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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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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재명은 일제강점기 및 해방 이후 영화 프로듀서로 활동한 인물이다. 광주 출생으로 일본 유학 후 영화 연출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영화 《무정》을 기획했다. 1937년 조선영화주식회사 지배인으로 입사해 영화 제작을 주도했으며, 친일 단체 활동과 국책 영화 제작에 협력하여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해방 후에는 좌익 계열 단체에 참여하여 영화 제작 활동을 이어갔으며, 아세아영화사 대표 등을 역임하며 196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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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영화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재명
본명이재명
출생1908년
출생지전라남도 광주
사망1987년 11월 9일
사망지서울
분야영화기획, 영화제작

2. 일제 강점기 활동

일본에서 니혼 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도쿄에서 연출을 공부한 뒤 귀국하여 영화계 활동을 시작했다. 첫 기획 작품은 이광수의 소설을 영화화한 《무정》(1939)이다.

1937년 조선영화주식회사(조영) 지배인으로 입사하여 영화 제작의 전문화, 분업화 시기에 등장한 초기의 본격적인 영화 프로듀서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시책에 협력하는 행보를 보였다. 1940년대에는 조선총독부의 협찬을 받은 어용영화 《흙에 산다》(1942) 등을 기획했으며, 황도학회 발기인을 맡고 친일 성격의 좌담회에도 참여했다.[2] 1942년 조영이 단일 회사로 출범하자 기술과장과 촬영과장을 겸임하며 국책영화 제작에 적극 협력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2. 1. 초기 영화 경력

전라남도 광주에서 출생하여 목포상업전수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에 유학하여 니혼 대학 문과를 졸업한 뒤 도쿄에서 연출을 공부하였다. 귀국한 뒤 처음 기획을 맡은 영화는 이광수의 소설을 영화화한 《무정》(1939)이다.

1937년에 조선영화주식회사 지배인으로 입사했으며, 관제 기업인 조영에서 상당한 실세였다는 증언이 있다. 이재명은 1930년대 중반부터 영화 제작이 전문화, 분업화될 무렵에 등장한 최초의 본격적 영화 프로듀서였다.

1940년대 국책영화 시기에 조선총독부의 협찬으로 제작된 어용영화 《흙에 산다》(1942) 등을 기획했다. 황도학회 발기인을 맡았고, 1941년 잡지 《영화평론》에서 마련한 친일 성격의 좌담회에 백철, 최인규, 허영 등과 함께 참가[2] 한 적도 있다.

1942년에는 조선영화주식회사가 기존의 영화사를 강제 통합하여 단일 회사로 출범했다. 이재명은 여기에 입사하여 기술과장과 촬영과장을 겸임하면서 전시체제 하의 영화계 재편 과정과 국책영화 제작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태평양 전쟁 종전 이후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운영권을 일본인으로부터 넘겨받은 뒤, 이를 바탕으로 결성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의 영화 부문과 조직체인 조선영화건설본부에 참여했다.[3][4] 이후 조선영화동맹의 중앙집행위원도 맡았다.[5] 두 단체는 기본적으로 좌익 계열이었으나, 혼란기였기 때문에 여러 성향을 가진 인물들이 섞여 있었다.

2. 2. 친일 행적 논란

1937년에 관제 기업인 조선영화주식회사(조영)의 지배인으로 입사했으며, 당시 상당한 실세였다는 증언이 있다. 이재명은 1930년대 중반부터 영화 제작이 전문화, 분업화될 무렵에 등장한 최초의 본격적인 영화 프로듀서 중 한 명이었다.

1940년대 국책영화 시기에는 조선총독부의 협찬을 받아 제작된 어용영화 《흙에 산다》(1942) 등을 기획했다. 또한 황도학회의 발기인을 맡았으며, 1941년에는 잡지 《영화평론》이 주최한 친일 성격의 좌담회에 백철, 최인규, 허영 등과 함께 참가하기도 했다.[2]

1942년, 기존 영화사들이 강제 통합되어 조선영화주식회사가 단일 회사로 출범하자 여기에 입사하여 기술과장과 촬영과장을 겸임했다. 이 과정에서 전시체제 하의 영화계 재편 과정과 국책영화 제작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3. 해방 후 활동

태평양 전쟁 종전 이후, 조선영화주식회사 운영권을 인수하고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조선영화건설본부, 조선영화동맹 등 해방 직후 결성된 영화 단체에 참여했다.[3][4][5] 이후 아세아영화사 대표 등을 맡으며 1960년대 초반까지 영화 제작자로 활동했다.[6]

3. 1. 좌익 단체 참여

태평양 전쟁 종전 이후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운영권을 일본인으로부터 넘겨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결성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의 영화 부문과 그 조직체인 조선영화건설본부에 참여하였다.[3][4] 이후 조선영화동맹의 중앙집행위원도 맡았다.[5] 이 단체들은 기본적으로 좌익 계열로 분류되었으나, 해방 직후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성향을 가진 인물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3. 2. 영화 제작 활동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나 목포상업전수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 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도쿄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했다. 귀국 후 처음으로 기획을 맡은 영화는 이광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무정》(1939)이다.

1937년 조선영화주식회사(조영)에 지배인으로 입사했으며, 당시 관제 기업이던 조영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다는 증언이 있다. 이재명은 1930년대 중반 영화 제작이 전문화, 분업화되던 시기에 등장한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영화 프로듀서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1940년대 들어 일제의 국책영화 제작 시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제작된 어용영화 《흙에 산다》(1942) 등을 기획하며 친일 행적을 보였다. 황도학회의 발기인을 맡았으며, 1941년에는 잡지 《영화평론》이 주최한 친일 성격의 좌담회에 백철, 최인규, 허영 등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2]

1942년, 조선영화주식회사가 기존 영화사들을 강제로 통합하여 단일 회사로 출범했을 때, 이재명은 여기에 입사하여 기술과장과 촬영과장을 겸임했다. 그는 전시체제 하의 영화계 재편 과정과 국책영화 제작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이름이 올랐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운영권을 일본인으로부터 넘겨받았다. 이를 기반으로 결성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의 영화 부문과 조직체인 조선영화건설본부에 참여했다.[3][4] 이후 조선영화동맹의 중앙집행위원도 맡았는데,[5] 이 단체들은 기본적으로 좌익 성향을 띠었으나, 해방 직후의 혼란기였기 때문에 다양한 성향의 인물들이 함께 활동했다.

아세아영화사 대표 등을 역임하며 영화 제작자로서 1960년대 초반까지 꾸준히 활동했다. 배우 남궁원이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친구의 아버지였던 이재명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가 영화계에 데뷔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6]

참조

[1] 뉴스 영화인 이재명씨 별세 조선일보 1987-11-10
[2] 뉴스 한국 영화의 근간도 친일 - [친일영화편] 인민배우 문예봉, 〈자유만세〉 최인규도 포함 컬처뉴스 2005-09-02
[3] 서적 한국현대 예술사대계 1 (해방과 분단 고착 시기) 시공사 1999-12-22
[4] 뉴스 조선영화동맹과 북한영화 컬처뉴스 2005-04-01
[5] 서적 한국영화사연구 시공사 1999-12-25
[6] 뉴스 한국영화를 빛낸 스타들② - 한국의 ‘그레고리 펙’ 남궁원 http://www.donga.com[...] 신동아 2003-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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