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프리키야의 이브라힘 2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브라힘 2세는 875년부터 902년까지 이프리키야를 통치한 아글라브 왕조의 아미르이다. 그는 카이루안의 총독으로 행정을 수행하며 존경을 받았으나, 즉위 후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며 귀족을 숙청하고 잔혹한 통치를 펼쳤다. 이브라힘 2세는 경제 발전을 이루고 시칠리아를 정복하는 등 업적을 남겼지만, 잦은 살인과 가혹한 처벌로 인해 폭군으로 기록되었다. 902년 폐위된 후 이탈리아 원정을 떠났으나, 코센차 포위 중 사망했으며, 그의 통치는 아글라브 왕조의 쇠퇴와 파티마 왕조의 등장을 초래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이프리키야의 이브라힘 2세 | |
---|---|
기본 정보 | |
이름 | 아부 이샤크 이브라힘 2세 이븐 아흐마드 |
로마자 표기 | Abu Ishaq Ibrahim II ibn Ahmad |
아랍어 | أبو إسحاق إبراهيم بن أحمد |
통치 정보 | |
칭호 | 이프리키야의 에미르 |
통치 기간 | 875년 – 902년 |
이전 통치자 | 무함마드 2세 이븐 아흐마드 |
다음 통치자 | 아부 알아바스 압달라 |
생애 정보 | |
출생일 | 850년 6월 27일 |
사망일 | 902년 10월 23일 (52세) |
아버지 | 아부 이브라힘 아흐마드 이븐 무함마드 |
어머니 | 미상 |
배우자 | 미상 |
가문 | 아글라브 가문 |
군사 정보 | |
복무 기간 | 875년 – 902년경 |
주요 전투 | 시칠리아 아랍 정복 타오르미나 공성전 |
![]() |
2. 즉위 과정
무함마드 2세가 875년 2월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이브라힘은 대중과 법학자들의 지지를 받아 이프리키야의 아미르로 즉위했다.[45][2] 무함마드 2세는 경박하고 쾌락을 좋아하는 통치자였던 반면, 이브라힘은 카이루안 총독으로 임명되어 이 직무를 모범적이고 효율적으로 수행하여 많은 존경을 받았다.[1] 무함마드 2세의 아들인 어린 조카의 주장은 제쳐졌다.[2]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아부 이스학 이브라힘은 아글라브 왕조의 아흐마드의 아들로 태어났다.[44] 863년 아흐마드가 사망한 후 이프리키야의 통치권은 아버지의 형제인 지야닷 알라 2세에게 넘어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지야닷 알라 2세도 사망하였다.[44] 이후 이브라힘의 형제인 아부 이가라니그 무하마드 2세에게 통치권이 넘어갔다.[44]무함마드 2세는 경박하고 쾌락을 좋아하는 통치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간 동안 이브라힘은 카이루안(아글라브 왕조의 수도) 총독으로 재임하며 모범적이고 효율적으로 다스려 많은 감탄을 이끌어냈다.[44] 875년 2월 무함마드 2세가 급사하자 대중과 법무관의 지지 아래 이브라힘 2세로 즉위했다.[45]
2. 2. 무함마드 2세 치하에서의 역할
무함마드 2세는 경박하고 쾌락을 좋아하는 통치자였다.[1] 이브라힘 2세는 무함마드 2세의 재위 기간 동안 카이루안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이 직무를 모범적이고 효율적이며 진지하게 수행하여 많은 존경을 받았다.[1] 875년 2월, 무절제한 무함마드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이브라힘 2세가 아미르국을 계승했다. 그의 후보 지명은 군중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무함마드 2세의 어린 조카 대신 카이루안의 율법학자들의 지지를 받아 즉위했다.[2]2. 3. 즉위
