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일 (19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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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수일은 1944년 경기도 출신으로, 축구 선수, 지도자, 행정가로 활동했다. 한양공고와 금성방직, 해병대, 외환은행, 포항제철 등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대한민국 U-20 대표팀과 국가대표팀 선수로도 활약했다. 은퇴 후에는 포항제철 코치, 숭실대 감독, 국가대표 B팀 감독 등을 역임했고, 대한축구협회 이사 및 한국고교축구연맹 회장 등을 지냈다. 2008년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박수일 (1944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박수일
한자 표기朴秀一
로마자 표기Bak Suil
출생일1944년 4월 25일
출생지일제강점기 경기도
사망일2008년 1월 10일
사망지서울특별시
신장1.66m
포지션공격수 (과거), 감독
선수 경력
청소년 클럽한양공업고등학교
대학교 클럽국민대학교
클럽1964-1966: 금성방직 축구단
1967-1969: 해병대 축구단
1969-1972: 외환은행 축구단
1973-1977: POSCO Atoms
국가대표 경력
국가대표팀1964: 대한민국 U-20
1965-1971: 대한민국
국가대표 출장 및 득점21경기 3골
지도자 경력
감독1978-1980: POSCO Atoms (트레이너)
1980-1985: POSCO Atoms (감독)
1986-1991: 숭실대학교
1988: 대한민국 B
1992: 한국대학축구연맹 (이사)
기타 지도자 경력한국초교축구연맹 (부회장)
2000-2002: 포항 스틸러스 (스카우트)
2003-2008: 대한축구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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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수 경력

박수일은 일제강점기 경기도에서 태어나 한양공고에서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62년 아시아축구연맹 U-19 선수권 대회 우승팀인 태국과의 친선 경기에 출전했으며, 1964년 금성방직 축구단에 입단했다. 1965년 대한민국 준프로 축구 리그에서 육군 병참단 축구단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고, 국민대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병행했다. 1966년 서울 선발팀 선수로 JP컵 중일 축구대회에 참가하여 중화민국 주광팀을 상대로 득점을 올리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1967년 해병대 축구단에 입단, 1969년 제대 후 1970년 한국외환은행 축구단으로 이적했다. 동남아시아 순회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했고, 대한민국 전국 축구 선수권 대회 8강전 한국산업은행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연장 3차전 동점골을 넣었지만, 육군 축구단에 패했다. 1971년 국무총리배 금융클럽 축구대회 우승에 기여했지만, 관중과 언쟁을 벌이는 등의 행동으로 경고를 받았다. 1972년 국무총리배 금융클럽 축구대회 8강, 국민은행을 상대로 득점을 기록했지만, 팀은 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다.

1973년 포항제철 축구단 창단 멤버로 합류, 닛폰 스틸을 상대로 팀의 첫 골에 기여했다. 1974년 대한민국 대통령배 전국 축구 대회 결승전에서 이회택의 결승골을 어시스트, 1975년 전국 실업 축구 연맹 춘계 대회에서 공군 축구단을 상대로 안기헌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여 포항제철의 우승을 도왔다. 농업협동조합 축구단을 상대로 김호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했지만, 포항제철은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고, 시즌 종료 후 은퇴 계획 없이 다음 시즌을 준비했다. 1976년 조흥은행을 상대로 최상철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했지만, 8강에서 서울신탁은행에 패했고, 1977년 은퇴를 발표했다.

1964년 1964년 AFC U-19 선수권 대회에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참가하여 태국과의 경기에서 득점, 말레이시아에 패했다. 같은 해 머드카컵 친선 경기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B팀으로 참가, 최종 엔트리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1965년 1966년 FIFA 월드컵 예선 통과에 기여,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대한축구협회의 문제로 예선에 불참했다. 같은 해 머드카컵에 선발, 태국과의 경기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정식 데뷔전을 치렀다. 1966년 1966년 아시안 게임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선수촌 무단 이탈로 2년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고, 1967년 징계가 해제되었다.

1969년 유럽 원정 중 부상, 1970년 FIFA 월드컵 예선 명단에 포함, 정병탁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 일본과의 첫 경기에서 추가골, 호주와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기록했으나 1970년 FIFA 월드컵 진출에 실패했다.

