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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세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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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주세륭은 북위 후기의 인물로, 화주 자사 이주매진의 아들이자 흉노 계통의 기호족 출신이다. 효명제 말년에 관직을 시작하여 이주영을 따라 낙양에서 활동했으며, 효장제 즉위 후 요직을 두루 거쳤다. 530년 이주영이 살해된 후 원엽을 옹립하고 상서령에 올랐으나, 이주조가 낙양에 입성한 후 원엽을 폐위하고 절민제를 옹립하는 과정에서 조정을 장악했다. 이후 권력을 남용하고 고환의 반란으로 인해 몰락하여 532년 형 이주언백과 함께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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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세륭
이주세륭
로마자 표기Erzhu Shilong
생년500년경
몰년532년
아버지이주영
형제자매이주조, 이주도갈, 이주천광, 이주세관, 이주세웅, 이주중원, 이주세침, 이주차니, 이주보살, 이주씨리
배우자원명월
자녀이주영악, 이주문창
가문
성씨이주씨

2. 생애

이주세륭은 이주매진(爾朱買珍)의 아들로 태어나, 효명제 말년에 직합장군(直閤將軍)과 전장군(前將軍)을 겸했다. 이주영이 입조를 신청하자 영태후(靈太后)는 이주세륭을 진양(晋陽)에 보내 설득시켰으나, 이주영은 거부했다. 528년 효명제 사후 이주영이 낙양(洛陽)으로 향하자, 이주세륭은 낙양을 탈출해 상당(上党)에서 합류, 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郞)에 임명되었다.

효장제 즉위 후, 이주세륭은 시중(侍中) · 영군장군(領軍將軍) · 좌위장군(左衛將軍) · 영좌우(領左右) · 사주대중정(肆州大中正)을 제수받고 낙평군개국공(樂平公開國公)에 봉해졌다. 이후 거기장군(車騎將軍) 및 영군(領軍),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및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승진했다. 529년 원호(元顥)가 대량(大梁)을 공격하자 의동삼사(儀同三司) 및 전군도독(前軍都督)으로 호뢰(虎牢)에 주둔했으나, 양욱(楊昱)이 형양(滎陽)에서 사로잡히자 호뢰를 버리고 도주, 원호가 낙양을 점령하고 효장제는 하내(河內)로 피신했다. 효장제 복귀 후,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및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가 되고, 시중에서 해임된 뒤 산기상시(散騎常侍)를 더했다.

530년 이주영 피살 후, 이주세륭은 낙양을 탈출, 이주도율(爾朱都律) 등과 원엽(元曄)을 옹립하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상서령(尙書令)이 되어 낙평군왕(樂平郡王)으로 추봉되었다. 이주조(爾朱兆)와 함께 낙양에 입성, 531년 원엽을 폐위하고 절민제(節閔帝)를 옹립했다.

532년 이주천광(爾朱天光)이 고환(高歡)에게 패하자, 곡사춘(斛斯椿)에게 붙잡혀 다른 이주씨 일족들과 함께 사형당했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효명제 만년에 이주세륭은 직합장군(直閤將軍)이 된 뒤 전장군(前將軍)을 겸하였다. 이주세륭은 화주자사(華州刺史) 이주매진(爾朱買珍)의 아들이었으며, 흉노 계통의 기호(契胡)족 출신이었다.[1]

이후 이주영이 입조를 신청하자 영태후(靈太后)는 이를 꺼려 이주세륭을 진양(晋陽)에 머물던 이주영에게 보내 단념하도록 설득시켰으나, 이주영은 이를 거부했다.[1] 영태후는 이주세륭을 보내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게 했지만, 이주영은 이주세륭을 곁에 두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주세륭은 그러지 않으면 호태후가 이주영의 낙양 공격 계획을 알고 대비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낙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528년, 효명제가 사망한 뒤 이주영이 낙양(洛陽)으로 향하자 이주세륭은 낙양을 탈출해 상당(上党)에서 이주영과 합류하였고, 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郞)으로 임명되었다.[1]

2. 2. 이주영의 지휘하

528년 효명제가 사망한 뒤 이주영이 낙양(洛陽)으로 향하자 낙양을 탈출해 상당(上党)에서 이주영과 합류하였고 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郞)으로 임명되었다.[1]