무함마드 2세가 875년 2월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이브라힘은 대중과 법학자들의 지지를 받아 이프리키야의 아미르, 이브라힘 2세로 즉위했다.[45][2] 그의 형 무함마드 2세는 경박하고 쾌락을 좋아하는 통치자였던 반면, 이브라힘은 카이루안 총독으로 임명되어 이 직무를 모범적이고 효율적으로 수행하여 많은 존경을 받았다.[1] 무함마드 2세의 아들인 어린 조카의 주장은 제쳐졌다.[2]3. 통치와 업적
이브라힘 2세는 874년 전염병으로 피폐해진 왕국을 물려받았지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아글라브 왕조는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888년 ~ 889년에 화폐 개혁을 단행했고, 관개 시설을 확충하여 농업 생산성을 높였다. 이때 건설된 '아글라브 저수조'는 현재까지도 튀니지에서 사용되고 있다.[47] 그는 종교 경찰을 부활시켜 도로에서의 강도 행위를 근절하고 상업의 안전을 확보했으며, 화폐 개혁은 동부 칼리파조에서 귀금속 유입을 가져왔다.[3]
그는 튀니스 자이투나 모스크를 완공하고, 카이로우안의 우크바 모스크를 확장하는 등 다양한 공공 사업을 추진했다. 또한, 도시를 위해 대규모 저수조를 건설하고, 수스 성벽을 건설했으며, 이프리키야 해안을 따라 새로운 해군 감시탑을 설치하여 세우타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빠르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게 했다.[4]
이브라힘 2세는 중앙집권적 통치를 추구하며, 이프리키야의 옛 아랍 귀족 세력을 불신했다. 그는 매주 금요 예배(금요 기도) 후 라카다에서 일반 백성들의 청원을 직접 들었다. 귀족들이 평민들을 학대한다는 보고가 있으면, 가해자는 물론 가족 구성원에게도 엄격한 처벌을 내렸다.[7][51][52][53]
그는 군대 내 아랍 귀족 세력의 기반을 약화시키려 했다. 충성스러운 흑인 아프리카 노예 병사(''Abid'' 또는 "수단")들로 군대를 구성하여, 기존의 아랍 연대(''junds'')를 대체하고자 했다. 아랍 귀족들은 이브라힘 2세가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해 부과한 막대한 세금과 징발에도 불만을 가졌다.[54][55]
893년, 이브라힘 2세는 군사 개혁과 징발에 반발한 벨레즈마의 아랍 영주들을 라카다로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으나, 밤중에 이브라힘 2세의 경비대가 잠든 아랍 영주들과 그들의 수행원 약 1,000명을 기습하여 학살했다. 이 사건으로 튀니스를 중심으로 한 다른 아랍 영주들의 봉기가 촉발되었고, 893년 ~ 894년에 걸쳐 이프리키야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브라힘 2세는 자신의 수단 연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12]
3. 1. 경제 발전과 공공 사업
이브라힘 2세는 874년 전염병으로 피폐해진 왕국을 물려받았지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아글라브 왕조는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888년 ~ 889년에는 화폐 개혁을 단행했고, 관개 시설을 확충하여 농업 생산성을 높였다.[46] 이때 건설된 '아글라브 저수조'는 현재까지도 튀니지에서 사용되고 있다.[47] 그는 종교 경찰을 부활시켜 도로에서의 강도 행위를 근절하고 상업의 안전을 확보했으며, 화폐 개혁은 동부 칼리파조에서 귀금속 유입을 가져왔다.[3]그는 다양한 공공 사업을 추진했는데, 튀니스 자이투나 모스크를 완공하고, 카이로우안의 우크바 모스크를 확장했다. 또한, 도시를 위해 대규모 저수조를 건설하고, 수스 성벽을 건설했으며, 이프리키야 해안을 따라 새로운 해군 감시탑을 설치하여 세우타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빠르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게 했다.[4]
3. 2. 중앙집권화 정책