1970년 국가대표팀 이원화 정책에 따라 A팀(청룡팀)에 포함, CR 플라멩구, 올라리아 아틀레티쿠 클루비, 볼드클럽벤 1903과의 친선 경기에서 득점했다. 머드카컵 싱가포르와의 경기에서 서윤찬의 연장골을 어시스트, 복통으로 치료를 받아 결승전에 출전하지 못했다. SL 벤피카와의 친선 경기에 참가, 국가대표팀 예비 명단에 포함되었다. 1970년 아시안 게임 최종 명단에 포함, 태국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하며 대한민국의 우승에 기여했다.

1971년 라틴 아메리카 원정 친선 경기 국가대표팀 명단에 포함, 아르헨티나 U-23과의 친선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했다. 코리아컵 태국과의 경기에서 박이천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국가대표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던디 유나이티드 FC와의 친선 경기에서 동점골을 기록, 1972년 하계 올림픽 예선에 선발되었으나 발 부상으로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고, 1972년 킹스컵 최종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2.1. 클럽

박수일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출신으로 한양공업고등학교 재학 시절 축구 선수로 활약했으며, 1962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태국 대표팀과 한양공업고등학교의 친선경기에 출전하였다. 1964년 금성방직 축구단에 입단하였고, 1965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 육군 병참단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쳐 팀의 공동 우승에 공헌하였다. 1966년에는 '서울선발팀'의 일원으로 'JP컵 한중일 축구대회'에 참가해 중화민국의 쥐광 팀을 상대로 득점에 성공하는 등 팀의 대회 우승에 일조했다.

1967년 해병대 축구단에 입대했으며, 1969년 제대 후 외환은행 축구단으로 이적하였다. 1970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8강전에서 산업은행 축구단과의 3차 연장전에서 동점골을 기록해 팀의 추첨승에 기여했으나, 팀은 육군 축구단과의 4강전에서 패배하였다. 1971년 국무총리배 금융단 축구대회에서 팀의 대회 우승에 일조했으나, 한국실업축구연맹으로부터 경고 처분을 받았다. 1972년 국무총리배 금융단 축구대회에서 4강전에서 패배했으며,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 당시 국민은행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득점포를 쏘아올렸으나 팀은 결승 리그에 진출하지 못했다.

1973년 포항제철 축구단 창단 원년 멤버로 합류했으며, 1974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결승전에서 이회택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팀의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1975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 대회 우승에 일조했으며, 같은 해 '한일 친선 실업축구대회'에서 추가골을 득점하였다.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 활약했으나 팀은 우승에 실패했으며, 1976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 4강전에서 패배했다. 1977년 선수 은퇴를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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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1964년 ~ 1966년금성방직 축구단
1967년 ~ 1969년해병대 축구단
1969년 ~ 1972년외환은행 축구단
1973년 ~ 1977년포항제철 축구단

2.2. 국가대표팀

1964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대한민국 U-20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며, 태국과의 경기에서 득점과 동시에 패널티킥을 얻어내며 팀의 2-0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대표팀은 말레이시아와의 4강전에서 패배해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같은 해 국가대표 B팀으로 구성된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선수 선발 대회에 출전해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최종 선발되지 못했다.

1965년에는 1966년 FIFA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벌어진 제1차 선발전 및 제2차 선발전에서 연달아 소속팀의 우승에 기여하였고, 이러한 활약으로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대한축구협회 측에서 예선 불참을 결정함에 따라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같은 해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도 선발되었으며, 8월 14일 태국과의 그룹 결정전에 출전하여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1966년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선수 후보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최종 선발되지 못했으며, 1966년 아시안 게임 선수 선발 대회에서는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대회 도중 선수촌에서 무단 이탈한 뒤 여자를 동반하고 복귀한 사실이 적발되어 대한축구협회로부터 2년간 선수 자격 정지의 중징계를 받았고, 1년여 뒤인 1967년 상벌위원회의 결정으로 징계가 해제되었다.

