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국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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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국찬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로, 청소년 대표팀 시절 1962년 AFC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3경기 5골을 기록하며 준우승을 이끌었다. 1970년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으나, 1970년 FIFA 월드컵 예선에서 페널티킥 실축으로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선수 은퇴 후 미국 뉴욕에 정착하여 한인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며, 2002년 FIFA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에 미국 대표팀 정보를 제공하고, 2006년 FIFA 월드컵에서는 미주 한인 응원단을 조직하여 거리 응원을 펼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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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국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임국찬 |
로마자 표기 | Lim Kukchan |
출생일 | 1940년 2월 15일 |
포지션 | 은퇴 (과거 윙어 / 공격형 미드필더) |
선수 경력 | |
청소년 클럽 연도 | ??? |
청소년 클럽 | 동북고등학교 |
클럽 연도 | ??? ??? |
클럽 | 양지 축구단 서울은행 |
국가대표팀 연도 | 1962 1966-1970 |
국가대표팀 | 대한민국 U-20 대한민국 |
국가대표팀 출장수 (골) | 3 (5) 11 (0) |
지도자 경력 | |
메달 | |
메달 | 대한민국의 선수 |
종목 | 축구 |
대회 | AFC U-20 아시안컵 |
세부 대회 | 1962 태국 |
성적 | 준우승 |
대회 | 아시안 게임 |
세부 대회 | 1970 방콕 |
성적 | 금메달 |
2. 선수 시절
임국찬은 청소년 대표팀 시절 1962년 AFC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3경기 5골을 기록하며 팀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성인 대표팀 소속으로는 1970년 FIFA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에서 호주를 상대로 페널티킥을 실축하여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이후 1970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획득했으나, 양지 축구단 해체와 계속되는 비난으로 1972년 선수 생활을 조기에 마감했다.[1]
2. 1. 국가대표팀 경력
청소년 대표팀 시절 1962년 AFC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3경기 5골을 기록하며 팀의 준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성인 대표팀 소속으로 호주와의 1970년 FIFA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 1라운드 최종전에서 1-1로 맞서던 후반전에 이회택 현 김포 FC 기술 고문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실축하면서 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난을 받았다.[1]이듬해 1970년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으나, 양지 축구단 해체 이후 서울은행에서 뛰다가 1972년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1]
2. 2. 선수 생활 은퇴
양지 축구단이 해체된 후 서울은행 축구단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가 1972년에 은퇴하였다. 이후 은행원으로 근무했으나, 1970년 FIFA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에서의 페널티킥 실축에 대한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1980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1]3. 은퇴 이후
은퇴 후 미국 뉴욕에 정착하여 한인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특히 2002년 FIFA 월드컵과 2006년 FIFA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지원했다.[1]
3. 1. 대한민국 축구 지원 활동
2002년 FIFA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이 미국과 D조 조별리그 2차전에서 맞붙게 되자 미국 대표팀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대한축구협회에 제공하며 대한민국 대표팀의 4강 신화에 기여했다.[1] 2006년 FIFA 월드컵에서는 미주 한인 응원단을 직접 조직하여 월드컵 개최국인 독일로 건너가 거리 응원을 펼치기도 했다.[1]4. 수상
임국찬은 선수 시절 다음과 같은 수상을 기록했다.
대회 | 결과 | 비고 |
---|---|---|
메르데카컵 | 우승 | 1967[1], 1970[1] |
킹스컵 | 우승 | 1969[1], 1970[1] |
박대통령컵 | 우승 | 1971[1] |
4. 1. 국가대표팀
대회 | 결과 | 비고 |
---|---|---|
AFC U-20 아시안컵 | 준우승 | 1962[1] |
아시안 게임 | 금메달 | 197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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