이브라힘 2세는 중앙집권적 통치를 추구하며, 이프리키야의 옛 아랍 귀족 세력을 불신했다. 그는 매주 금요 예배(금요 기도) 후 라카다에서 일반 백성들의 청원을 직접 들었다. 귀족들이 평민들을 학대한다는 보고가 있으면, 가해자는 물론 가족 구성원에게도 엄격한 처벌을 내렸다.[7][51][52][53]이브라힘 2세는 군대 내 아랍 귀족 세력의 기반을 약화시키려 했다. 그는 충성스러운 흑인 아프리카 노예 병사(''Abid'' 또는 "수단")들로 군대를 구성하여, 기존의 아랍 연대(''junds'')를 대체하고자 했다. 878년 라카다 건립 기념식에서 이브라힘 2세는 자신의 새로운 수단 경비대를 만들기 위해 전임자의 궁궐 경비대를 학살하기도 했다.[10] 이브라힘 2세는 수단 연대를 10,000명까지 확장했는데, 이는 아랍 ''jund'' 사령관들에게 큰 불만을 야기했다.[11] 아랍 귀족들은 이브라힘 2세가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해 부과한 막대한 세금과 징발에도 불만을 가졌다.[54][55]
3. 3. 군사 개혁과 귀족 숙청
이브라힘 2세는 중앙집권적 통치자로서 이프리키야의 옛 아랍 고위 귀족들을 불신했다.[51][52][53] 그는 귀족들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여러 정책을 펼쳤다. 878년에는 자신의 새로운 수단 경비대를 만들기 위해 전임자의 궁궐 경비대를 학살했다.[10]893년, 이브라힘 2세는 군사 개혁과 징발에 반발한 벨레즈마의 아랍 영주들을 라카다로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그러나 밤중에 이브라힘 2세의 경비대가 잠든 아랍 영주들과 그들의 수행원 약 1,000명을 기습하여 학살했다.[12]
벨레즈마 영주 학살 사건은 튀니스를 중심으로 한 다른 아랍 영주들의 봉기를 촉발시켰고, 893년 ~ 894년에 걸쳐 이프리키야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브라힘 2세는 자신의 수단 연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12]
4. 대외 관계
879년 ~ 880년경, 툴룬 왕조의 왕자 압바스가 아버지의 허락 없이 이프리키야를 침공했다. 압바스는 바르카에 도착하여 아바스 왕조 칼리프의 칙서를 위조, 이브라힘에게 이프리키야 총독직을 자신에게 넘기라는 거짓 메시지를 보냈다. 이집트 군대는 트리폴리까지 진격하여 현지 아글라브 왕조 총독을 격파했으나, 타헤르트의 루스타미드와 동맹을 맺은 나푸사족에게 패배했다.[13] 이브라힘 2세는 남쪽으로 급히 이동하여 툴룬 왕조의 행렬과 군자금을 압수했다.
896년 ~ 897년, 이브라힘 2세는 툴룬 왕조에 맞서 동쪽 국경을 회복하고 확보하기 위한 원정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이브라힘 2세는 트리폴리 총독이자 사촌인 무함마드를 처형하고,[14] 가베스 남쪽 마누에서 나푸사족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포로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15]
880년, 이브라힘 2세는 트리폴리 남서쪽 제벨 나푸사 산맥에서 나푸사족에게 패배했다. 당시 나푸사족은 타헤르트의 루스타미드와 동맹을 맺고 1세기 이상 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베르베르 하지파(이바디파) 부족이었다.[13] 896년에서 897년에 걸쳐 이브라힘 2세는 이프리키야 원정을 통해 마누(가베스 남쪽)에서 이바디파 나푸사족을 공격하여 그들의 독립적인 이맘국을 종식시켰다.[15]
이브라힘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시칠리아는 거의 정복되었다. 오랜 공방전 끝에 878년 5월 시라쿠사의 함락으로 시칠리아의 무슬림 정복은 거의 완료되었다.[24] 902년, 이브라힘 2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의 타오르미나를 함락시켜 시칠리아 정복을 완료했다.
