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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조 (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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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조는 전량의 인물로, 장준의 서자이자 장중화의 형이었다. 박학하고 용감하며 정사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내면은 음흉하고 교활했다. 동생 장중화 사후 권력을 장악하여 양공에 즉위한 후, 폭정과 패륜을 일삼았다. 그는 왕을 자칭하고 연호를 제정했으며, 반대하는 신하들을 처형하고 음란한 행위를 일삼아 민심을 잃었다. 외교적으로도 혼란을 겪으며 결국 장관의 반란으로 살해당했다. 장조의 통치는 전량의 국력을 약화시켰고, 그의 폭정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권력 남용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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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조 (전량)
기본 정보
이름장조
한자 표기張祚
태백 (太伯)
묘호없음
시호위왕 (威王) (장천석이 추증)
존호대도독, 대장군, 양주목, 양공 (大都督 大將軍 涼州牧 涼公, 353–354), 황제 (354 이후)
연호화평 (和平)
재위 기간353년–355년
왕조전량
아버지장준
생애
출생미상
사망355년
가족
배우자신왕후, 질간왕후
자녀미상
추존
시호위왕 (威王)
능묘민릉

2. 생애

장조는 장준의 서자(庶子)이자 장중화의 형이었다. 353년 장중화가 병에 걸리자 아들 장요령을 후계자로 삼고 장조를 섭정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장조는 조장, 위집과 결탁하여 유언을 조작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장중화 사후 장조는 장요령을 폐위하고 양녕후(凉寧候)로 강등시켰으며, 스스로 양공(凉公)에 즉위하였다.

354년 왕을 자칭하고 사연호(私年號)인 화평을 제정하였다. 선대 군주들을 모두 왕으로 추존하였으나, 이에 반대하는 마급등의 신하들을 파직하거나 처형하는 등 음란과 폭정을 일삼아 민심을 잃었다. 그의 후궁은 3만에 육박했고, 궁중 요리사 서흑(徐黑)의 딸을 강간하여 자살하게 만들었다.[1]

환온이 북벌을 일으켜 전진을 공격하자 전량의 진주자사(秦州刺史) 왕탁이 이 사실을 장조에게 알렸다. 장조는 왕탁이 배반할 것을 두려워하여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환온이 돌아가자 군사를 보내 왕탁을 공격했으나 패배하고, 왕탁은 전진으로 도망쳐 항복하였다.

355년 장조는 하주자사(河州刺史) 장관을 몰아내려 하였다. 이에 장관은 반란을 일으켜 장요령을 복위시키려 하였다. 장조는 장요령을 살해하였으나, 장관의 군대가 수도 고장(姑臧)에 육박하자 성 안에서 모반이 일어났다. 결국 성은 함락되었고, 장조는 궁중 요리사 서흑에게 살해당했다.[3][4]

2. 1. 초기 생애와 권력 장악

장준의 서자이자 장중화의 형이었던 장조는, 박학하고 용감하며 정사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음흉하고 교활했다.[1][2] 345년에는 아버지 장준으로부터 연흥군 태수에 임명되었고, 장녕후에 봉해졌다. 346년 5월, 장준이 세상을 떠나자 이복 동생인 장중화가 뒤를 이었다. 장조는 나이가 더 많았지만 서자였기 때문에 뒤를 이을 수 없었다. 장중화 시대에 장조는 서하상에 임명되었다.

353년 장중화가 병에 걸리자, 장조는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엿보았다. 장중화는 아들 장요령을 후계자로 삼고 장조를 섭정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장조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장중화는 유언으로 사애에게 후사를 부탁했지만, 장조는 조장, 위집과 결탁하여 유언을 조작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장중화가 사망한 뒤, 장조는 장요령을 폐위하고 양녕후로 강등시켰으며 스스로 양공(凉公)에 즉위하였다.

2. 2. 폭정과 패륜

354년 왕을 자칭하고 사연호(私年號)인 화평을 제정하였다. 선대 군주들을 모두 왕으로 추존하며 권위를 높이려 하였다.[3] 이에 반대하는 마급등의 신하들을 파직하거나 처형하는등, 음란과 폭정을 일삼아 민심을 잃었다. 후궁이 3만에 육박했으며, 궁중 요리사 서흑(徐黑)의 딸을 강간하고 자살하게 만들었다.[1]

張祚|장조중국어는 즉위한 이후 음란하고 포악해져 도덕에도 따르지 않았다. 장중화의 아내인 배씨와 육체관계를 맺었으며, 더 나아가 합내에 있는 잉첩·장준·장중화의 자녀 중 시집가지 않은 자들을 모두 범했다. 나라 사람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불만을 나타냈고, 『장자시』를 지어 간접적으로 그 행위를 비난했다. 張祚|장조중국어의 폭정은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특히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그의 패륜적인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2. 3. 외교적 혼란과 몰락

354년, 환온이 북벌을 일으켜 전진을 공격하자, 전량의 진주자사(秦州刺史) 왕탁은 장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장조는 왕탁이 배반할 것을 두려워하여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환온이 군사를 돌리자, 장조는 군사를 보내 왕탁을 공격했다. 왕탁은 패배하고 전진으로 도망쳐 항복했다.

