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성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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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성 이사금은 신라의 제7대 이사금이다. 유리 이사금의 아들이거나 손자로 추정되며, 박씨 부인과 결혼하여 아달라 이사금을 두었다. 기마 이사금 사후 134년에 즉위하여 관청을 설치하고 농지 개간을 장려하는 등 내정을 다스렸다.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여 장령에 책을 설치하고 반란을 진압했으며, 154년에 재위 21년 만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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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 이사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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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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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 |
칭호 | 이사금 |
재위 기간 | 134년 - 154년 |
즉위 년도 | 134년 |
개인 정보 | |
휘 | 박일성 (朴逸聖) |
출생 | 미상 |
사망 | 154년 2월 |
능묘 | 미상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유리 이사금 |
어머니 | 이리생부인 박씨 |
배우자 | 아례부인 (지소례왕의 딸) |
자녀 | 아달라 이사금 |
기타 정보 | |
왕조 | 신라 |
가문 | 밀양 박씨 |
묘호 | 미상 |
시호 | 미상 |
2. 가계
일성은 유리 이사금의 아들이라는 설과 손자였다는 설이 있는데, 현대 학자들은 그가 유리 이사금의 손자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1] 그는 박씨 공주와 결혼했으며, 파사 이사금의 형이었다.
3. 치세
일성은 관청과 중앙 행정 건물을 짓고, 농지 개간을 명령했다. 또한 144년에는 백성들이 보석 등의 사치품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2]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북쪽의 말갈 부족의 침략이 여러 차례 있었다.[2] 146년에는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에 있는 조공국의 반란을 진압했다.
기마니이사금이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134년 8월에 사망하자, 일성이 왕위를 계승했다. 154년 2월, 재위 21년 만에 사망했으며, 매장지는 경주시 탑동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3. 1. 내정
144년 2월, 일성 이사금은 농업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 수리 시설을 정비하고 농지 개척을 장려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또한 백성들이 금, 은, 구슬 등의 사치품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검약령을 내렸다.[2] 147년 7월에는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인재를 추천하도록 신하들에게 명했다.3. 2. 국방
137년과 139년에 말갈의 침입으로 장령(長嶺)(함경남도 영흥군)[2]이 약탈당했다. 140년에는 장령에 책(柵)을 세워 말갈의 침입을 막으려 했으며, 142년에는 말갈 정벌을 시도했으나, 신하들의 진언에 의해 중지되었다.[3]146년에는 현재의 경상북도 경산시에 있는 조공국의 반란을 진압했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http://kdaq.empas.co[...]
[2]
웹사이트
천년 세월 속을 거닐다 028 신라 제7대 일성이사금
https://www.najeong.[...]
2024-03-25
[3]
문서
長嶺は複数の場所と見られる普通名詞的な用いられ方をされており、少なくとも靺鞨対応のための長嶺(咸鏡南道)と『三国史記』新羅本紀・炤知麻立干15年(493年)7月条に見られる倭人対応のための長嶺(金海市付近)の二箇所以上があったと考えられている。(→井上訳注1980)
[4]
서적
삼국유사 왕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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