4. 1. 이집트 툴룬 왕조와의 분쟁
879년 ~ 880년, 툴룬 왕조의 왕자 압바스는 아버지의 허락 없이 이프리키야를 침공했다. 압바스는 바르카에 도착하여 아바스 왕조 칼리프의 칙서를 위조, 이브라힘에게 이프리키야 총독직을 자신에게 넘기라는 거짓 메시지를 보냈다. 이집트 군대는 트리폴리까지 진격하여 현지 아글라브 왕조 총독을 격파했으나, 타헤르트의 루스타미드와 동맹을 맺은 나푸사족에게 패배했다.[13] 이브라힘 2세는 남쪽으로 급히 이동하여 툴룬 왕조의 행렬과 군자금을 압수했다.896년 ~ 897년, 이브라힘 2세는 툴룬 왕조에 맞서 동쪽 국경을 회복하고 확보하기 위한 원정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이브라힘 2세는 트리폴리 총독이자 사촌인 무함마드를 처형하고,[14] 가베스 남쪽 마누에서 나푸사족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포로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15] 바르카 국경의 아즈다비야에서는 15명의 적의 머리를 요리하여 먹었다고 한다.[16]
4. 2. 나푸사와의 분쟁
880년, 이브라힘 2세는 트리폴리 남서쪽 제벨 나푸사 산맥에서 나푸사족에게 패배했다. 당시 나푸사족은 타헤르트의 루스타미드와 동맹을 맺고 1세기 이상 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베르베르 하지파(이바디파) 부족이었다.[13]896년에서 897년에 걸쳐 이브라힘 2세는 이프리키야 원정을 통해 마누(가베스 남쪽)에서 이바디파 나푸사족을 공격하여 그들의 독립적인 이맘국을 종식시켰다.[15]
4. 3. 시칠리아 정복
이브라힘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시칠리아는 거의 정복되었다. 877년, 이브라힘 2세의 부관 자파르 이븐 무함마드 알타미니는 비잔틴 제국이 점령하고 있던 섬의 동부를 장악했다. 오랜 공방전 끝에 878년 5월 시라쿠사의 함락으로 시칠리아의 무슬림 정복은 거의 완료되었다.[24] 타오르미나, 카타니아와 몇몇 다른 전초 기지만 비잔틴 제국의 수중에 남아 있었다.888년, 재건된 아글라브 왕조 해군을 통해 이브라힘 2세는 칼라브리아 해안에 대규모 습격을 명령했다. 비잔틴 제국 함대는 레오 6세 황제에 의해 그들과 맞서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888년 9월 밀라초 해전에서 아글라브 왕조에 의해 파괴되었다.[29]
900년 여름, 이브라힘은 그의 아들 아부 알-아바스 압달라가 이끄는 원정군을 시칠리아에 파견했다. 900년 8월 초 마자라에 상륙한 아글라브 왕조 군대는 반란군이 점령한 트라파니를 포위했다.[33] 트라파니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한 시칠리아 아랍인들은 팔레르모로 후퇴했다. 아부 알-아바스 압달라는 군대를 모아 추격하여 900년 9월, 팔레르모 앞에서 시칠리아 군대를 격파했다. 시칠리아 반군은 팔레르모의 요새화된 성채로 후퇴하였으나, 900년 9월 18일 항복하였다.[35]
이듬해 (901년), 아부 알-아바스 압달라는 아글라브 왕조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에 남아 있는 비잔틴 제국 영토에 맞섰다. 데모나 (북동부)를 포위하던 중[36] 아부 압바스 압달라는 칼라브리아에 비잔틴 군대가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포위를 풀고 아글라브 왕조 군대를 메시나로 급히 이동시켜 해협을 건너 901년 6월 레조 칼라브리아 성벽 앞에 나타났다. 준비가 되지 않은 비잔틴 수비대는 도시를 버렸고, 아글라브 왕조는 레조를 점령했다.
902년, 이브라힘 2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의 타오르미나를 함락시켜 시칠리아 정복을 완료했다.
