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 (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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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준은 307년에 태어나 346년에 사망한 전량의 군주이다. 장식의 아들로, 324년 숙부 장무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전조에 굴복했던 전량의 칭호를 사용했으나, 동진과 관계를 유지하며 서진의 연호를 사용했다. 327년 전조로부터 독립하여 영토를 확장했고, 동진의 대장군으로 임명받았다. 내부적으로는 왕을 칭하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지만, 백성에게는 부담을 주기도 했다. 346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장충화가 뒤를 이었다. 유능한 군주로 평가받으며 영토 확장과 내부 통치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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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 (전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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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장준 |
작위 | 량의 군주 |
재위 기간 | 324년–346년 |
전임자 | 장무 |
후임자 | 장중화 |
시호 (동진) | 충성공 |
시호 (자체) | 문왕 |
묘호 (자체) | 세조 |
연호 | 민제의 건흥 (324년–346년) |
성명 | 장준 |
자 | 공정 |
출생 | 307년 |
사망 | 346년 |
아버지 | 장식 |
관직 (324–333) | |
관직명 | 지절 대도독 대장군 량주목 영호강교위 서평공 |
관직 (333–345) | |
관직명 | 진서대장군 량주자사 영호강교위 서평공 |
관직 (345 이후) | |
관직명 | 대도독 대장군 가량왕 |
2. 생애
324년 장무가 병사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전조의 번국이었으나, 327년 전조가 후조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쇠약해지자 전조로부터 독립하였다. 330년부터 하남(河南 : 간쑤성 동부)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며 후조의 복속 요구에도 불응하였다. 장준은 동진에 복속되어 있음을 표방하였는데 내부적으로는 왕을 칭하였다. 334년에는 동진에서 장준을 대장군·도독섬서옹진량주제군사에 임명하였다.[5]
장준은 서역의 구자, 선선 등의 여러 나라를 지배하에 두었으며 농서 지역을 경영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345년에는 영토를 량주, 하주[11], 사주로 나누고 대도독·대장군·가량왕(假涼王)을 자칭하였다.
346년에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공(文公)이며, 동진 목제는 충성공(忠成公)이라 시호를 하사하였다. 354년에 장조가 문왕(文王)으로 추존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즉위
장식의 아들로 307년에 태어났으며, 건흥 4년(316년)에는 패성후에 봉해졌다. 10세에 이미 문재가 탁월했지만, 유흥에 빠져 매일 밤 읍이나 리로 몰래 나가 놀았기 때문에 나라 안의 사람들이 이 풍속을 따르게 되었다.[3]320년 6월, 아버지 장식이 암살되자, 좌사마 음원 등은 장준이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장식의 동생인 장무를 후계로 세웠다. 장무는 장준을 무군장군·무위군武威郡|무웨이 군중국어 태수로 임명하고 서평공에 봉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장준을 세자로 세울 것을 선언했다.[3]
324년 5월, 장무가 병으로 쓰러지자 장준에게 "나의 관위는 조정의 임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직무는 사적인 논의에 의한 것으로 덧없는 것이다. 내가 죽으면 흰색 변모를 관에 넣고, 조복은 입히지 않도록 하라"고 유언하고 곧 세상을 떠났다.[4] 서진 민제의 사자였던 황문시랑 사숙이 고장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좌장사 범위, 우장사 마모 등은 사숙에게 장준을 옹립하도록 우회적으로 요청했다. 이로 인해 장준은 사지절, 대도독, 대장군, 양주 목 및 영호강교위에 임명되었고, 서평공에 봉해졌다. 영내에 대사령을 내리고 좌우전후에 사솔관을 두었으며, 남궁을 수리했다. 전조 황제 유요 역시 사자를 파견하여 장준을 상대장군, 양주목, 양왕에 임명했다. 전량은 선대부터 전조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계속해서 서진의 연호인 건흥 12년(서진 자체는 건흥 5년에 멸망했다)을 사용했으며, 동진과도 관계를 유지했다.
