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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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한상은 1953년 이준의 차남으로 태어나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ROTC로 복무했다. 이후 삼풍그룹에 입사하여 삼풍건설 사장 및 삼풍백화점 사장을 역임했으나,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관련하여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2002년 출소했다. 출소 후 몽골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며, 2006년 종교적 발언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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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상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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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이한상 |
원어명 | 李漢相 |
로마자 표기 | I Hansang |
출생일 | 1953년 9월 10일 |
출생지 | 대한민국 |
직업 | 기업인, 선교사 |
학력 | 성서침례대학원대학교 목회학 석사 |
경력 | 삼풍건설 사장 삼풍백화점 사장 선교사 |
활동 기간 | 1991년 ~ 현재 |
2. 생애
1953년 이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1972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ROTC로 복무했다. 졸업 후 다른 기업에서 근무하다 1987년 무렵 삼풍그룹에 들어왔다.[1] 1989년 삼풍건설 및 삼풍백화점 전무가 되었고,[1] 1991년 직제 개편으로 삼풍건설 및 삼풍백화점 사장에 취임했으며, 전무는 동생이자 이준의 3남인 이한창이 맡았다.[1]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큰 타격을 입었다. 사고 이전부터 건물에 이상 징후가 여러 차례 발견되었고 수십 차례 경고가 있었지만, 이를 무시하고 영업을 강행했다. 특히 사고 직전 고객과 직원들에게 붕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임원들만 빠져나온 것에 대해 아버지 이준 회장과 함께 전국민적인 비난을 받았다.[1]
하지만 이는 언론의 오보였다. 이준 회장, 이한상 사장을 비롯한 삼풍 임원진은 당시 건물의 보수를 위해 백화점 건물 내에서 긴급 회의를 계속하고 있었다. 붕괴 당시에도 보수에 필요한 자재와 인력을 구하고 있었다. 다만, 무너진 A동 건너편 B동 건물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한상 사장은 건물 붕괴 당시 지진이 난 줄 알았다고 회상한다. 붕괴 이후 사건 현장에서 넋이 나가 있다가 구속되었다.([https://www.youtube.com/watch?v=t8i64-hEK7A&t=42s KBS 아카이브프로젝트 모던코리아 <시대유감, 삼풍>] 참고) 1996년 대법원 판결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2002년까지 수감되었다.[1]
2002년 출소 후 한동안 삼풍아파트 자택에서 칩거하였으나, 2003년부터 종교인 생활을 하기로 하고 몽골로 건너가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1]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상주였으나 귀국하지 못했다. 장남인 형 이한웅은 1977년에 사망했고, 이한상은 출국했으니 결국 3남 이한창이 상주를 맡았다.[1] 2006년 3월 3일 국민일보 인터뷰에서 자신의 범죄를 영적 전쟁으로 무마하는 발언을 해서 물의를 빚었다.[1]
2. 1. 출생 및 성장
1953년 이준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2. 2. 대학 생활 및 군 복무
그는 1972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후 ROTC로 복무했다고 알려져 있다.2. 3. 삼풍그룹 입사
이한상은 졸업 후 다른 기업에서 근무하다가 1987년 무렵 삼풍그룹으로 들어오게 되었다.[1] 1989년에는 삼풍건설 및 삼풍백화점의 전무가 되었고,[1] 1991년 직제 개편으로 삼풍건설 사장 및 삼풍백화점 사장에 취임했으며, 전무는 그의 동생이자 이준의 3남인 이한창이 맡게 되었다.[1]2. 4.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이한상은 큰 타격을 입었다. 사고 이전부터 건물에 이상 징후가 여러 차례 발견되었고 수십 차례의 경고가 있었지만, 이를 무시하고 영업을 강행했다. 특히 사고 직전 고객과 직원들에게 붕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임원들만 빠져나온 것에 대해 아버지 이준 회장과 함께 전국민적인 비난을 받았다.[1]하지만 이는 언론의 오보로 인한 오해였다. 이준 회장, 이한상 사장을 비롯한 삼풍 임원진은 당시 건물의 보수를 위해 백화점 건물 내에서 긴급 회의를 계속하고 있었다. 붕괴 당시에도 보수에 필요한 자재와 인력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다만, 무너진 A동 건너편 B동 건물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실제로 이한상 사장은 건물 붕괴 당시 지진이 난 줄 알았다고 회상한다. 그는 붕괴 이후 사건 현장에서 넋이 나가 있다가 바로 구속되었다.([https://www.youtube.com/watch?v=t8i64-hEK7A&t=42s KBS 아카이브프로젝트 모던코리아 <시대유감, 삼풍>] 영상 참고) 1996년 대법원 판결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2002년까지 수감되었다.[1]
