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일보
1. 개요
민족일보는 1961년 2월 13일 창간된 진보 성향의 일간 신문이다. 4.19 혁명 이후 진보 세력의 언론 필요성을 느껴 창간되었으며, 창간 초기 조총련 자금 지원 의혹으로 인해 정부의 인쇄 중단 조치를 겪기도 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권에 의해 발행인 조용수 등 수뇌부가 구속되고 1961년 5월 19일 폐간되었다. 이후 조용수 사장에게 사형이 집행되었으나, 2006년 과거사위원회에서 명예를 회복하고 2008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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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대한민국 -
5·16 군사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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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창간 -
철도 팬 (잡지)
철도 팬은 이가 야스마사가 1961년 1월에 창간한 일본의 철도 잡지로, 초기에는 다양한 철도 내용을 다루었으나 점차 철도 사진, 신차 소개, 운행 정보 등으로 특화되었으며, 많은 페이지 수와 부록, 전자판 백 넘버 제공이 특징이다. -
1961년 창간 -
머지 비트
《머지 비트》는 1961년 빌 해리가 창간한 리버풀의 로큰롤 잡지이며, 비틀즈를 포함한 지역 밴드들을 소개하고 인기를 얻었으나, 1964년 《뮤직 에코》와 합병되어 이름이 사라졌다. -
혁명재판 기결수 -
송지영
송지영은 남경중앙대학 출신으로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한국번역가협회 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고문 등을 역임하며 언론 및 문화계에서 활동했고,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 국토통일원 고문,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 제11대 국회의원, 한국방송공사 이사장 등을 지냈다. -
혁명재판 기결수 -
최인규 (1919년)
최인규는 연희전문학교와 뉴욕대학교를 졸업 후 대한교역공사와 한국무역진흥주식회사에서 근무하다 자유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제4대 국회의원, 교통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나, 3·15 부정선거의 총책임자로 지목되어 4·19 혁명 이후 구속, 5·16 군사정변 이후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2. 창간 배경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고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제5대 총선에서 사회대중당을 창당한 진보 세력은 참패하고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이에 진보 성향의 언론인들은 진보 정당의 재건과 대북 강경책 비판을 위한 언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민족일보 창간을 추진하였다.
2.1. 자금 조달 및 창간
조용수, 양호민 등의 진보성향 언론인들은 진보정당의 재건 및 대북강경책의 허구를 국민들에게 알리는 언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망명정객 이영근을 통해 민단으로부터 자금을 조달받아 1961년 2월 13일에 민족일보를 창간하였다. 이 신문은 창간 준비 당시에는 ‘대중일보(大衆日報)’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였다가, ‘민족일보’로 바꾸어 등록허가를 받은 블랭킷판 4면제의 단간제(單刊制) 신문이었다.
창간 이전인 1월 29일, 민주당 김준섭 의원으로부터 "내달 2월 13일에 창간한다는 신문이 조총련의 자금을 조달받아서 만든다더라"라는 색깔론 공세를 받았다. 이에 국무원 사무처가 민족일보를 인쇄하고 있던 서울신문(당시 정부 직할기업체)에 대하여 민족일보 인쇄를 즉각 중지하라는 통고를 하였다. 이때문에 민족일보는 3일간 휴간하였다. 국무원 사무처측에서는 인쇄계약이 정부의 사전양해없이 이루어졌고 언론창달과 정부의 재산관리는 별개라는 입장을 보였다. 민족일보 측에서는 분명한 언론탄압이며 손해배상 소송과 국제신문인협회에 고발하겠다고 하였다. 당시 민주당 대변인은 정부관리하의 기업체에게 정부가 어떤 지시를 내리든 정부의 재량이지만 공익기관인 신문이므로 민족일보측에 5일전 미리 통고하여 여유를 주는게 옳았다고 하였다.
2.2. 창간 초기 논란
1961년 1월 29일, 민주당 김준섭 의원은 "내달 2월 13일에 창간한다는 신문이 조총련의 자금을 조달받아서 만든다더라"라며 색깔론 공세를 펼쳤다. 이에 국무원 사무처는 민족일보를 인쇄하던 서울신문(당시 정부 직할기업체)에 민족일보 인쇄를 즉각 중지하라는 통고를 하였다. 이 때문에 민족일보는 3일간 휴간하였다. 국무원 사무처 측에서는 인쇄 계약이 정부의 사전 양해 없이 이루어졌고 언론 창달과 정부의 재산 관리는 별개라는 입장을 보였다.
민족일보 측에서는 명백한 언론 탄압이며 손해배상 소송과 국제신문인협회에 고발하겠다고 하였다.
당시 민주당 대변인은 정부 관리하의 기업체에게 정부가 어떤 지시를 내리든 정부의 재량이지만, 공익기관인 신문이므로 민족일보 측에 5일 전 미리 통고하여 여유를 주는 게 옳았다고 비판하였다.
3. 주요 논조 및 활동
1961년 2월 13일, 조용수, 양호민 등 진보성향 언론인들은 진보정당 재건 및 대북강경책의 허구를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망명정객 이영근을 통해 민단으로부터 자금을 조달받아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민족일보는 창간 준비 당시 ‘대중일보(大衆日報)’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가 ‘민족일보’로 바꾸어 등록허가를 받은 블랭킷판 4면제의 단간제(單刊制) 신문이었다.