5. 잔혹한 통치와 폐위
이브라힘 2세는 단순한 폭군을 넘어 살인적인 가학증 환자라는 끔찍한 평판을 얻었으며, 잔혹함과 살인에서 큰 기쁨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그는 가족에게도 가혹하여 여러 명의 아내들을 잔혹하게 살해했고, 딸들이 태어나면 즉시 처형하도록 명령했다.[62] 이러한 끔찍한 이야기들은 그가 직접 또는 명령에 따라 저지른 처형, 납치, 강간, 고문의 일부에 불과하다.[63] 그의 잔혹성은 광기가 아닌 의도적인 것으로, 귀족, 군대, 도시, 부족을 희생시켜 절대주의를 추구한 결과로 해석되기도 한다.[64] 이러한 면에서 이브라힘 2세는 러시아의 이반 뇌제와 비견되기도 한다.[65][66]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무타디드는 이브라힘 2세의 잔혹 행위에 대한 보고를 받고, 902년 그를 소환하고 이프리키야 통치권을 박탈하는 명령을 내렸다.[81] 이브라힘 2세는 명령에 순응하여 아들 아부 알 압바스 압달라에게 권력을 양위하고 퇴위했다.[81]
5. 1. 살인적인 기행
이브라힘 2세는 단순한 폭군을 넘어 살인적인 가학증 환자라는 끔찍한 평판을 얻었다. 그는 잔혹함과 살인에서 큰 기쁨을 느꼈고, 종종 직접 처형을 집행하기도 했다.[61] 예를 들어, 저녁 식사에서 냅킨이 잘못 놓였다는 이유로 궁중 하인 300명을 처형하도록 명령했다.[61] 또한 경호원들 사이의 동성애 혐의를 듣고는, 관련자들의 머리를 직접 곤봉으로 부수고 산 채로 불태워 죽이도록 명령했다.[61]그는 가족에게도 가혹했다. 모호한 혐의만으로 8명의 형제와 자신의 아들 아부 알 아글라브를 처형했다. 여러 명의 아내들을 교살, 생매장, 사지 절단 등의 방법으로 잔혹하게 살해했다. 딸들이 태어나면 즉시 처형하도록 명령했으며, 16명의 딸들이 성인이 된 것을 알게 되자 연회를 열어 친절하게 맞이한 뒤 바로 참수했다. 어머니가 선물한 두 여성 노예의 잘린 머리를 쟁반에 담아 감사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62] 900년에는 자신과 어머니를 암살하려는 궁정 음모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궁궐의 모든 시종들을 죽였다.
이러한 끔찍한 이야기들은 그가 직접 또는 명령에 따라 저지른 처형, 납치, 강간, 고문의 일부에 불과하다.[63] 이러한 이야기 중 어느 정도가 사실이고, 얼마나 많은 부분이 조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브라힘 2세가 적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그러한 이야기를 퍼뜨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종종 정신 이상자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그의 잔혹성은 광기가 아닌 의도적인 것으로, 귀족, 군대, 도시, 부족을 희생시켜 절대주의를 추구한 결과로 해석되기도 한다.[64] 이러한 면에서 이브라힘 2세는 러시아의 이반 뇌제와 비견되기도 한다.[65][66]
5. 2. 정신 이상 논란
이브라힘 2세의 잔혹 행위는 정신 이상으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64][20]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의 잔혹성이 의도적인 통치 방식이었다고 분석하며, 러시아의 이반 뇌제와 비교하기도 한다.[64][65][66][22]5. 3. 폐위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무타디드는 이브라힘 2세의 잔혹 행위에 대한 보고를 받고, 902년 그를 소환하고 이프리키야 통치권을 박탈하는 명령을 내렸다.[81] 이브라힘 2세는 명령에 순응하여 진심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며 참회자의 옷을 입었다. 그는 불법적인 세금을 폐지하고, 감옥을 열고, 노예를 해방했으며, 자신의 금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이후 이브라힘 2세는 아들 아부 알 압바스 압달라에게 권력을 양위하고 퇴위했다.[81]6. 최후와 죽음
