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탁
1. 개요
정병탁은 1960년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1969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연세대학교, 해병대 축구단, 양지 축구단, 한국신탁은행 축구단 등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1969년 아시안 챔피언 클럽 토너먼트 준우승, 1964년 AFC 아시안컵 3위, 1967년과 1970년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우승, 1969년 킹스컵 우승 등의 기록을 남겼다. 은퇴 후에는 연세대학교 감독, 전남 드래곤즈 감독 등을 역임했고, 1984년과 1989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및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했다. 2016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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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정병탁 |
|---|---|
| 한글 | 정병탁 |
| 한자 | 丁炳卓 |
| 로마자 표기 | Jeong Byeong-tak |
| 출생일 | 1942년 3월 14일 |
|---|---|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읍 |
| 사망일 | 2016년 2월 10일 |
| 사망지 | 대한민국 경기도 고양시 |
| 키 | 173cm |
| 포지션 | 공격수 |
| 유소년 클럽 | 배재고등학교, 연세대학교 |
|---|---|
| 클럽 | 양지 축구단, 신탁은행 축구단 |
| 국가대표팀 | 대한민국 |
|---|---|
| 국가대표팀 연도 | 1963년-1970년 |
| 국가대표팀 출장수 (골) | 39 (11) |
| 감독 연도 | 1980년-1981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1984년-1993년 (연세대학교) 1985년-1986년 (대한민국 U-20) 1989년 (한국대학축구연맹 기술이사) 1994년 (대한축구협회 상벌위원장) 1994년-1996년 (전남 드래곤즈) 1995년 (대한민국) |
|---|---|
| 감독 클럽 | 연세대학교, 대한민국, 전남 드래곤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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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 -
모르데하이 슈피글레르
모르데하이 슈피글레르는 이스라엘의 전직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선수 시절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며 여러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맹활약했고 은퇴 후 감독으로서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UEFA 주빌리 어워드에서 최고의 이스라엘 선수로 선정되었다. -
1964년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 -
이유형
황해도 신천군 출신인 이유형은 대한민국 축구인, 언론인, 지도자로, 선수 시절 일본 대표로 활동했으며, 1956년 AFC 아시안컵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우승을 이끌었고, 서울신문과 경향신문에서 체육부장, 대한축구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축구 발전에 기여했다. -
연세대학교 축구부의 축구 감독 -
김준현 (축구인)
김준현은 1989년 유공 코끼리 소속으로 K리그 우승을, 1991년에는 K리그 도움왕을 수상한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이다. -
연세대학교 축구부의 축구 감독 -
김호곤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이자 지도자인 김호곤은 국가대표 선수로 1978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부산 아이파크와 울산 현대 감독을 거쳐 2012년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2004년 아테네 올림픽 8강 진출,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및 기술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
1968년 AFC 아시안컵 선수 명단 -
정국진 (축구인)
정국진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로, 선수 및 지도자 경력 등 축구와 관련된 활동을 한다. -
1968년 AFC 아시안컵 선수 명단 -
이세연 (축구인)
이세연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이며, 프로 선수 경력과 국가대표 경력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일제강점기 당시 전라남도 여수읍 출신으로 여수서초등학교, 여수중학교, 배재고등학교를 거쳤으며, 1963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65년 와세다 대학과의 정기전에서 선제골을 기록하고, 전국대학축구연맹전 춘계 대회에서 여러 차례 공격 포인트를 기록해 팀의 대회 준우승에 기여하였다. 1966년 연고전에서 패널티킥 선제골을 성공시켰으며, 전국대학축구연맹전 추계 대회 중앙대학교와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득점하는 등 활약으로 팀의 공동 우승에 공헌하였다.
1967년 해병대 축구단에 입단 후 양지 축구단에 편입되었으며, 해병대와 양지의 이중 등록 논란이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양지 소속으로 출전하였다. 아시안 챔피언 클럽 토너먼트 1967 출전팀 선발 대회에서 활약했으나, 팀은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 1968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 대회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팀은 우승에 실패했으며, 아시안 챔피언 클럽 토너먼트 1969 참가 명단에 포함되어 본선에 참여하였다. 본선에서 라이온스 FC와 베트남 경찰 축구단을 상대로 득점과 어시스트를 기록하고, 도요 공업과의 4강전에서 배김수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며 대회 준우승을 이끌었다.
1970년 양지 해체 이후 한국신탁은행 축구단에 합류하여 금융단 축구 대표팀의 일원으로 동남아시아 순회 경기에 참여,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일본 팀을 상대로 득점하였다.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활약했으나 주택은행 축구단과의 4강전 승부차기 실축으로 팀은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며 팀의 준우승에 공헌하였다.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판정에 항의하다 경고를 받기도 했다.
