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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효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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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위 효장제(孝莊帝)는 북위 선무제의 조카이자 팽성왕 원협의 아들로, 이주영의 추대로 북위의 황제가 되었다. 이주영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허수아비 황제가 되었으며, 이주영 제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주영 사후 이주씨 일족의 반격으로 사로잡혀 진양에서 교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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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효장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북위 효장제
원 이름원자유 (元子攸)
성씨원 (元)
자유 (子攸)
묘호경종 (敬宗)
시호무회황제 (武懷皇帝) (후폐제에 의해 추증)
효장황제 (孝莊皇帝) (효무제에 의해 개시)
생년507년
몰년531년 1월 26일
능묘정릉 (靜陵)
재위 정보
국가북위
즉위528년 5월 15일
퇴위531년 1월 6일
이전 통치자원조
이후 통치자원엽
연호건의 (建義) 528년
영안 (永安) 528년-530년
가계
아버지원협
어머니이원화
배우자이주씨 (황후)
자녀알려진 바 없음

2. 생애

효명제 독살 등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6진의 난 진압 과정 중 대군벌로 성장한 흉노족 이주영이 군대를 이끌고 낙양(洛陽)에 들어오면서 옹립되었다.

528년 이주영은 하음의 변을 일으켜 반대파를 제거하고 자신의 무리들을 효장제 주변에 배치하여 감시했다. 효장제는 안팎으로 압박을 받았다.[8] 효장제의 처남들과 이주영은 서로를 헐뜯으며 갈등했고, 효장제는 이주영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530년 가을, 이주영이 이주황후의 해산을 핑계로 입궁을 요청하자, 효장제는 측근들과 함께 이주영 제거 계획을 실행했다. 효장제는 궁궐에 군사를 숨기고 이주영과 원천목을 불러들였다. 효장제가 직접 칼을 뽑아 이주영을 찌르고, 숨어있던 군사들이 이주영과 원천목을 살해했다. 이주영의 아들 이주보제 등 30명도 함께 제거되었다. 효장제는 이주영의 홀에서 제거 대상 명단을 발견하고, "그놈이 만약 오늘을 넘겼다면 끝내는 제어할 수 없었겠다."라고 말했다.[8]

하지만 이주영의 일족인 이주조, 이주세륭 등은 효장제에게 대항하여 거병, 원엽을 옹립하고 낙양을 공격했다. 낙양은 배반으로 함락되었고, 효장제는 사로잡혔다. 이주조는 이주황후가 낳은 효장제의 아들을 죽이고, 비빈과 공주들을 욕보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효장제는 진양으로 압송되어 531년 1월 16일, 삼급불사에서 교살되었다.

2. 1. 초기 생애

북위 선무제의 조카이자 원협 팽성왕의 셋째 아들로 507년에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원협의 부인 이원화 공주였으며, 존경받는 관리 이충의 딸이었다.[4] 원자유는 형제들과 매우 가까웠으며, 맏형 원자지, 동생 원자정과 함께 무성공으로 봉해졌다.[4]

젊은 시절 원자유는 선무제의 시종으로 일했으며, 총명함과 잘생긴 외모로 칭찬받았다. 선무제와 그의 아들 효명제 재위 기간 동안 관직을 역임했다. 526년, 효명제는 원자유를 창락왕으로 진봉했다. 그러나 527년, 원소가 반역을 꾀한다는 혐의로 원연명 안풍왕에게 고발당하면서 모든 실질적인 권한을 잃었다. 하지만 효명제와 호태후는 원자유와 그의 형제들을 죽이지 않았다.

2. 2. 이주영의 옹립과 즉위

528년, 효명제가 독살당하고 어린 원조가 황제로 옹립되자, 이주영은 난을 일으켰다. 이주영은 원자유의 능력과 명성을 높이 사 그를 황제로 옹립하기로 결정했다. 원자유는 이주영의 제안에 동의하여 낙양을 탈출, 이주영의 군대에 합류하여 황제로 즉위했다.[4]

효장제 즉위 초, 조정의 실권은 장인 이주영이 장악하게 되었다. 529년, 원호가 남조 양의 병사를 빌려 북진하여 위나라 황제를 칭하며 5월에 낙양으로 들이닥치자, 효장제는 황하 북쪽의 하내군으로 피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낙양은 원호에게 점령되었으나, 7월, 이주영 등이 원호를 토벌했고, 효장제는 낙양으로 귀환했다.

효장제는 이주영의 괴뢰나 다름없었고, 이를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효장제는 측근들에게 "짐은 비록 조위의 제4대 황제 조모와 같이 죽더라도, 조위의 제5대 황제 조환과 같이 오래 살 생각은 없다!"라고 말했고[8], 530년 9월 21일, 이주황후가 임신한 것을 틈타, 이 소식을 이주영과 이주보제 부자에게 알리고 궁궐로 유인하여 살해했다.

그러나 이주영의 일족인 이주조·이주세륭 등이 거병하여 장광왕 원엽을 옹립했다. 12월에 낙양이 함락되고 효장제는 구금되었다. 신병은 영녕사로 옮겨지고, 이주황후는 갓 태어난 황자마저 살해당했다. 더 나아가 진양으로 신병이 옮겨졌고, 12월 13일(531년 1월 16일), 성내 삼급 불사에서 살해되었다.

2. 3. 이주영과의 갈등 및 하음의 변

528년 하음의 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주영은 자신의 무리들을 효장제 주변에 배치하여 감시했고, 효장제는 안팎으로 압박을 받았다.[8] 효장제의 처남들과 이주영은 서로를 헐뜯으며 갈등했고, 효장제는 이주영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530년 가을, 이주영이 이주황후의 해산을 핑계로 입궁을 요청하자, 효장제는 측근들과 함께 이주영 제거 계획을 실행했다. 이주세륭은 효장제의 의도를 의심하여 이주영에게 알렸으나, 이주영은 효장제를 얕잡아 보고 무시한 채 낙양으로 갔다.