창간 이전인 1월 29일, 민주당 김준섭 의원은 "내달 2월 13일에 창간한다는 신문이 조총련의 자금을 조달받아서 만든다더라"라며 색깔론 공세를 펼쳤다. 이에 국무원 사무처는 민족일보를 인쇄하고 있던 서울신문(당시 정부 직할기업체)에 민족일보 인쇄를 즉각 중지하라는 통고를 하였고, 이 때문에 민족일보는 3일간 휴간하였다. 국무원 사무처는 인쇄계약이 정부의 사전양해없이 이루어졌고 언론창달과 정부의 재산관리는 별개라는 입장을 보였다. 민족일보 측에서는 명백한 언론탄압이며 손해배상 소송과 국제신문인협회에 고발하겠다고 하였다. 당시 민주당 대변인은 정부관리하의 기업체에게 정부가 어떤 지시를 내리든 정부의 재량이지만 공익기관인 신문이므로 민족일보측에 5일전 미리 통고하여 여유를 주는게 옳았다고 하였다.
민족일보는 북한을 "북괴"로 지칭하고, 김일성을 니키타 흐루쇼프의 꼭두각시"로 묘사하는 등 반공주의 논조를 보였다.
4. 5.16 군사정변과 폐간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용공분자 색출"을 명분으로 대북강경책과 노동자 탄압을 비판해오던 민족일보를 탄압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민족일보 발행인 조용수와 논설위원 송지영 등 간부 10인을 구속하고, 5월 19일 92호를 마지막으로 민족일보를 강제 폐간했다.
1961년 9월 공부보 자료에 따르면, 당시 동아일보는 23만 3,774부, 한국일보는 17만 4,565부, 조선일보는 13만 3,368부, 경향신문은 8만 185부, 민족일보는 4만 532부를 발행했다. 창간 첫해 민족일보가 가두판매만으로 4만여 부나 팔린 것은 당시 국민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보여준다.
4.1. 재판 및 사형 집행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사정권은 1961년 10월 31일 최종공판에서 조용수, 안신규, 송지영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국내외의 구명 운동에도 불구하고, 1961년 12월 20일 박정희가 형을 재가한 다음 날 서대문형무소에서 조용수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안신규와 송지영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이 사건은 신문인이 극형 또는 중형을 받은 대한민국 최초의 필화사건으로 '민족일보사건'으로 불린다.
5. 폐간 이후 및 명예 회복
이른바 ‘민족일보사건’은 신문인이 극형, 또는 중형을 받은 대한민국 최초의 필화사건이다. 감사 안신규(安新奎), 논설위원 송지영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사장 조용수는 사형이 집행되었다. 2006년 11월 과거사위원회로부터 명예를 회복하였고, 2008년 1월 16일 서울중앙지법 재심에서 조용수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5.1. 발행 부수
1961년 9월 공부보 자료에 따르면, 동아일보는 23만 3,774부, 한국일보는 17만 4,565부, 조선일보는 13만 3,368부, 경향신문은 8만 185부, 민족일보는 4만 532부를 발행했다. 민족일보는 창간 첫해 가두판매만으로 4만여 부가 팔려, 당시 국민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6. 평가 및 의의
민족일보 사건은 오랫동안 금기시되었으나, 민주화 이후 진실 규명과 명예 회복 노력을 통해 역사적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이 사건은 신문인이 극형 또는 중형을 받은 대한민국 최초의 필화 사건이다.
2006년 11월 과거사위원회는 《민족일보》와 조용수 사건에 대해 명예를 회복시켰다. 2008년 1월 1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는 재심에서 북한의 활동에 동조했다는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혐의로 사형이 선고됐던 조용수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6.1. 군사정권의 언론 탄압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용공분자 색출"이라는 명분 아래 대북 강경책과 노동자 탄압을 비판하던 민족일보를 탄압 대상으로 삼았다. 5월 19일 민족일보는 92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조용수 발행인과 송지영 논설위원을 비롯한 민족일보 간부 10인이 구속되었고, 10월 31일 최종 공판에서 조용수, 안신규, 송지영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송지영 논설위원, 안신규 감사 등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2월 20일 박정희가 형을 승인한 다음 날 서대문형무소에서 조용수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1961년 9월 공보부 자료에 따르면, 당시 주요 일간지 발행 부수는 다음과 같았다.
창간 첫해에 민족일보가 가두 판매만으로 4만여 부나 팔렸다는 사실은 당시 민족일보에 대한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을 보여준다.
6.2. 역사적 재평가
민족일보 사건은 오랫동안 금기시되었으나, 민주화 이후 진실 규명과 명예 회복 노력을 통해 역사적 재평가를 받고 있다. 이 사건은 신문인이 극형 또는 중형을 받은 대한민국 최초의 필화사건이다.
국내외 각계의 진정과 호소로 사형을 선고받은 3명 중 감사 안신규와 논설위원 송지영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사장 조용수는 사형이 집행되었다.
2006년 11월 과거사위원회는 《민족일보》와 조용수 사건에 대해 명예를 회복시켰다. 2008년 1월 1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는 재심에서 북한의 활동에 동조했다는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혐의로 사형이 선고됐던 조용수에게 무죄를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