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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달라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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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달라 이사금은 신라의 8대 이사금으로, 154년 2월에 즉위하여 184년 3월에 사망했다. 재위 기간 동안 계립령과 죽령의 길을 열어 영토를 확장하고, 백제와 대립하며, 왜와 교류했다. 165년에는 길선(吉宣)의 모반 사건으로 백제와 갈등이 심화되었고, 173년에는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가 사신을 보내왔다. 아달라 이사금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연오랑과 세오녀 전설과도 관련이 있으며, 사후에는 석씨인 벌휴 이사금에게 왕위가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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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달라 이사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칭호이사금
재위 기간154년 - 184년
즉위154년
이전 통치자일성 이사금
다음 통치자벌휴 이사금
아버지일성 이사금
어머니박 왕후
사망일184년
사망 장소신라
추존왕호아달라 이사금 (阿達羅尼師今)
개인 정보
박 (朴)
이름아달라 (阿達羅)
배우자내례부인

2. 생애

※다음 내용의 서기 연대와 왕의 치세에 대한 정보는 《삼국사기》에 근거한 것입니다.

154년 선왕이 사망하여 아달라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아달라 이사금 시대에는 북쪽의 말갈(및 그 배후의 고구려)에 대비하기 위해 신라와 백제는 느슨한 동맹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점차 교전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184년 아달라 이사금은 사망하였다. 사인은 기록되지 않았다. 재위 마지막 10년간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2. 1. 즉위 및 영토 확장

3년(156년) 계립령(鷄立嶺) 길을 열었고, 4년(157년) 2월에는 감물현(甘勿縣)과 마산현(馬山縣)을 설치했으며, 3월에 장령진(長嶺鎭)에 순행했다.[2] 5년(158년)에는 죽령(竹嶺) 길을 열었다.[2] 이로써 신라는 소백산맥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2]

12년(165년) 10월, 아찬 길선(吉宣)이 모반을 일으켰다가 발각되어 백제로 도망쳤다.[2] 아달라 이사금은 백제에 길선의 송환을 요구했으나, 백제가 거절하면서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2] 왕은 직접 백제를 공격했으나, 식량 부족으로 퇴각했다.[2] 14년(167년) 7월,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여 두 성을 함락하고 주민 1천 명을 잡아갔다.[2] 이에 아달라 이사금은 일길찬(一吉湌) 흥선에게 군사 2만 명을 주어 백제를 공격하게 하고, 자신도 8천 기병을 이끌고 한수(漢水)를 건넜다.[2] 백제는 사로잡았던 주민들을 돌려보내고 화친을 요청했다.[2]

17년(170년) 봄 2월에 시조묘(始祖廟)를 수리했다.[2] 10월에 백제가 다시 신라를 침공하였다.[2]

19년(172년) 정월에 구도(仇道)를 파진찬(波珍湌), 구수혜(仇須兮)를 일길찬으로 임명했다.[2] 구도는 훗날 김씨 최초로 신라 왕위에 오르는 미추의 아버지이다.[2]

20년(173년) 5월, 야마타이국(邪馬台國)의 여왕 히미코(卑彌乎)가 사신을 보내왔다.[2]

2. 2. 백제와의 갈등

165년 10월, 아찬 길선이 모반을 꾀하다 발각되어 백제로 도망쳤다. 아달라 이사금은 백제에 길선의 송환을 요구했으나, 백제 개루왕이 이를 거절하면서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2]

이에 아달라 이사금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으나, 백제군의 방어에 막혀 식량이 부족해 퇴각해야 했다. 167년 7월, 백제가 반격하여 신라의 두 성을 함락하고 주민 1천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8월, 아달라 이사금은 일길찬 흥선에게 2만 명의 군사를 주어 백제를 공격하게 하고, 자신도 8천 기병을 이끌고 한수까지 진격했다. 이에 백제는 포로로 잡았던 주민들을 돌려보내고 화친을 청했다.[2]

170년 10월, 백제가 다시 신라를 침공하면서 양국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2] 이후 잠시 직접적인 교전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다음 왕인 벌휴 이사금 대인 188년부터는 양국 간의 교전 기록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아달라 이사금 대부터 백제와의 갈등이 심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3. 왜와의 교류

158년 왜인들이 신라를 방문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2] 173년에는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가 사신을 보내왔다.[2] 가미가이토는 이토국(怡土国)의 "이츠히코"를 연오로 보았다. 즉, 신라의 이서국(현재의 청도군)에서 건너와 이 지역에 정착한 이츠히코는 야마토와 호쿠리쿠(北陸), 세토나이카이(瀬戸內海)의 세력과 대립하며 신라와 동맹을 맺었다. 이는 고대 한반도와 일본 간의 교류를 보여준다.[3][4]

2. 4. 기타

173년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가 사신을 보냈다.[2] 그러나 이 기록은 『삼국지』 동이전왜인조의 경초 2년(238년) 기사를 바탕으로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157년에는 연오랑 세오녀 설화가 일어났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2] 가미가이토는 이 설화에 등장하는 연오를 이토국(怡土国)의 "이츠히코"로 보았으며, 이는 고대 한반도와 일본 간의 교류를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된다.[3][4]

2. 5. 사망 이후

184년 봄 3월에 아달라 이사금은 사망하였다. 사인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내해 이사금이 아달라 이사금 사후 12년 만에 왕위에 오른 점, 그의 생모가 내례부인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매가 아달라 이사금의 아내 내례부인과 모종의 일이 있었고, 이에 아달라 이사금과 이매의 아버지 벌휴 이사금 사이에 내분이 있었고, 결국 아달라 이사금이 패배하여 살해당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의 재위 말기 10년 동안의 활동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아달라 이사금은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왕위는 석씨에 의해 계승되었다.