1969년 유럽 원정 도중 부상을 당했으며, 1970년 FIFA 월드컵 예선 명단에 들어간 이후 국가대표 B팀과의 평가전에서 정병탁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일본과의 첫 번째 경기에서 추가골을 득점하는 활약을 보였으나 대표팀은 2-2 무승부를 기록했으며, 얼마 뒤 열린 오스트레일리아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 선제골을 기록하는 활약을 펼쳤으나 대표팀은 1-1 무승부로 경기를 마감하며 1970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

1970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이원화 원칙에 따라 국가대표 B팀이 신설되자 박수일은 A팀인 청룡팀에 포함되었으며, 직후 펼쳐진 CR 플라멩구와의 평가전에 출전해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해 열린 올라리아 AC와의 평가전에서 팀의 선제골에 관여하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고, 뒤이어 치러진 B 1903과의 2차 평가전에서 선제골을 성공시키며 뛰어난 모습을 선보였다. 같은 해 개최된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하였고, 싱가포르와의 경기에서 서윤찬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하지만 인도와의 4강전을 앞두고 위경련이 발병해 치료를 받았으며, 결국 그 여파로 4강전 및 버마와의 결승전에는 나서지 못했다. 얼마 뒤 성사된 SL 벤피카와의 평가전에도 참여했으며, 그 해 이원화 원칙이 다시 폐지되어 국가대표팀이 하나로 통합됨에 따라 박수일은 국가대표팀 예비 명단에 포함되었다. 같은 해 개막한 1970년 아시안 게임 최종 명단에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선발되었으며, 태국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득점하는 등 국가대표팀의 대회 공동 우승에 공헌하였다.

1971년 국가대표팀의 중남미 전지훈련 명단에 포함되었고, 아르헨티나 U-23 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 만회골을 넣었다. 그 해 개최된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에도 참가하였고, 태국과의 경기에서 박이천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국가대표팀의 우승에 일조하였다. 얼마 뒤 있었던 던디 유나이티드 FC와의 평가전에 출전해 동점골을 성공시키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으나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고, 같은 해 열린 1972년 하계 올림픽 예선에도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선발되었다. 하지만 발 부상으로 인해 경기에 투입되지 못했으며, 그 여파로 직후 펼쳐진 킹스컵의 최종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3. 지도자 경력

1980년 선수 은퇴 후 포항제철 축구단의 트레이너로 서독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1981년 포항제철 코치로 한홍기 감독을 보좌하며 팀의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1982년 팀의 수석 코치였던 조윤옥이 팀을 떠나자 그 자리를 대신했으며, 그 해 팀의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우승을 이끌고 지도자 코치상을 받았다. 1983년 올스타전에서 아마추어팀 코치를 맡았고, 1985년 약 15년간 구단에서 선수 및 코치 생활을 정리하고 사임하였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숭실대학교 감독을 맡았고, 1992년 한국대학축구연맹 이사로 선임되었다. 1988년 대한민국 국가대표 B팀 감독으로 임명되어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했으나, 3패로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하였다.

이후 한국초교축구연맹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2002년까지 포항 스틸러스 스카우트로 활동하며 옐라를 영입하기도 했다. 2003년부터 대한축구협회 이사 및 상벌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2005년 한국고교축구연맹 회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4. 사망

2005년 포항시에서 서울특별시로 거주지를 옮겼으며, 2008년 1월 10일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5. 기타

금성방직 축구단에서 활약하던 시절 국민대학교에 진학해 학업을 병행하였다.

딸 박지아는 배우로 활동했으나 2024년 9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1988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을 앞두고 진행된 40대 올스타전에 나섰으며, 2006년 '한국 OB 지회 축구대회'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다수의 '경평 OB 대항축구전'에 '서울 OB팀'의 일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2000년에 금성방직 축구단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쌍용 OB회'의 일원으로 김용식을 추모하기 위한 사업 및 행사를 추진하였다.

2003년 베스트일레븐 창간 33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한국축구 100년을 빛낸 55인' 중 '60년대 베스트11'에 포함되었다.

2005년 개최된 한국중등축구연맹전 춘계 대회가 포항시에서 개최되도록 축구계 관계자들을 설득하였고, 한국중등축구연맹의 승인으로 포항시에서 치러지게 되었다.

