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영 (1910년)
1. 개요
이원영은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국민총력조선연맹 등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다. 그는 고이소 구니아키 조선총독을 찬양하고 태평양 전쟁 참전을 옹호하는 등 친일 행적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및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광복 후에는 기업인으로 활동하며 대한잠사회 이사장을 역임했고,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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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김웅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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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정진석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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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사망 -
에프렘 짐발리스트
러시아 제국 출신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지휘자, 음악 교육자인 에프렘 짐발리스트는 레오폴트 아우어의 제자로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명성을 얻었고 커티스 음악원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은퇴 후에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
1985년 사망 -
김기진
김기진은 팔봉이라는 호를 사용한 한국의 문학평론가, 소설가, 시인으로, KAPF에서 활동하며 경향파 문학 이론을 이끌었으나 친일 행적을 보였고 광복 후에는 반공주의 문인으로 활동했다. -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
송영 (극작가)
송영은 일제 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극작가로, 카프 계열 연극인으로 등단하여 노동 운동 풍자 작품을 발표했으나 친일 행적을 보였고, 광복 후 월북하여 북조선연극동맹 위원장을 지냈으며, 김일성 항일 무장 투쟁을 형상화한 희곡으로 알려졌으나 한설야 숙청 시기에 숙청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것으로 보아 복권된 것으로 추정된다.
2. 일제강점기 활동
1936년 3월 25일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해 4월 경성일보 편집국에 입사했다. 1938년 2월부터 1941년까지 매일신보 도쿄 특파원으로 활동했고 매일신보 정치부장(1941년 11월)과 정경부장(1942년 4월 ~ 1944년 8월), 논설위원(1943년)을 역임했다. 1943년 1월부터 1944년 6월까지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겸 사무국 경제위원회 위원을 역임했으며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총무과장 겸 조선항공사업사 지배인(1944년 8월),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1945년 6월)을 역임했다.
1942년 6월 18일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 〈새 자부(慈父, 인자한 아버지)를 맞이하는 2천 4백만의 행복 - 작일(昨日, 어제), 고이소(小磯, 소기) 총독 부산에 상륙〉에서 고이소 구니아키 조선총독의 취임을 "젊은 조선에 다시 따사한 기운을 불어 줄 새 주인"이라고 찬양했고 같은 해 8월 잡지 《동양지광》에 기고한 글 〈고이소(小磯, 소기) 신(新)총독론〉에서도 "고이소 구니아키 총독의 진보적인 통찰력과 확고, 불굴의 신념에 운명을 맡긴 조선은 행복하다."고 찬양했다.
1944년 4월 잡지 《동양지광》에 기고한 글 〈전국(戰局)의 긴박과 청년에게 요망〉에서 "일본이 대동아 전쟁(태평양 전쟁)에서 진다면 동아는 멸망이 있을 뿐이고 노예화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반도(조선) 청년들은 전체 동아 민족의 생존을 위해 분기해야만 할 때이며 현재에는 자기를 멸망시키고 장래에는 조선을 멸망시키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국가를 지키고 동아(東亞)를 구한다는 정의감에 불타올라 지금 즉시 떨쳐 일어나야만 한다."며 일본의 침략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언론/출판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1. 언론 활동
이원영은 1936년 경성일보 편집국에 입사하며 언론계에 입문했다. 1938년부터 1941년까지 매일신보 도쿄 특파원으로 활동했고, 이후 매일신보 정치부장(1941년 11월), 정경부장(1942년 4월 ~ 1944년 8월), 논설위원(1943년)을 역임했다.
1942년 6월 18일 《매일신보》 기사에서 고이소 구니아키 조선총독의 취임을 "젊은 조선에 다시 따사한 기운을 불어 줄 새 주인"이라고 찬양했으며, 같은 해 8월 잡지 《동양지광》 기고글에서도 "고이소 구니아키 총독의 진보적인 통찰력과 확고, 불굴의 신념에 운명을 맡긴 조선은 행복하다."고 찬양했다. 1944년 4월 잡지 《동양지광》 기고글에서는 "일본이 대동아 전쟁에서 진다면 동아는 멸망이 있을 뿐이고 노예화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반도(조선) 청년들은 전체 동아 민족의 생존을 위해 분기해야만 할 때"라며 일본의 침략 전쟁에 조선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친일 논조의 기사와 기고문 작성 경력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언론/출판 부문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2. 친일 단체 활동
이원영은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겸 사무국 경제위원회 위원(1943년 1월 ~ 1944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1945년 6월)을 역임하는 등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다. 1942년 6월 18일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 〈새 자부(慈父, 인자한 아버지)를 맞이하는 2천 4백만의 행복 - 작일(昨日, 어제), 고이소(小磯, 소기) 총독 부산에 상륙〉에서 고이소 구니아키 조선총독의 취임을 "젊은 조선에 다시 따사한 기운을 불어 줄 새 주인"이라고 찬양했다. 같은 해 8월 잡지 《동양지광》에 기고한 글 〈고이소(小磯, 소기) 신(新)총독론〉에서도 "고이소 구니아키 총독의 진보적인 통찰력과 확고, 불굴의 신념에 운명을 맡긴 조선은 행복하다."고 찬양했다. 1944년 4월 잡지 《동양지광》에 기고한 글 〈전국(戰局)의 긴박과 청년에게 요망〉에서 "일본이 대동아 전쟁에서 진다면 동아는 멸망이 있을 뿐이고 노예화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반도(조선) 청년들은 전체 동아 민족의 생존을 위해 분기해야만 할 때이며 현재에는 자기를 멸망시키고 장래에는 조선을 멸망시키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국가를 지키고 동아(東亞)를 구한다는 정의감에 불타올라 지금 즉시 떨쳐 일어나야만 한다."며 일본의 침략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언론/출판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3.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
이원영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언론/출판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는 등 친일 행적이 비판받고 있다.
193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1941년부터는 매일신보 정치부장과 정경부장을 역임했고, 1943년부터 1944년 6월까지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겸 사무국 경제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1942년 6월 18일 《매일신보》 기사에서 고이소 구니아키 조선총독의 취임을 찬양했고, 같은 해 8월 《동양지광》 기고 글에서도 고이소 총독을 찬양했다. 1944년 4월 《동양지광》 기고 글에서는 일본의 태평양 전쟁에 조선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것을 주장했다.
3. 광복 이후 활동
이원영은 기업인으로 활동하며 대한잠사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1967년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소속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3.1. 기업 활동
3.2. 정치 활동
이원영은 1967년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친일 행적으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