12월, 포한을 통치하던 신안이 장준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포한과 함께 반기를 들었다. 장준은 군신들을 한예당에 모아 논의를 벌였고, 무위군 태수 두도 등을 파견하여 신안을 토벌하려 했다. 종사 유경은 "패왕은 감정으로 행동하지 않고, 반드시 천시와 인사를 모두 얻은 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올해는 기근의 해이며, 게다가 지금은 혹한의 시기입니다. 주의 무왕은 무기를 거두고 은나라의 멸망을 기다렸고, 한의 조조는 시간을 들여 원소 등의 자멸을 기다렸습니다. 신안 부자는 잔인하고 흉악하니, 그 패배는 필연적이므로, 이를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간언했고, 장준은 이 말을 따랐다. 신안은 이듬해 안에 포한과 함께 항복했고, 장준은 그를 호군에 임명했다. 이로 인해 다시 하남의 땅은 장준의 지배하에 놓였다.
325년 1월, 친경적전(권농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천자가 행하는 농경 의례)을 직접 행했다. 2월, 동진 원제의 붕어 소식이 전해지자, 장준은 3일 동안 애도했다. 이때 황룡이 수차의 가천에서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자, 우장사 범위는 장준에게 "건흥의 연호는 민제로부터 시작된 호이지만, 그 민제는 불운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용의 출현을 길조로 삼아 개원해야 합니다."라고 권했지만, 장준은 따르지 않았다.
2. 2. 전조로부터의 독립과 영토 확장
327년, 전조가 후조에게 패배하자 장준은 전조로부터 받은 모든 관직을 버리고 동진의 관직으로 돌아가 전조의 진주(지금의 간쑤성 동부)를 공격했다.[5] 유요는 아들 유인을 파견하여 반격했고, 유인은 황하 이남의 전량 영토를 점령했으나 더 이상 진격하지는 않았다. 329년 전조가 후조에게 멸망하자, 전량은 황하 이남의 땅을 되찾았다.330년, 후조의 황제 석륵은 사신을 보내 전량을 회유하려 했지만, 장준은 이를 거절하고 사신을 억류했다. 오히려 군대를 파견하여 다시 하남 땅을 지배하에 두고, 적도에 이르러 무가, 석문, 후화, 강천, 감송에 오둔호군을 설치하여 후조와의 국경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해 후반, 후조의 장군에게 흉노 추장이 격파되자, 장준은 불안감을 느껴 후조에 복종했다.
장준은 동진에 복속되어 있음을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독립적인 통치 체제를 유지했다. 334년 2월, 동진 조정은 사자를 파견하여 장준에게 대장군·도독섬서옹진량주제군사에 임명하는 인수를 수여했다.[6]
335년 12월, 장준은 양선에게 병사를 주어 서역으로 파견하여, 구자, 선선을 토벌하게 했다. 서역의 여러 나라를 복속시키고, 농서 지역을 경영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2. 3. 동진과의 관계 및 내부 통치
334년 2월, 동진은 사신 경방과 왕풍을 보내 장준에게 대장군, 도독섬서옹진량주제군사[5] 직을 수여했다. 이로써 양주와 량주 간 교통이 열려, 전량은 매년 동진에 사신을 보냈다.장준은 고장성 남쪽에 겸광전(謙光殿)을 짓고 오색 문양과 금, 옥으로 장식하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겸광전 사면에는 계절별로 머무는 전각을 세웠는데, 동쪽은 의양청전(봄), 남쪽은 주양적전(여름), 서쪽은 정덕백전(가을), 북쪽은 현무흑전(겨울)이었다. 각 전각 옆에는 내관 관청을 두고 해당 방향의 색으로 채색했으나, 말년에는 계절과 상관없이 거주했다.
345년 12월, 장준은 영토를 량주, 하주[11], 사주로 나누었다. 무위 등 11개 군[9]으로 량주를 설치하고 세자 장중화를 량주자사 · 오관중랑장에 임명했다. 흥진 등 8개 군[10]으로 하주[11]를 설치하고 영융교위 장관을 하주자사로, 둔황 등 3개 군[12]과 서역도호 · 무기교위 · 옥문대호군의 3영으로 사주를 설치하고 서호교위 양선을 사주자사로 임명했다. 장준은 대도독 · 대장군 · 가량왕(假涼王) · 섭삼주를 자칭하며 군왕의 의식을 따랐다. 백관을 설치하고 관직명에만 차이를 두었으며, 관료들은 장준을 신하라 칭했다.
이러한 지나친 토목 공사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는 비판도 있다.