1971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 대회에서 팀을 결승 리그로 이끌었으며, 팀은 창단 후 최초로 공식 대회 우승을 차지하였다. 추계 대회에서도 득점포를 올리며 팀의 준우승에 일조했다.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상업은행 축구단과 조홍은행 축구단을 상대로 득점하며 팀의 일반부 우승에 기여했으나, 대학부 우승팀인 고려대학교에 패해 준우승했다. 전국축구선수권대회 당시 물의를 빚어 대한축구협회로부터 6개월간 선수 자격 정지 처분을 받았다.
1972년 국가대표 B팀과의 경기에 출전했으며, 싱가포르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추가골을 득점하였다. 선수 은퇴 후 강남조기축구회에서 활동했으며, 1979년 연고 OB 올스타전에 출전하였다. 1988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 전 40대 올스타전과 1989년 제2회 연고 OB 정기전에 40대 장년팀 일원으로 참가하여 득점을 기록하였다.
2.2. 국가대표팀 경력
정병탁은 1962년 아시안 게임 선수 선발 대회에 출전했으나 최종 선발되지 못했으며, 1963년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참가했지만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그 해 버마와의 친선경기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1964년 하계 올림픽 2차 예선에서 필리핀이 기권하여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1964년 AFC 아시안컵에 참가해 활약했다. 1966년 FIFA 월드컵 예선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대한축구협회의 불참 결정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1966년 아시안 게임 선수 후보 명단에는 포함되었지만 최종 선발되지 못했다. 같은 해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서는 논란 끝에 추가 명단에 발탁되어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다. 일본과의 예선 경기에서 선제골을 어시스트했으며, 본선 태국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득점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 대표팀은 4위에 머물렀다.
1967년 국가대표팀 상비군 명단에 포함되었고, 미들섹스 원더러스 AFC와의 1차 평가전에 출전하였다. 1968년 AFC 아시안컵 예선에서 일본,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본선 진출에는 실패하였다.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서는 말레이시아와의 4강전에서 동점골을 넣는 등 활약하며, 공동 우승에 기여하였다. 1968년 하계 올림픽 예선 레바논과의 경기에서 멀티골, 베트남 공화국과의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했으나, 본선 진출에는 실패하였다. 남베트남 인디펜던스컵 태국과의 경기에서 1골 1어시스트, 베트남 공화국과의 4강전에서 추가골을 기록하며 대회 준우승에 공헌하였다.
1969년 1970년 FIFA 월드컵 예선 일본과의 두 경기에서 모두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대표팀의 선전에 기여했다. 킹스컵 라오스와의 조별 라운드 경기와 베트남 공화국과의 4강전에서 득점하며 우승을 이끌었다. 1969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1970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이원화 원칙에 따라 A팀인 청룡팀에 포함되었으며, CR 플라멩구, 올라리아 AC, B 1903과의 평가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 해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주장으로 참가, 인도와의 4강전에서 2어시스트, 버마와의 결승전에서 이회택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대표팀의 사상 첫 단독 우승에 크게 공헌하였다. SL 벤피카와의 평가전에서 선제골에 관여하는 활약을 보였으며, 경기 후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하였다. 은퇴식에서 대한축구협회로부터 공로패를 수여받았다.
3. 은퇴 이후
국민생활체육협의회 소속 선수들이 창단한 60세 이상 선수들로 구성된 '고양시 실버축구단'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2010년 새로 출범한 '서울시 실버축구단'으로 옮겨 활동하였다.
또한 2002년 FIFA 월드컵 D-100일을 앞두고 진행된 '일본 간사이 지방 OB 축구회'와의 친선경기에 출전했으며, 2009년 '양지 축구단 OB팀'의 일원으로 국가정보원 직원들로 구성된 '구룡회'와의 친선경기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2011년 창설된 65세 이상의 축구 국가대표팀 출신 선수들로 구성된 '국가대표 OB 축우회'의 총무를 맡았다.
이외에 다수의 '한국 OB 지회 축구대회'에 참가했으며, 다수의 '경평 OB 대항축구전'에 '서울 OB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였고, 다수의 '한국 대학 OB 축구대회'에 '연세대 OB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4. 지도자 경력
은퇴 이후 1980년 대한축구협회의 기술위원으로 선임된 뒤 부위원장에 올랐으며, 1981년 개인 업무를 사유로 사표를 제출하였다. 한동안 회양화학에서 상무로 근무하며 축구계와 거리를 두었다.
1984년 연세대학교의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이끌며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고, 고려대학교 진학이 유력했던 김봉길을 스카우트하였다. 1985년 김현석 등 유망 선수들을 데려오는데 성공했으며, 대한민국 U-20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1986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의 예선을 지휘하였다.