이후 효장제(孝莊帝)가 즉위하자 시중(侍中) · 영군장군(領軍將軍) · 좌위장군(左衛將軍) · 영좌우(領左右) · 사주대중정(肆州大中正)을 제수받았으며, 낙평군개국공(樂平公開國公)에 봉해졌다.[1] 그 뒤 거기장군(車騎將軍) 및 영군(領軍)이 되었으며,[1]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및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승진하였다.[1]

529년 원호(元顥)가 대량(大梁)으로 향하자 의동삼사(儀同三司) 및 전군도독(前軍都督)에 임명되어 호뢰(虎牢)에 주둔하였으나,[1] 형양(滎陽)에서 양욱(楊昱)이 사로잡히자 호뢰를 버리고 달아나 결국 원호가 낙양을 점령하고 효장제는 하내(河內)로 피신하게 되었다.[1] 그 뒤 효장제가 낙양으로 복귀하자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및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가 되었으며,[1] 시중에서 해임된 뒤 산기상시(散騎常侍)를 더했다.[1]

2. 3. 효장제 암살 이후

528년 이주영이 거병하자 낙양에서 탈출하여 이주영과 합류한 이주세륭은 급사황문시랑에 임명되었다.[1] 효장제가 즉위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529년 원호가 대량으로 쳐들어오자 의동삼사(儀同三司) 및 전군도독(前軍都督)에 임명되어 호뢰에 주둔하였으나, 양욱이 사로잡히자 호뢰를 버리고 달아났다.[1]

530년 이주영이 살해당하자 낙양을 탈출해 이주도율 등과 함께 원엽을 옹립하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상서령(尙書令)이 되었으며 낙평군왕(樂平郡王)으로 추봉되었다.[1] 이주조가 낙양으로 병사를 진군시키자 함께 낙양에 입성했다.[1]

이주세륭은 이주영의 호위병 잔여 병력을 이끌고 즉시 이주영의 근거지인 진양(晉陽, 현재의 타이위안시(太原, 산시성山西))으로 가려 했으나, 이주영의 책사 사마자여(司馬子如)는 그렇게 하기 전에 효장제에게 재빨리 위력을 과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에 이주세륭은 낙양의 바로 북쪽에 있는 요새인 북중(北中)과 낙양과 북중을 잇는 황하(黃河) 다리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효장제는 저항을 포기하면 "철권(鐵券, ''tie quan'')"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에 대항하여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면죄부)을 제공하여 항복시키려 했으나, 이주세륭은 이를 거절했다. 효장제의 군대와 이주세륭의 군대는 보름 동안 대치하다가, 효장제의 관리 이묘(李苗)의 매복 공격으로 황하 다리가 파괴되었고, 이에 이주세륭은 북쪽으로 진군하기로 결정했다. 이주세륭은 창즈시(長治, 현재의 산시성 산시)에 있는 장자(長子)에서 이주조를 만나, 함께 원엽을 창광왕(長廣王)으로 선포하여 황위 경쟁 후보로 내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주조의 지휘하에 있던 이주 군대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이주조가 황하를 쉽게 건널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효장제를 기습했다. 531년 새해 무렵, 이주조의 군대가 말을 타고 강을 건너자 효장제의 황실 호위병은 붕괴되었고, 효장제는 이주조에게 포로로 잡혔다. 이주조는 효장제의 어린 아들(이주황후 소생)을 죽였으며, 군사들에게 낙양을 약탈하도록 허용하여 많은 관리들을 살해하고 많은 귀부인들을 강간했다.

이주조는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고 믿고 이주세륭에 대해 거만하게 굴며, 이주세륭이 이주영에게 충분히 경고하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이주세륭은 몹시 사과했지만, 그 이후 이주조에 대한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이주조는 곧 진양으로 돌아갔고, 이주세륭에게 낙양과 황실 행정을 맡겼다. 한편 이주세륭은 원엽의 어머니 위부인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우려하여 그녀를 암살했지만, 강도 사건으로 위장했다.

531년 다른 이주씨 일족들과 함께 원엽을 폐위하고 절민제(節閔帝)를 옹립하였다.[1]

얼마 지나지 않아 이주조는 효장제를 교살했다. 이주씨 일족이 효장제의 죽음에 이르자 그들은 정부의 모든 중요한 기능을 장악했고, 이주세륭은 황실 정부를 장악하여 신속하게 재편성하고 낙양의 질서를 회복했다. 이주조는 최고의 군사 권위로 인정받아 황하 북쪽의 여러 성을 통제했고, 이주영의 조카 이주천광관중 지역을 통제했으며, 이주세륭의 형제 이주중원(爾朱仲遠)은 동남부 지역을 통제했다.