2006년 문화방송에서 2006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방영한 영상실록 '한국 축구가 간다'에 출연하였다.

2007년에 양지 축구단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국가정보원을 방문해 2007년 FIFA U-17 월드컵 참가 목적으로 서울특별시에 체류하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U-17 국가대표팀과의 만남에 대한 주선을 요청하기도 했다.

6.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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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팀대회결과
금성방직 축구단전국축구선수권대회준우승 (1965)
금성방직 축구단전국실업축구연맹전우승 (1964 춘계)
우승 (1964 추계)
우승 (1965 춘계)
해병대 축구단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우승 (1969)
외환은행 축구단전국실업축구연맹전준우승 (1971 춘계)
외환은행 축구단국무총리배 금융단 축구대회우승 (1971)
준우승 (1969)
외환은행 축구단대통령배 금융단 축구대회우승 (1971)
포항제철 축구단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우승 (1974)
포항제철 축구단전국실업축구연맹전우승 (1975 춘계)
준우승 (1977)
포항제철 축구단전국축구선수권대회준우승 (1977)
국가대표팀아시안 게임 축구우승 (1970)
국가대표팀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우승 (1965, 1970)
국가대표팀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우승 (1971)
포항제철 축구단 (코치)수퍼리그준우승 (1985)
포항제철 축구단 (코치)전국실업축구연맹전우승 (1981 추계)
우승 (1982)
포항제철 축구단 (코치)전국축구선수권대회준우승 (1985)
포항제철 축구단 (코치)전국체육대회우승 (1985)
준우승 (1982)
개인 수상
1982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지도자 코치상
1982년 대한민국 준프로 축구 리그 감독상

6.1. 클럽

1964년 금성방직 축구단에 입단하였고, 1965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 육군 병참단 축구단과의 경기에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뛰어난 활약으로 팀의 공동 우승에 기여하였다. 1966년 '서울선발팀'의 일원으로 'JP컵 한중일 축구대회'에 참가해 중화민국의 쥐광 팀을 상대로 득점하며 팀의 대회 우승에 일조했다.

1967년 해병대 축구단에 입대하였으며, 1969년 제대 후 외환은행 축구단으로 이적하였다. 1970년 금융단축구협의회에서 조직한 금융단 축구 대표팀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동남아시아 순회 경기에서 싱가포르 군경합동팀, 일본 청소년 대표팀을 상대로 득점하였다. 같은 해 전국축구선수권대회 8강전에서 산업은행 축구단과의 3차 연장전에서 동점골을 기록해 팀의 추첨승에 기여했으나, 팀은 육군 축구단과의 4강전에서 패배하였다. 1971년 국무총리배 금융단 축구대회에서 공격 포인트를 기록해 팀의 대회 우승에 일조했으나, 한국실업축구연맹으로부터 경고 처분을 받았다. 1972년 국무총리배 금융단 축구대회에서 활약했으나 팀은 주택은행 축구단과의 4강전에서 패배했으며,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 국민은행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득점했으나 팀은 결승 리그에 진출하지 못했다.

1973년 5월 3일 포항제철 축구단 창단 원년 멤버로 합류했으며, 신일본제철 축구단과의 '한일 친선 실업축구대회'에서 팀의 선제골에 관여하였다. 1974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결승전에서 이회택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여 팀 우승에 기여했으며, '실업 올스타'의 일원으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상비군과의 시범경기에 출전하였다. 1975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 대회에서 안기헌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여 팀의 대회 우승에 일조했으며, '한일 친선 실업축구대회'에서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추가골을 득점하였다.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 김호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했으나 팀은 우승에 실패했으며, 시즌 종료 후 다음 시즌을 준비하였다. 1976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 최상철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했으나 팀은 서울신탁은행 축구단과의 4강전에서 패배했으며, 1977년 선수 은퇴를 선언하였다.