효장제는 궁궐에 군사를 숨기고 이주영과 원천목을 불러들였다. 효장제가 직접 칼을 뽑아 이주영을 찌르고, 숨어있던 군사들이 이주영과 원천목을 살해했다. 이주영의 아들 이주보제 등 30명도 함께 제거되었다. 효장제는 이주영의 홀에서 제거 대상 명단을 발견하고, "그놈이 만약 오늘을 넘겼다면 끝내는 제어할 수 없었겠다."라고 말했다.[8] 백성들은 기뻐했고, 효장제는 사면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주영의 일족인 이주조, 이주세륭 등은 효장제에게 대항하여 거병, 원엽을 옹립하고 낙양을 공격했다. 낙양은 이주씨에게 붙어있었던 화산왕 원지의 배반으로 함락되었고, 효장제는 사로잡혔다. 이주조는 이주황후가 낳은 효장제의 아들을 죽이고, 비빈과 공주들을 욕보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효장제는 진양으로 압송되어 531년 1월 16일, 삼급불사에서 교살되었다.

2. 4. 이주씨의 반격과 최후

이주영이 죽은 후, 이주조, 이주세륭 등 이주씨 일족은 효장제에 대항하여 거병, 낙양으로 진격했다.[5] 이들은 황하를 지키던 이묘를 격파했고, 효장제는 관군을 보내 막았으나 번번이 패했다. 결국 낙양은 이주씨에게 붙어있었던 화산왕 원지의 배반으로 함락되었고, 효장제는 도망치다 이주조의 기병에게 사로잡혔다.[5]

이주조는 효장제가 낳은 아들을 때려 죽이고, 여러 비빈과 공주들을 욕보이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효장제는 진양으로 압송되었고, 10일 뒤 진양의 삼급불사에서 교살되었다.[5]

효장제의 죽음으로 북위는 더욱 큰 혼란에 빠져들었고, 결국 동위서위로 분열되었다.

3. 이주영 사후의 북위 재통합 시도 (529년 ~ 530년)

이주영은 거롱, 싱가오, 모치추노 등 주요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북위를 재통일하려 했다. 효장제는 이주영의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력 확장을 경계했다.[8] 530년 봄, 이주영은 조카 이주천광을 파견하여 서부 지역의 반란을 평정하게 했다. 이주천광은 모치추노를 격파하고 사로잡는 등 큰 공을 세워 제국 재통합에 기여했다.

529년, 양나라 무제는 효장제의 사촌 위호(元侥)를 북위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 천칭즈가 이끄는 양나라 군대는 위호를 호위하며 북위로 진격, 뤄양을 점령했다. 효장제는 뤄양을 탈출하여 이주영과 합류했다. 그러나 위호는 양나라의 통제를 벗어나려 했고, 결국 이주영의 공격으로 뤄양에서 축출되었다. 효장제는 다시 뤄양으로 돌아와 황제 자리를 되찾았다.

4. 연호

연호원년2년3년
서력528년529년530년
간지무신기유경술
연호건의
영안
영안 2년영안 3년


5. 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원사추존 문목황제(文穆皇帝)
어머니이원화추존 문목황후(文穆皇后)
황후이주씨이주영의 딸
아들(이름 미상)이주황후 소생, 530년 출생, 이주조에게 살해당함[8]


6. 평가

효장제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이주영에 맞서 황제로서의 권위를 되찾으려 노력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목숨을 잃었다.[8] 그의 죽음은 북위 멸망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효장제는 이주영을 죽이고 황권을 강화하려 했지만, 이는 이주씨 일족의 반격을 불러왔다. 결국 그는 이주조에게 붙잡혀 살해당했고, 이 사건은 북위의 멸망을 더욱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참조

[1] 서적 "wu'xu day of the 4th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Yong'an'' era, per Emperor Xiaozhuang's biography in ''Book of Wei''" Book of Wei
[2] 서적 "Emperor Xiaozhuang's biography in ''Bei Shi'' indicate that he was captured by Erzhu Zhao on the ''jia'chen'' day of the 12th month of the 3rd year of the ''Yong'an'' era." Bei Shi
[3] 서적 "According to Emperor Xiaozhuang's biography in ''Book of Wei'', he was 24 (by East Asian reckoning) when he died on the ''jiazi'' day of the 12th month of the 3rd year of the ''Yong'an'' era of his reign; the date corresponds to 26 Jan 531 in the Julian calendar. ([永安三年]十有二月...甲子,崩于城内三级佛寺,时年二十四.)" Wei Shu 0531-01-26
[4] 서적 "In Emperor Xiaozhuang's biography in the ''[[Book of Wei]]'', it was said that it was Emperor Xuanwu who created Yuan Ziyou (and thus, implicitly, Yuan Zizhi and Yuan Zizheng) duke, but in Yuan Xie's biography, it was said that it was Empress Dowager Hu." Book of Wei
[5] 문서 The Princess Beixiang was not the daughter of an emperor, but was created princess in recognition of Erzhu's achievements.
[6] 서적 『[[魏書]]』巻11「二月辛亥、上孝荘皇帝諡曰武懐皇帝。」 魏書
[7] 서적 『魏書』巻11「丁卯、太尉公・司州牧・南陽王宝炬坐事降為驃騎大将軍・開府、王如故、帰第、令羽林衛守。改諡武懐皇帝曰孝荘。」 魏書
[8] 서적 『[[北史]]』巻48 爾朱栄伝「朕之情理,卿所具知,死猶須為,況必不死!寧与高貴郷公同日死,不与常道郷公同日生。」 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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