2. 4. 사망과 후계
346년 여름, 장준은 사망하였다. 그의 태자 장충화가 뒤를 이었다. 건흥 34년(346년) 5월, 장준은 병으로 정덕전(正德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재위 기간은 22년, 향년 40세였다. 시호는 문공(文公)이었다. 동진의 목제는 사자를 보내 대사마로 추증하고 충성공(忠成公)으로 추시했다. 같은 해 7월, 대릉(大陵)에 장례를 치렀다. 아들 장조가 왕위를 칭하자 문왕(文王)으로 추시하고 묘호를 세조(世祖)로 하였다.[1]3. 평가
장준은 오호십육국시대 전량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고 영토를 확장한 유능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장궤가 량주에 근거한 이후 군사 행동을 일으키지 않은 해가 없었지만, 장준 대에 이르러 비로소 영내는 평온을 맞이했다.[13] 장준은 롱시의 땅을 모두 영유하여 병마가 강성해졌으며, 동진의 신하를 자처했지만, 그 연호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점은 그의 실질적인 독립 추구와 정치적 능력을 보여준다.
장준은 계략이 있었고, 어릴 적에는 유흥에 빠졌지만, 성장하면서 절조를 갈고 닦아 정무 전반에 힘썼다. 문무백관을 통솔하고, 그 능력에 따라 적절하게 기용했으며, 건의하는 바를 많이 받아들였다.[14] 백성은 부유하고 병사는 강했으며, 원근을 막론하고 모두 그 통치를 칭찬하여, 장준은 적현군[15]으로 불렸다. 또한 문재에도 뛰어났다.
다음은 장준의 치세에 있었던 몇 가지 일화들이다.
- 건흥 22년(334년), 장준은 형벌을 엄하게 하는 것을 논의했는데, 참군 황빈은 법이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준은 황빈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를 발탁했다.
- 건흥 24년(336년) 5월, 기근이 들어 곡물 가격이 폭등하자, 시장 담상은 창고의 곡물을 백성에게 나눠주고 가을에 3배를 징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종사 음거는 이것이 백성을 수탈하는 행위라고 비판했고, 장준은 이를 받아들였다.
- 건흥 16년(328년), 서역 장사 이백이 반란을 일으킨 조정을 토벌하다 패배하자, 장준은 한 무제가 왕회를 죽인 것보다 진 목공이 맹명시를 사면한 것이 낫다며 이백을 사면했다. 백성들은 이 일에 모두 기뻐하고 복종했다고 한다.
- 같은 해, 장준은 형벌을 바르게 집행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죄를 지어 사형당한 자의 친족은 궁내 숙위를 담당할 수 없도록 하는 명령을 내렸다.
- 주천군 태수 마급의 건의에 따라 서왕모의 사당을 세워 조정의 복을 빌었다.
하지만, 『위서』에서는 장준의 치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 장준은 탐욕스럽고 만족할 줄 몰랐으며, 백성에게 곡식과 비단을 빌려주고 매년 그 배에 해당하는 이자를 거두어들였다.
- 장준은 신분에 걸맞지 않게 거만하고 뽐냈으며, 백성은 노고로 인해 원망을 품었다.
- 참군 삭부는 석전 개간에 대해 간언했다가 장준의 분노를 사 좌천되었다.
- 장궤가 량주를 지배하는데 공헌한 음담의 동생 음감에게 자살을 명해 민심을 크게 잃었다.
이처럼 장준은 유능한 군주로서의 면모와 함께 과도한 사치와 토목 공사, 권력 집중으로 인한 부정적인 면모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4. 연호
5. 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장시 (서평 원공) |
부인 | 연공주 |
주요 후궁 | |
자녀 |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Jin Shu
[3]
서적
Jin Shu
[4]
서적
Zizhi Tongjian
[5]
문서
五錫とも
[6]
문서
元礼とも
[7]
서적
資治通鑑
[8]
서적
十六国春秋
[9]
문서
武威・武興・西平・張掖・酒泉・建康・西海・西郡・湟河・晋興・広武
[10]
문서
金城・興晋・武始・南安・永晋・大夏・武城・漢中
[11]
서적
晋書
[12]
문서
敦煌・晋昌・高昌
[13]
서적
資治通鑑・十六国春秋
[1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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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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