* 1964년 ~ 1966년: 금성방직 축구단
* 1967년 ~ 1969년: 해병대 축구단
* 1969년 ~ 1972년: 외환은행 축구단
* 1973년 ~ 1977년: 포항제철 축구단

6.2. 국가대표팀

1964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대한민국 U-20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며, 태국과의 경기에서 득점과 동시에 패널티킥을 얻어내며 팀의 2-0 승리에 기여했다. 그러나 대표팀은 말레이시아와의 4강전에서 패배했다. 같은 해 국가대표 B팀으로 구성된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선수 선발 대회에 출전했으나, 최종 선발되지 못했다.

1965년 1966년 FIFA 월드컵 예선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대한축구협회의 예선 불참 결정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같은 해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선발되어, 8월 14일 태국과의 그룹 결정전에 출전하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1966년 1966년 아시안 게임 선수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대회 도중 선수촌 무단 이탈 및 여자 동반 복귀 사실이 적발되어 대한축구협회로부터 2년간 선수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 1년여 뒤인 1967년 징계가 해제되었다.

1969년 1970년 FIFA 월드컵 예선 명단에 포함되었고, 일본과의 첫 경기에서 추가골을 기록했으나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 선제골을 기록했으나 1-1 무승부로 1970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1970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이원화 원칙에 따라 A팀인 청룡팀에 포함되었으며, CR 플라멩구, 올라리아 AC, B 1903와의 평가전에 출전해 좋은 모습을 보였다. 같은 해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하여, 싱가포르와의 경기에서 서윤찬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했다. 인도와의 4강전을 앞두고 위경련으로 4강전 및 버마와의 결승전에 나서지 못했다. SL 벤피카와의 평가전에도 참여했으며, 그 해 국가대표팀이 하나로 통합됨에 따라 예비 명단에 포함되었다. 1970년 아시안 게임 최종 명단에 선발되어, 태국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하는 등 대표팀의 공동 우승에 공헌하였다.

1971년 국가대표팀의 중남미 전지훈련 명단에 포함되었고, 아르헨티나 U-23 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 만회골을 넣었다.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에서 태국과의 경기에서 박이천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국가대표팀의 우승에 일조하였다. 던디 유나이티드 FC와의 평가전에서 동점골을 기록했으나 팀은 패배했고, 1972년 하계 올림픽 예선에 선발되었으나, 발 부상으로 경기에 투입되지 못했으며, 킹스컵 최종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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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대회비고
1964년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U-20 국가대표
1965년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국가대표
1966년1966년 아시안 게임 축구국가대표
1969년1970년 FIFA 월드컵 예선국가대표
1970년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국가대표
1970년1970년 아시안 게임 축구국가대표
1971년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국가대표
1971년1972년 하계 올림픽 축구 예선국가대표
국가대표팀 통산 기록 || 21경기 3골

6.3. 감독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숭실대학교 감독을 맡았다. 1988년 대한민국 국가대표 B팀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같은 해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했으나, 3패를 기록하며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하였다.

6.4.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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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팀대회결과
금성방직 축구단전국축구선수권대회준우승 (1965)
금성방직 축구단전국실업축구연맹전우승 (1964 춘계)
우승 (1964 추계)
우승 (1965 춘계)
해병대 축구단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우승 (1969)
외환은행 축구단전국실업축구연맹전준우승 (1971 춘계)
외환은행 축구단국무총리배 금융단 축구대회우승 (1971)
준우승 (1969)
외환은행 축구단대통령배 금융단 축구대회우승 (1971)
포항제철 축구단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우승 (1974)
포항제철 축구단전국실업축구연맹전우승 (1975 춘계)
준우승 (1977)
포항제철 축구단전국축구선수권대회준우승 (1977)
국가대표팀아시안 게임 축구우승 (1970)
국가대표팀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우승 (1965, 1970)
국가대표팀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우승 (1971)
포항제철 축구단 (코치)수퍼리그준우승 (1985)
포항제철 축구단 (코치)전국실업축구연맹전우승 (1981 추계)
우승 (1982)
포항제철 축구단 (코치)전국축구선수권대회준우승 (1985)
포항제철 축구단 (코치)전국체육대회우승 (1985)
준우승 (1982)
개인 수상비고
1982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지도자 코치상
1982년 대한민국 준프로 축구 리그 감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