355년, 장조는 하주자사(河州刺史) 장관을 몰아내려 했다. 이에 장관은 반란을 일으켜 장요령을 복위시키려 했다. 장조는 장요령을 살해했으나, 장관의 군대가 수도 고장(姑臧)에 육박하자 성 안에서 모반이 일어났다. 결국 성은 함락되었고, 장조는 궁중 요리사 서흑에게 살해당했다.[3][4]

3. 평가

장조는 폭정과 패륜으로 인해 전량의 국력을 약화시키고, 결국 자신의 목숨까지 잃은 인물이다. 그의 통치는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동아시아 역사에서 부정적인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장조는 여러 신들을 폐지하여 산과 강이 말라 버렸다고 전해진다. 또한 오도위를 설치했지만, 그 관리들이 강간 등의 횡포를 부려 백성들의 원망이 컸다.[2] 사품 이하의 관리들은 옷과 비단을 얻지 못했고, 서민들은 가축과 노비를 얻지 못해 수레와 말을 타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정도였다.[2] 이러한 상황은 백성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장조의 폭정은 355년 장관의 반란으로 이어졌고, 결국 그는 궁중 요리사 서흑에게 살해당했다.[2] 그의 죽음은 권력 남용의 비참한 말로를 보여준다.

3. 1. 관련 인물

장조는 전량의 왕 장준의 서자이자, 장중화의 형이었다. 박학하고 웅건하며 정사의 재능이 있었지만, 본성은 속이 검고 교활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아첨하며 선인인 척하였다고 한다.[1]

353년 장중화가 병에 걸려 장요령을 후계자로 삼고 장조를 섭정으로 삼았으나, 장조는 권력을 장악하고 355년 장관의 반란 와중에 궁중 요리사 서흑에게 살해당했다.[2]

장조와 관련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장요령: 장조의 조카로, 장조에 의해 폐위된 전량의 군주였다.
  • 사애: 장중화의 충신이었으나, 장중화 사후 장조에게 살해당했다.
  • 왕탁: 장조의 장수였으나, 장조에게 배신당하고 전진에 항복했다.
  • 장관: 장조에게 반란을 일으킨 주도자이다.
  • 송혼: 장관과 함께 반란에 가담한 인물이다.
  • 서흑: 장조를 살해한 궁중 요리사이다.

3. 1. 1. 가계

아버지장준
부인신 황후
아들장태화
장정견


3. 1. 2. 주요 관계자

인물관계설명
장요령조카장조에게 폐위된 전량의 군주.
사애장중화의 충신장중화 사후 장조에게 살해됨.
왕탁장수장조에게 배신당하고 전진에 항복.
장관반란 주도자장조에게 반란을 일으킴.
송혼반란 가담자장관과 함께 반란을 일으킴.
서흑궁중 요리사장조를 살해.


4. 기타

장조는 장준의 서자이자 장중화(張重华)의 형이었다. 그는 후궁이 3만에 육박했으며, 그중 궁중 요리사 서흑(徐黑)의 딸을 강간하여 자살하게 만들었다. 결국 장조는 서흑에게 살해당했다.[3]

환온(桓溫)이 북벌을 일으켜 전진(前秦)을 공격하자, 장조는 왕탁(王擢)을 암살하려다 실패했고, 왕탁은 전진으로 도망쳐 항복하였다.

355년, 장조는 장관(張瓘)에게 장요령을 복위시키려는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다. 장조는 장요령을 살해했으나, 장관의 군대가 수도 고장(姑臧)에 육박하자 성 안에서 모반이 일어나 함락되었고, 장조는 궁중요리사 서흑에게 살해당했다.[3]

4. 1. 연호

4. 2. 전설과 이적


  • 장조가 왕위에 오른 날 밤, 하늘에 수레 덮개와 같은 빛이 나타나 천둥과 같은 소리를 내며 성읍을 뒤흔들었다.[3] 다음 날에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검은 기운이 나타나 한낮임에도 어둠에 휩싸였다. 이러한 이상 현상은 이후에도 자주 발생하였다고 한다.
  • 장관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파견했을 때, 현무전(玄武殿)에 신이 내려와 스스로를 현명(玄冥)이라 칭하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조가 그날 밤 신에게 기도를 드리자, 신은 복을 내려주겠다고 약속했고, 장조는 이를 굳게 믿었다.

참조

[1] 서적 晋書
[2] 서적 晋書
[3] 서적 晋書
[4] 서적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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