1989년 한국대학축구연맹의 기술이사가 되었으나, 업무 소관을 침해당했다는 사유로 3개월만에 사임하였다. 같은 해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팀의 우승을 이끌어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고, 1990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사임한 이회택의 후임 중 한 명으로 검토되었으나 이차만이 낙점되었다. 1992년 아주대학교와의 전국대학축구연맹전 춘계 대회 경기에서 효창운동장에서의 경기를 위해 져주기 의혹을 받아 한국대학축구연맹으로부터 1년 감독 정지의 중징계를 받았으며, 1993년 연세대학교 감독직을 사퇴하였다.
1994년 대한축구협회 상벌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전남 드래곤즈의 초대 감독 후보로 거론되었다. 허정무가 계약을 고사함에 따라 계약금 1억원, 연봉 6천만원의 조건으로 정병탁이 선임되었다. 1995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과 CA 보카 주니어스의 평가전 당시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았으나, 대한축구협회는 정병탁이 해당 1경기만을 지휘하도록 해 국가대표팀이 임시변통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전남 드래곤즈에서는 1995년 리그컵에서 1승 3무 3패로 최하위를 기록하며 고전하였으나, 1995년 K리그에서는 전기리그 6위 (4승 2무 8패), 후기리그 5위 (4승 5무 5패)의 성적을 기록하였다. 1996년 리그컵 경기에서 노상래와 김봉길이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폭력 및 폭언을 하여 정병탁에게 선수 관리 책임을 물어 연봉 30% 감봉 징계 및 한국프로축구연맹으로부터 엄중 경고 조치를 받았다. 1996년 K리그 개막 이후 2연패 및 홈 경기 무승 등의 성적 부진으로 인해 1996년 5월 경질되었다.
1995년 국민생활체육협의회의 '청소년 축구교실'에 참여해 전라남도 순천시 지역을 담당했으며, '전국 축구교실 초청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2002년부터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의 한수초등학교에서 '어린이 축구교실'을 운영했으며, 2004년 창립된 '고양시 유소년 축구협회'에도 참여하였다. 2005년 대한축구협회로부터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
6. 기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하던 1960년대 당시 조윤옥, 조성달, 김호, 김호엽 등과 함께 말레이시아 현지에서 많은 팬들을 보유하였다. 1972년 10월 21일 자신의 팬이었던 배우자와 결혼식을 올렸으며, 이후 한 차례 더 결혼식을 올렸으나 1987년 1월 23일 강원도 평창군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인해 부인이 사망하였다. 아들인 정상남 또한 축구인이다.
1974년 국가대표팀 주장을 맡고 있던 당시 대한축구협회의 회장이었던 장덕진에게 당시 국가대표팀 소속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감사패를 마련하였다. 1995년 문화방송에서 2002년 FIFA 월드컵의 대한민국 유치를 위한 축구 붐을 조성하기 위해 방영한 '비바 꼬레아 2002 월드컵'의 2부에 출연하였다.
1999년 대한축구협회 측에서 역대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축구용품을 수집한 뒤 축구회관 1층에 축구박물관을 마련할 당시, 자신이 선수 시절 사용했던 축구화를 기증했으며, 이는 대한축구협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축구화가 되었다. 2003년 베스트일레븐 창간 33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한국축구 100년을 빛낸 55인' 중 '60년대 베스트11'에 포함되었다.
2004년에 1968년 당시 이라크에서 개최된 세계 군인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던 양지 축구단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대한민국 U-23 대표팀과의 평가전을 위해서 서울특별시에 체류하던 이라크 U-23 대표팀 '평화의 볼'로 명명된 국제축구연맹 공인구 및 2002년 FIFA 월드컵 기념구 등 100여개의 축구공을 전달하였다. 2008년에 서울특별시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2010년 FIFA 월드컵 예선 경기에 양지 축구단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참관하였다.
7. 수상 경력
7.1. 클럽
정병탁은 양지 축구단에서 활동하며 아시안 챔피언 클럽 토너먼트 준우승 1회(1969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우승 1회(1968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우승 1회(1968년)를 기록하였다. 이후 신탁은행 축구단으로 이적하여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 1회(1971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우승 1회(1971년 춘계), 준우승 2회(1970년 추계, 1971년 추계)를 기록하였다.
7.2. 국가대표팀
정병탁은 1964년 AFC 아시안컵에서 3위를 기록했다.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서 1967년과 1970년에 우승을 차지했으며, 1969년 킹스컵 우승, 1967년 남베트남 인디펜던스컵 준우승을 기록했다.
7.3. 감독
정병탁은 감독으로서 1984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1987년에는 같은 대회에서 준우승을 기록했다. 1989년에는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이끌었으며, 1988년 전국체육대회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했다.
7.4. 개인
* 대한축구협회 시상식 베스트 11: 1회 (1969년)
*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지도자 감독상 (1984년)
*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지도자 감독상 (198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