531년 초, 새로운 황제 원엽이 낙양에 도착하기 전에 이주세륭과 그의 형제 이주중원, 이주언백(爾朱彥伯), 그리고 이주천광은 원엽의 혈통이 최근 황제들의 혈통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를 황제로 선택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주천광은 헌문제의 손자인 원공 광릉왕을 제안했는데, 그는 백성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었다. 이주세륭은 이주언백을 보내 원공에게 강제로 왕위를 받아들이게 했고, 원공은 동의했다. 원엽이 낙양에 도착하자 이주세륭은 그에게 원공에게 왕위를 양보하도록 강요했고, 원공은 절민제로 즉위했다. (이주조는 상의를 받지 못하고 처음에는 화가 나서 이주세륭을 공격할 생각까지 했으나, 이주세륭이 이주언백을 진양으로 보내 그에게 이 결정을 설명한 후에야 진정되었다.)

이주세륭은 이 시점에 이르러 자만심에 빠졌고 오만해졌으며, 효장제 재위 시절만큼 자신의 임무를 처리하는 데 더 이상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대부분의 군 지휘관들을 장군으로 승진시켜 그들을 달래려 했고, 그 결과 "장군"이라는 칭호는 더 이상 가치 있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2. 4. 권력 장악과 몰락

효명제 만년에 이주세륭은 직합장군(直閤將軍)이 된 뒤 전장군(前將軍)을 겸하였다. 영태후는 이주영의 입조를 꺼려 이주세륭을 진양(晋陽)에 머물던 이주영에게 보내 단념하도록 설득시켰으나 이주영은 이를 거부했다.[1] 528년, 효명제가 사망한 뒤 이주영이 낙양(洛陽)으로 향하자 낙양을 탈출해 상당(上党)에서 이주영과 합류하였고 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郞)으로 임명되었다.[1]

효장제가 제위에 오르자 이주세륭은 시중(侍中) · 영군장군(領軍將軍) · 좌위장군(左衛將軍) · 영좌우(領左右) · 사주대중정(肆州大中正)을 제수받았으며, 낙평군개국공(樂平公開國公)에 봉해졌다.[1] 그 뒤 거기장군(車騎將軍) 및 영군(領軍)이 되었으며,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및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승진하였다.[1] 효장제는 이주세륭을 보사(僕射)로 임명하고 문관 관료 시스템을 담당하게 했다. 이주세륭은 처음에는 그 직책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두려워하여 법과 규정을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고, 시스템을 개혁하여 더 이상 엄격한 연공서열에 기반하지 않도록 했다. 그는 이 개혁으로 많은 칭찬을 받았다. 529년 원호(元顥)가 양나라 군대의 지원을 받아 쳐들어오자, 효장제는 이주세륭에게 허뢰(虎牢, 현재의 정저우, 허난성)의 중요한 요새를 담당하게 했다. 그러나 형양(滎陽)에서 양욱(楊昱)이 사로잡히자 호뢰를 버리고 달아나 결국 원호가 낙양을 점령하고 효장제는 하내(河內)로 피신하게 되었다.[1] 그 뒤 효장제가 낙양으로 복귀하자 이주세륭은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및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가 되었으며, 시중에서 해임된 뒤 산기상시(散騎常侍)를 더했다.[1]