아달라 이사금의 무덤은 경주 남산 근처 삼릉 단지에 있는 박혁거세 계열의 두 왕의 무덤 옆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삼국사기』 신라본기・벌휴 이사금기에서는 아달라 이사금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벌휴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고 하지만, 훨씬 후대의 제53대 신덕왕은 아달라 이사금의 원손으로 여겨진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신화의 조작이거나 왕통 계보의 조작이며, 사료로서 논할 문제가 아니라고 이노우에 히데오는 말하고 있다.

3. 연오랑 세오녀 전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아달라 이사금의 치세에 있었던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의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전설에 따르면, 157년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일본으로 건너가자 신라에서 해와 달이 빛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관(日官)은 해와 달의 정기가 일본으로 갔기 때문이라고 해석했고, 아달라왕은 사신을 보냈지만 연오랑은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대신 세오녀가 짠 비단을 주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라고 했다. 사신의 말대로 제사를 지내자 해와 달이 돌아왔고, 신라는 비단을 국보로 삼고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불렀다.

3. 1. 전설의 내용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제1에는 아달라 이사금의 치세에 있었던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이름의 부부가 등장하는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부부로서 아달라왕 즉위 4년인 정유(157년)에 동해의 바닷가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닷가에 나가 해초를 따다 그가 서 있던 바위(물고기라고도 함)가 움직이더니 연오랑을 태운 채 그대로 일본으로 가버렸다. 일본 사람들은 연오랑을 보고 "이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라며 그들의 왕으로 옹립하였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기고 바닷가로 나가 남편을 찾아다니다가 바위 위에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발견했고, 세오녀가 그 바위에 올라가자 바위는 다시 움직여 세오녀를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은 놀라 연오랑에게 아뢰었고, 부부는 재회하여 세오녀는 왕인 연오랑과 함께 나란히 귀비(貴妃)가 되었다.

그런데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떠나고 없는 사이, 신라에서는 이 사라져 온통 암흑으로 뒤덮이는 괴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일관(日官)은 "우리나라에 있던 해(연오랑)와 달(세오녀)의 정기가 지금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일어난 것이다."라는 점괘를 내놓았다. 아달라왕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찾아 데려오게 했지만, 연오랑은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인데 이제 와서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는가. 나의 비가 짠 고운 명주가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다."라면서 세오녀가 짠 비단을 사신에게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 아뢰었고, 그 말대로 제사를 지내자 과연 신라에는 해와 달이 예전처럼 돌아왔다. 이후 신라에서는 그 비단을 왕의 창고에 잘 간직해 국보로 삼았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하였다고 한다.

4. 가계

삼국사기에 따르면 일성 이사금지소례왕의 딸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사후 후손이 없어 왕위가 석씨계의 벌휴 이사금에게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훗날 하대 신라의 신덕왕은 아달라왕의 먼 후손을 자처하였다.[7]

관계이름
부왕일성 이사금
모후지소례왕의 딸 박씨
왕후지마 이사금의 딸 내례부인 박씨


5. 아달라 이사금의 마지막 10년

삼국사기》에 따르면 174년부터 184년까지의 기록이 없다.

이 기간 동안 주요 의문이 제기된다. 박씨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석씨인 벌휴 이사금이 그 뒤를 이을 것을 고려할 때, 당시 신라 내에 상당한 혼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히, 내해 이사금의 어머니는 아달라 이사금의 왕후와 동일 인물인 내례부인(內禮夫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연도사건
173년봄, 정월미추 이사금의 아버지인 구도(俱道)를 파진찬(波珍湌: 17관등 중 4위)으로, 구수혜(仇須兮)를 일길찬(一吉湌: 17관등 중 7위)으로 임명했다.
173년봄, 2월시조묘에 문제가 생기고 전염병이 발생했다.
173년여름, 5월히미코가 사신을 보냈다.[5]
174년봄, 정월모래 폭풍과 함께 비가 내렸다.
174년봄, 2월우물이 말랐다.
184년봄, 3월왕이 사망했다.


6. 평가 및 의의

아달라 이사금의 재위 말기 10년 동안의 활동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는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석씨에 의해 왕위가 계승되었다.

아달라 이사금의 무덤은 경주 남산 근처 삼릉 단지에 있는 박혁거세 계열의 두 왕의 무덤 옆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7. 능묘

경주 남쪽 15리 배일산(拜日山)의 세 왕릉 중 제일 위에 있는 왕릉이 아달라 이사금의 능이고, 가운데는 신덕왕릉, 그 아래는 경명왕의 능이라고 한다. 아달라 이사금 재위 말기 10년 동안의 활동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는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석씨에 의해 왕위가 계승되었다.

아달라 이사금의 무덤은 경주 남산 근처 삼릉 단지에 있는 박혁거세 계열의 두 왕의 무덤 옆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참조

[1] 뉴스 https://www.yjinews.[...] 2024-03-23
[2] 웹사이트 두산백과 :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
[3] 서적 「延烏郞と細烏女」と天之日矛 福武書店 1990
[4] 문서 Iseoguk
[5] 문서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6] 문서
[7] 문서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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