「私たち在日同胞の切実な思い」 https://www.sankei.c[...] 産経新聞社 2017-01-12
[49] 웹사이트 mindan http://www.mindan.or[...]
[50] 뉴스 「つくる会教科書」阻止取り組み本格化 http://www.mindan.or[...] 2005-07-06
[51] 뉴스 「歴史歪曲教科書」阻止へ緊急集会 http://www.mindan.or[...] 2009-11-18
[52] 뉴스 <Special Wide>韓日友好の熱気凍らせない(04.7.14) http://mindan.org/si[...] 2004-07-14
[53] 논문 外国人参政権が国民生活を壊す/山田宏(杉並区長) http://voiceplus-php[...] PHP研究所 2010-02-12
[54] 뉴스 交わらぬ歴史認識 内政干渉、安全保障に危機感 https://megalodon.jp[...] 2010-04-09
[55] 뉴스 <民団栃木>「つくる会」採択 大田原市の新市長表敬 http://www.mindan.or[...]
[56] 뉴스 日本政府、民団に制裁措置 http://www.chosunonl[...] 朝鮮日報 2006-06-27
[57] 뉴스 2008年4月11日グリーンベルト http://www.adcircle.[...] グリーンベルト 2008-04-11
[58] 뉴스 今日の歴史(1月7日) http://japanese.yonh[...] 2009-01-07
[59] 뉴스 「日本に対馬返還要求すべき」賛成50.6% https://japanese.joi[...] 2008-07-27
[60] 뉴스 【対馬が危ない!】日本に帰化韓国人男性 海自施設で不可解行動 https://web.archive.[...] 産経新聞社 2009-06-09
[61] 뉴스 【対馬が危ない!】陸自や公共事業にも触手 演習日程など情報収集(1/2) https://web.archive.[...] 産経新聞社 2009-06-09
[62] 뉴스 【対馬が危ない!】陸自や公共事業にも触手 演習日程など情報収集(2/2) https://web.archive.[...] 産経新聞社 2009-06-09
[63] 뉴스 日韓交流碑「削除」騒動 民団「右翼に屈した」と激怒 https://www.j-cast.c[...] J-CASTニュース 2007-06-22
[64] 뉴스 民団内部で「歴史的和解」の後遺症 http://www.chosunonl[...] 朝鮮日報
[65] 뉴스 民団新団長「朝総連との“和解”は誤り」 https://web.archive.[...] 朝鮮日報
[66] 뉴스 朝鮮総連周辺、右翼団体が機動隊員と小競り合い https://web.archive.[...] 読売新聞
[67] 웹사이트 在日韓国人、ミサイル発射で在日朝鮮人への糾弾行動先鋭化…「同等に見られては困る」 https://biz-journal.[...] ビジネスジャーナル
[68] 웹사이트 地方本部リスト https://www.mindan.o[...]
[69] 서적 민단 50년사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