2. 5. 출소 후 선교사 생활
이한상은 2002년 후반 출소한 뒤 한동안 삼풍아파트 자택에서 칩거하였으나, 이후 2003년 무렵부터 종교인 생활을 하기로 마음먹고 몽골로 건너가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1]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상주였으나 귀국하지 못했다. 장남인 형 이한웅은 1977년에 사망했고, 이한상은 출국했으니 결국 3남 이한창이 상주를 맡았다.[1] 그 뒤 2006년 3월 3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범죄를 영적 전쟁으로 무마하는 발언을 해서 물의를 빚었다.[1]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사망 |
---|---|---|
부친 | 이준 | 1922년 10월 21일 - 2003년 10월 4일 |
모친 | 조현옥 | 1926년 - |
형 | 이한웅 | 1950년 - 1975년 또는 1977년 |
형수 | 추경영 | 1950년 - |
남동생 | 이한창 | 1957년 - |
여동생 | 이경희 | 1959년 - |
3. 1. 가족 관련 추가 정보
이한상의 아버지 이준은 이한상이 구속된 후 출소하여 약 1년 뒤에 사망했는데, 이때 이한상은 상주였으나 몽골로 출국하여 남동생이 상주를 맡았다.[1] 어머니 조현옥은 2000년 당시 74세의 나이로 가석방을 요청했지만 거절되었다.[1] 여동생 이경희는 아버지, 작은오빠는 물론 큰오빠, 막내오빠에 비해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1]4. 비판 및 논란
이한상은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인해 아버지 이준 회장과 함께 전국민적인 비난을 받았다. 사고 전부터 건물 이상 징후와 경고가 있었음에도 영업을 강행했고, 사고 직전 임원들만 빠져나온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1]
하지만 이는 언론 오보로 인한 오해였다. 이준 회장과 이한상 사장을 비롯한 임원진은 건물 보수를 위해 백화점 내에서 회의를 계속하고 있었다. 붕괴 당시에도 보수 자재와 인력 수급을 위해 노력 중이었으며, 무너진 A동 건너편 B동에서 회의 중이었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한상 사장은 붕괴 당시 지진으로 착각했다고 회상하며, 사건 현장에서 바로 구속되었다.[1] 그는 1996년 대법원 판결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2002년까지 수감되었다.[1]
이후 이한상은 출소 후 몽골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며, 2006년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범죄를 영적 전쟁으로 무마하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1]
4. 1. 삼풍백화점 붕괴 책임
그는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직격탄을 맞게 되었다. 사고 전부터 건물 이상이 여러 차례 발견되었고 경고도 수십 차례 있었지만 무시하고 영업을 강행했다. 무엇보다 사고 직전 손님과 직원들에게 붕괴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임원들만 빠져나온 것에 대하여 아버지 이준 회장과 더불어 전국민적인 비난을 받았다.[1]하지만 이는 당시 언론의 오보로 인한 오해로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준 회장, 이한상 사장을 비롯한 삼풍의 임원진은 당시 건물의 보수를 위해 백화점 건물 내에서 긴급 회의를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붕괴 시점에도 그들은 보수에 필요한 자재와 인력을 수급하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다만, 무너진 A동 건너편의 B동 건물에서 회의를 하고 있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한상 사장은 건물 붕괴 당시를 회상하며 지진이 난 줄 알았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는 붕괴 이후 사건 현장에서 넋이 나가 있다가 그 자리에서 바로 구속되었다.[1] 이는 [https://www.youtube.com/watch?v=t8i64-hEK7A&t=42s KBS 아카이브프로젝트 모던코리아 <시대유감, 삼풍>]을 보면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1996년 대법원 판결로 그는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고, 2002년까지 수감되었다.[1]
4. 2. 종교적 발언 논란
이한상은 2002년 후반 출소한 뒤 한동안 삼풍아파트 자택에서 칩거하였으나, 이후 2003년경부터 종교인 생활을 하기로 마음먹고 몽골로 건너가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2006년 3월 3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범죄를 영적 전쟁으로 무마하는 발언을 하여 물의를 빚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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