이브라힘 2세는 퇴위 후 바그다드로 가는 대신, 스스로를 무자히드라 칭하며 기독교에 맞서는 성전을 통해 죄를 씻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수스에서 자원병을 모아 군대를 조직하고, 유럽을 거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82]
902년 5월, 이브라힘 2세는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에서 더 많은 자원병을 모집했다. 그는 비잔틴 제국령 타오르미나로 진군하여 자르디니에서 비잔틴 군대를 격파했다.[83] 902년 8월 1일,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타오르미나 요새는 이브라힘 2세가 자원병에게 바다 쪽 바위 절벽을 오르게 하는 전략으로 함락되었다. 이로써 시칠리아 전체가 무슬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39]
902년 9월, 이브라힘 2세는 메시나를 통해 칼라브리아로 건너가 콘스탄티노플로 육로 행군을 시작했다. 이 소식은 이탈리아 남부에 공황을 불러일으켰으나,[84] 이브라힘 2세는 코센차 포위 중 이질에 걸려 902년 10월 23일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팔레르모 또는 카이로우안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85]
6. 1. 성전 선언과 이탈리아 원정
퇴위한 이브라힘 2세는 바그다드로 가는 대신, 스스로를 무자히드라 칭하며 기독교를 상대로 성전을 수행하여 자신의 죄를 씻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수스에서 자원병들을 모집하여 군대를 조직했는데, 이들은 유럽을 거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82]902년 5월, 이브라힘 2세의 군대는 시칠리아로 가서 팔레르모에서 더 많은 자원병을 모았다. 그는 여전히 비잔틴 제국의 수중에 있던 타오르미나로 진군하여, 자르디니에서 비잔틴 군대를 격파했다.[83] 난공불락처럼 보였던 타오르미나 요새는, 이브라힘 2세가 자원병들에게 바다 쪽 바위 절벽을 오르게 하는 전략을 통해 902년 8월 1일 함락되었다. 이로써 시칠리아 전체가 무슬림의 손에 들어갔다.[39]
902년 9월, 이브라힘 2세는 메시나를 거쳐 칼라브리아로 건너가 콘스탄티노플로 육로 행군을 시작했다. 이 소식은 이탈리아 남부에 공황을 불러일으켰으나,[84] 이브라힘 2세는 코센차 포위 중 이질에 걸려 902년 10월 23일 사망했다. 지휘권은 그의 손자 지야다트 알라에게 넘어갔고, 그는 원정을 중단하고 시칠리아로 돌아갔다.[85]
6. 2. 죽음
902년 10월 23일, 이브라힘 2세는 칼라브리아 북부의 코센차 포위 중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85] 그의 손자 지야다트 알라가 원정군 지휘권을 넘겨받아 즉시 포위 공격을 해제하고 군대와 함께 시칠리아로 돌아왔다. 이브라힘 2세의 유해는 팔레르모 또는 카이로우안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85]7. 평가와 영향
이브라힘 2세의 통치는 아글라브 왕조 쇠퇴의 시작점으로 평가된다. 그의 변덕스럽고 압제적인 통치는 백성들의 불만을 샀으며, 특히 893년 아랍 귀족 학살 사건은 이프리키야 전역의 봉기를 야기했다.[56] 이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군대의 연대감과 사기를 저하시켜 왕조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86]
7. 1. 아글라브 왕조의 쇠퇴