530년 이주영이 살해당하자 이주세륭은 낙양을 탈출해 이주도율(爾朱都律) 등과 함께 원엽(元曄)을 옹립한 뒤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상서령 (尙書令)이 되었으며 낙평군왕(樂平郡王)으로 추봉되었다.[1] 이주세륭은 이주영의 호위병 잔여 병력을 이끌고 즉시 이주영의 근거지인 진양(晉陽, 현재의 타이위안시(太原, 산시성山西)으로 가려 했으며, 그곳은 이주영의 조카 이주조(爾朱兆)가 지키고 있었다. 이주영의 책사 사마자여(司馬子如)는 이주세륭에게 그렇게 하기 전에 황제 효장제(孝莊帝)에게 재빨리 위력을 과시해야 한다고 조언했고, 이주세륭은 이에 따라 낙양(洛陽)의 바로 북쪽에 있는 요새인 북중(北中)과 낙양과 북중을 잇는 황하(黃河) 다리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효장제는 이주세륭에게 저항을 포기하면 "철권(鐵券, ''tie quan'')"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에 대항하여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면죄부)을 제공하여 항복시키려 했다. 이주세륭은 이를 거절하며, 이주영이 그렇게 많은 업적을 이루고도 살해될 수 있었다면, 그 증명서는 무의미하다고 선언했다. 효장제의 군대와 이주세륭의 군대는 보름 동안 대치하다가, 효장제의 관리 이묘(李苗)의 매복 공격으로 황하 다리가 파괴되었고, 이에 이주세륭은 북쪽으로 진군하기로 결정했다. 뒤이어 이주조(爾朱兆)가 낙양으로 병사를 진군시키자 함께 낙양에 입성해 531년 다른 이주씨 일족들과 함께 원엽을 폐위하고 절민제(節閔帝)를 옹립하였다.[1]

이주조는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고 믿고 이주세륭에 대해 거만하게 굴며, 이주세륭이 이주영에게 충분히 경고하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이주세륭은 몹시 사과했지만, 그 이후 이주조에 대한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이주조는 곧 진양으로 돌아갔고, 이주세륭에게 낙양과 황실 행정을 맡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주조는 효장제를 교살했다. 이주씨 일족은 정부의 모든 중요한 기능을 장악했고, 이주세륭은 황실 정부를 장악하여 신속하게 재편성하고 낙양의 질서를 회복했다.

이주세륭은 이 시점에 이르러 자만심에 빠졌고 오만해졌으며, 효장제 재위 시절만큼 자신의 임무를 처리하는 데 더 이상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대부분의 군 지휘관들을 장군으로 승진시켜 그들을 달래려 했고, 그 결과 "장군"이라는 칭호는 더 이상 가치 있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동안, 이주 씨족의 다른 구성원들도 부패했는데, 특히 이주중원이 심했다. 이주영의 추종자였던 장군 고환은 이주 세력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고 531년 여름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주 씨족은 고환이 병력에서 열세였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았지만, 이주세륭은 고환의 능력을 알고 우려했다. 532년 이주천광(爾朱天光)이 고환(高歡)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다른 이주씨 일족들과 함께 곡사춘(斛斯椿)에게 붙잡혀 사형당했다.

3. 가족 관계


  • 배우자: 해씨
  • 첩: 풍씨 (임성왕 원이의 미망인)

4. 평가

얼주사룡은 북위 말 혼란기에 권력을 잡았으나, 자만과 부패로 인해 몰락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황실 정부를 장악하고 낙양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지만, 이후 오만해져서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 했다.[1]

얼주씨 일족은 정부 요직을 장악하고 부패했는데, 특히 얼주중원(爾朱仲遠)이 심했다. 고환은 얼주영의 추종자였던 장군으로, 얼주 세력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판단하여 531년 여름에 반란을 일으켰다. 얼주사룡은 고환의 능력을 알고 우려했지만, 결국 고환에게 패배하고, 후사 춘에게 사로잡혀 참수되었다.[1]

4. 1. 부정적 평가

얼주사룡은 이 시점에 이르러 자만심에 빠졌고 오만해졌으며, 효장제 재위 시절만큼 자신의 임무를 처리하는 데 더 이상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대부분의 군 지휘관들을 장군으로 승진시켜 그들을 달래려 했고, 그 결과 "장군"이라는 칭호는 더 이상 가치 있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4. 2. 종합적 평가

이주세륭은 북위 말기의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권력을 추구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행적은 당시 정치 상황의 복잡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얼주씨 일족이 정부의 모든 중요한 기능을 장악하고, 이주세륭이 황실 정부를 장악하여 재편성과 낙양의 질서 회복을 이끌었을 때, 그는 자만심에 빠져 자신의 임무에 소홀해졌다. 그는 대부분의 군 지휘관들을 장군으로 승진시켜 그들을 달래려 했으나, 이는 "장군"이라는 칭호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1]

이러한 상황은 고환의 반란으로 이어졌고, 이주세륭을 비롯한 얼주씨 일족은 결국 몰락하게 되었다. 이주세륭은 후사 춘의 봉기로 사로잡혀 참수되었다.[1] 그의 몰락은 북위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으며, 이후 북조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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