이브라힘 2세의 통치는 아글라브 왕조 쇠퇴의 시작을 알렸다. 그의 치세에 시칠리아 정복이 완료되었지만(878년 시라쿠사, 902년 타오르미나 점령), 변덕스럽고 압제적인 통치는 섬의 무슬림 공동체 사이에 내분과 분리주의를 초래했다.[86]더욱 중요한 결과는 이브라힘 2세가 아랍 귀족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것이었다. 893년, 이브라힘은 군사 개혁과 징발에 반대하는 아랍 영주들을 라카다(Raqqada)에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으나, 밤중에 그들을 학살했다.[56] 이 학살은 튀니스를 시작으로 이프리키야 전역에서 아랍 영주들의 봉기를 촉발시켰고, 893년부터 894년까지 이브라힘 2세의 통치 영역은 수도인 라카다로 축소되기도 했다. 이 반란은 이브라힘의 수단 연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지만,[56] 이 사건은 이프리키야 군대의 연대감을 무너뜨리고 사기를 떨어뜨렸다.[86] 이는 909년 아글라브 왕조가 멸망하고 파티마 왕조가 들어서는 데 큰 역할을 했다.[86][87]
7. 2. 파티마 왕조의 등장
이브라힘 2세의 통치는 아글라브 왕조 멸망의 시작이었다. 그의 변덕스럽고 가혹한 통치는 시칠리아 무슬림 공동체 사이에 내전과 분리주의를 불러일으켰다.[86]더욱 중요한 결과는 이브라힘 2세가 아랍 귀족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한 것이었다. 이는 이프리키야인들의 연대감을 무너뜨리고 사기를 저하시켰다. 902년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이브라힘의 마지막 원정을 위해 이프리키야 군대의 주력이 떠난 직후, 쿠타마족은 이스마일파 설교자 아부 압둘라 알시이에 의해 선동되어 봉기하였다.[42] 이들은 909년까지 이프리키야 전체를 점령하여 아글라브 왕조를 멸망시키고 파티마 왕조를 세웠다.[86][87]
8. 이브라힘 2세가 등장하는 작품
크루세이더 킹즈 3 게임에서 이브라힘 이븐 아흐마드 캐릭터로 등장한다.[1]
8. 1.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3에서 이브라힘 이븐 아흐마드 캐릭터로 등장한다.[1]출시년도 | 게임명 | 캐릭터 |
---|---|---|
2021년 | 크루세이더 킹즈 3 | 이브라힘 이븐 아흐마드 |
참조
[1]
서적
1987
[2]
서적
1858
[3]
서적
1858
[4]
서적
1858
[5]
서적
1858
[6]
서적
2009
[7]
서적
1876
[8]
서적
1858
[9]
서적
1858
[10]
서적
2001
[11]
서적
1987
[12]
서적
1876
[13]
서적
1998
[14]
서적
1858
[15]
서적
1876
[16]
서적
1978
[17]
서적
1876
[18]
서적
1876
[19]
서적
For a list of atrocities
1966
[20]
서적
1966
[21]
서적
2001
[22]
서적
1978
[23]
서적
2009
[24]
서적
1854
[25]
서적
1854
[26]
서적
1854
[27]
서적
2009
[28]
서적
1854
[29]
서적
1854
[30]
서적
1854
[31]
서적
1854
[32]
서적
1854
[33]
서적
1858
[34]
서적
2009
[35]
서적
1858
[36]
서적
[37]
서적
[38]
서적
[39]
서적
[40]
서적
[41]
서적
[42]
서적
[43]
서적
[44]
서적
[45]
서적
[46]
서적
[47]
뉴스
국민 98% 이슬람 믿지만 외국인 종교 자유 인정
http://www.jejumaeil[...]
제주매일
2017-02-01
[48]
서적
[49]
서적
[50]
서적
[51]
서적
[52]
서적
[53]
서적
[54]
서적
[55]
서적
[56]
서적
[57]
서적
[58]
서적
[59]
서적
[60]
서적
[61]
서적
[62]
서적
[63]
서적
[64]
서적
[65]
서적
[66]
서적
[67]
서적
[68]
서적
[69]
서적
[70]
서적
[71]
서적
2009
[72]
서적
1854
[73]
서적
1854
[74]
서적
1854
[75]
서적
1854
[76]
서적
1854
[77]
서적
1858
[78]
서적
2009
[79]
서적
1858
[80]
서적
1854
[81]
서적
1858
[82]
서적
1858
[83]
서적
1858
[84]
서적
1858
[85]
서적
1858
[86]
서적
1998
[87]
서적
196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